[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광화문 세종대로사거리에서 종각 못 미쳐 을지로 방향으로 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 위에는 광통교(廣通橋)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광통방에 자리잡고 있어 광통교 또는 광교라고 불렀는데 ‘넓게 통하는 다리’라는 뜻에 맞게 조선시대에 가장 붐볐던 다리였지요. 을지로 가까이 있었던 소광통교와 구분하여 대광통교로도 불렀으며, 일명 큰광교ㆍ큰광통교로도 불렀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로, 《승정원일기》에는 광충교(廣沖橋)로도 쓰여 있습니다.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었지요. 이 광통교는 태조가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흙으로 놓았는데, 태종 10년(1410) 큰 비로 다리가 떠내려가자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가져다 돌다리로 만들었습니다. 태종은 자신이 미워했던 신덕왕후 무덤 보호석들을 그 광통교의 교각으로 씀으로써 만백성들이 밟고 지나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 알아둬야 할 것은 광통교 하류쪽 교각에 오목새김으로 새겨진 개천 준천 사실입니다. 일제강점기 초 이름이 바뀐 ‘청계천’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최북(崔北, 1712~86)이 그린 그야말로 최북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채도>가 있습니다. 붉은빛 무와 가지, 그리고 오이를 마치 정물화를 그리듯 배경 없이 그려낸 이 그림은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특별한 물건이 아닌 삶에서 흔히 보는 푸성귀(채소)들을 소재로 했는데도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이를 볼 수 있습니다. 최북의 그림 속에는 꽃과 새가 별로 없습니다. 대신 그는 그의 기질 때문인지 파격적으로 가지와 무를 그린 그림이 있는 것이지요. 최북과 견줄 수 있는 서양의 고흐가 남이 잘 그리지 않는 구두와 낡은 의자를 그리듯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북은 고귀한 것,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삶에서 흔히 보이는 것을 그저 친근하게 그렸고, 평범함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북의 호는 붓으로 먹고 산다 하여 ‘호생관(毫生館)’ 자신의 이름 북(北) 자를 반 자르면 칠(七)자가 된다 하여 스스로 ‘칠칠이’라 했고,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도 불렸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마음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10월 27일 저녁 7시 경기도 과천 과천시민회관 대강당(사)에서는 한국경기소리보존회 제15회 정기공연 "경기천년, 경기소리로 수놓다" 공연이 열렸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 보유자며, (사)한국경기소리보존회 이사장 임정란 명창이 15해를 이끌어온 꿈같은 대공연이다. 임정란 명창은 “내년은 경기천년의 해입니다. 긴 세월 경기소리도 민중예술로 함께 하였으며, 지금도 많은 소리꾼들이 다양한 공연 등으로 대중을 만나고 있습니다. 실력과 인격을 갖춘 전문적인 소리꾼들의 배출로 경기소리의 예술성과 보존가치가 면면히 빛이 나기를 바랍니다.”라고 공연 인사말을 했다. 공연의 해설을 맡은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단국대 국악과 명예교수)은 무대에 올라 “임정란 명창은 경기소리와 이를 기본으로 하는 경기소리극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것은 물론 과천이라는 지역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과 과거 그의 집안이 이루었던 영광의 세월을 오늘에 다시 재현해 보겠다는 의지로 15년을 올곧게 이어온 소리꾼이다. 오늘 공연은 임 명창과 그 제자들이 내년으로 도래한 경기 천년의 해를 맞이하여, 경기소리의 은은한 멋과 흥취, 경기소리만이 지닌 음악적 특색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한국인터넷기자협회(회장 김철관)가 27일 낮 2시 30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창립 15주년 기념식을 열고 '2017 인터넷기자의 날'을 제정해 선포했다. 이날 김철관 한국인터넷기자협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지난해 오늘 10월 27일은 헌법재판소가 5인 미만의 인터넷신문을 폐지하는 박근혜 정부의 신문법 시행령에 위헌 결정을 내린 날이다."며 "따라서 오늘 '인터넷기자의 날'을 제정, 선포한 것은 뉴 미디어 언론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뜻깊은 날이다."라고 말했다. 협회는 인터넷기자의 날 제정 선언문을 통해 "우리가 실천하려는 저널리즘은 약자의 권리 찾기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것며, 저널리즘은 불공정한 낡은 사회적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고, 적극적으로 그 해답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와 화해의 종소리를 언론 활동을 통해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힘차게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임을 밝혔다. <인터넷기자협회> 창립 15돌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인터넷기자협회는 2016년 신문법시행령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며 인터넷 언론의 자유를 지켜내는 데 크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회장 장병화)는 제11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학술부문에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를, 사회부문에는 한상권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상임대표를 뽑았다. 1965년 국민적 반대 속에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임종국 선생(1929∼1989)은 우리 근현대사 왜곡의 근본 원인이 과거사 청산의 부재에 있음을 직시하고, 반민특위 와해 이후 금기시되고 있던 친일문제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하여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던졌으며, 그 외에도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작들을 남겨 한국지성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은 ‘친일청산’, ‘역사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이라는 선생의 높은 뜻과 실천적 삶을 오늘의 현실 속에 올바르게 계승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를, 학술ㆍ문화와 사회ㆍ언론 두 부문에서 뽑아 시상한다. 2005년부터 해마다 수상자를 냈으나, 2008년과 2009년도는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한 주관단체의 사정으로 시상이 잠시 중지되었으며, 올해가 11회째이다.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ㆍ문화 부문 6 사회ㆍ언론 부문 6 등 12건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비취빛 바닷물이 우물물이라면 / 구태여 물허벅에 과물 가득 담아 이고 져 나르지 않아도 좋았으리 / 허리 굽은 팔순 노모 기다리는 납음 어도 어음 원동 처녀들 / 어서 어서 퍼나르세 과물의 단물. 이는 이한꽃 시인의 “과물”이라는 시입니다. 제주도 애월읍 곽지해수욕장에는 과물이라 부르는 샘이 있습니다. 과물은 다른 말로 “석경감수(石鏡甘水)”라고도 하는데 석경은 땅이름이고, 감수는 물맛이 좋다는 말이지요. 전하는 말로는 지금으로 부터 약 2,000 년 전 설촌 사람들은 바닷가에 있는 이 샘물을 먹는 물로 썼습니다. 그 까닭은 가뭄으로 마을의 우물이 말라버렸기 때문이지요. 이때 물을 나르기 위해 쓴 것이 물허벅(물을 담는 토기)으로 물구덕(대나무로 만든 바구니) 에 담아 날랐습니다. 그러나 1960년 이후 상수도가 생기면서 이 샘물을 먹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 천연샘이라고 하지요. 이제는 물을 먹는 대신 여름철에는 제주에서 유일하게 노천탕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를 기리기 위해 노천탕 앞에 물허벅을 등에 진 여인상과 해녀상을 세워두었지요. 참고로 근처에는 ‘곽악삼태’, ‘삼족정뢰’, ‘치소암석’, ‘장사어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충북 청주의 충북대학교박물관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109호 청주 출토 “순천김씨 옷과 편지“가 있습니다. 이는 1977년, 청원군 석병산에 있는 채무이와 그의 부인 무덤을 이장할 때 관에서 나온 것으로 옷과 당시 채씨 집안에 오고간 편지들입니다. 채무이(1537∼1594)는 임진왜란 중인 선조27년(1594)에 죽었고 그의 둘째 부인인 김씨는 임진왜란 전에 죽은 것으로 보여 이곳에서 출토된 옷과 편지들은 임진왜란 때의 유물들이지요. 옷은 김씨 부인이 평소에 입었던 것으로 겹누비철릭 1점, 겹누비바지 2점, 겹회장저고리 2점, 직령 겹두루마기 1점, 목면 겹저고리 1점, 모시 치마 1점, 베적삼 1점, 모시철릭 1점, 토시 1점 등이 있습니다. 원래 철릭은 조선시대 문무관리들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국난을 당했을 때, 임금을 호위할 때 입었던 옷인데 여자도 철릭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철릭 초기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복식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특히 옷과 함께 편지 뭉치가 관 속 빈 공간을 채운 채 192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모두 닥나무 한지(韓紙)에 쓴 것인데 한문편지 3점을 빼고는 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덕은 군자의 보배, 문화는 나라의 빛 惟德君子寶 오직 덕은 군자의 보배요 有文國家光 문화는 나라의 빛이로다. 天喜時相合 천하늘이 즐거워하니 때가 서로 화합하고 人和地不違 인심이 화합하니 땅이 어기지 않는다. 고 운암(雲庵)곽영민(郭永敏)선생은 일본,미국,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으며,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그뿐만 아니라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가면 국보 제8호 “낭혜화상탑비(郎慧和尙塔碑)”가 있습니다. 이는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입니다. 빗돌 높이 263㎝, 너비 155㎝, 두께 43㎝, 전체 높이 4.55m에 달하는 거대한 모습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넣은 당시를 대표할 석비지요.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몸체를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ㆍ보수하였습니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로 재미납니다. 등에는 선명한 육각무늬를 새겼고, 가운데는 굵직한 구름무늬가 있지요. 맨 위에 올린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새겼는데, 힘찬 용틀임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5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지난 2월 12일 외신에는 '메뚜기떼'가 볼리비아를 덮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메뚜기떼는 구름처럼 하늘을 덮고, 농작물을 공격했는데 1,100헤타르가 넘는 농경지의 옥수수, 사탕수수, 땅콩 등의 농작물이 무차별 공격을 받고 쑥대밭이 됐다는 소식이었지요. 이에 볼리비아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메뚜기떼의 습격은 조선시대에도 흔했던 일이었지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메뚜기떼’를 뜻하는 “황충(蝗蟲)”이란 말이 무려 246번이나 등장합니다. 특히 《태종실록》 태종 8년(1408년) 7월 17일 치 기록에는 “예조에서 포제(酺祭)를 행하는 의식(儀式)을 아뢰었다.”라는 내용이 있는 등 포제(酺祭, 사람과 곡식을 해치는 포신(酺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심지어 백성사랑이 남달랐던 세종은 1444년 충청도 공주(公州)에 황충(蝗蟲)이 곡식을 해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군사들을 출동시켜 잡게 하였는데, 잡은 것이 60여 석(석=섬, 한 말의 10배)이나 되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나라에서까지 황충 잡기에 나선 것은 물론 황충의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지만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