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북 충주시 소태면에 가면 보물 제656호 “충주 청룡사터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獅子石燈)”이 있습니다. 이 석등은 청룡사터에 있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청룡사 절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청룡사터에는 조선 초기 석등의 양식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자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가 절터 북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자석등은 보각국사(普覺國師)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습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기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릅니다. 승탑ㆍ탑비와 더불어 한 줄로 자리 잡은 이 사자석등은 조선 전기의 배치 방법을 따르고 있는 데,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의 배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하지요.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석등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음력 7월 15일로 백중날인데 백종(百種)ㆍ중원(中元)ㆍ망혼일(亡魂日)ㆍ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부릅니다. ‘백종’은 이 무렵에 과실과 푸성귀가 많이 나와 옛날에는 백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았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지요. 또 ‘중원’은 도가(道家)의 말로, 도교에서는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한 해에 세 번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 합니다. 음력 1월 15일을 상원(上元), 7월 15일을 중원, 10월 15일을 하원(下元)이라 하여 이를 삼원(三元)이라 부르며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초제(醮祭)”라는 세시풍속이 있었습니다. 또 ‘망혼일’은 이날 돌아가신 부모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ㆍ음식ㆍ과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데서 유래한 것이며, ‘우란분절’은 불교에서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지내는 날을 말합니다. 백중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송도지(松都志)》, 《송남잡지(松南雜識)》, 《경도잡지(京都雜志)》, 《규합총서(閨閤叢書)》, 《조선세시기(朝鮮歲時記)》, 《이운지(怡雲志)》, 《용재총화(慵齋叢話)》,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따위의 여러 문헌에 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고운기 지사를 2017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뽑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9월 1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엽니다. 고운기 지사는 1931년 말 만주의 한국독립당이 창설한 한국독립군 제6중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32년에는 중국군의 대표들을 만나 한중연합부대 합작을 성사시키고 이후 서란현전투에서 일본군 1개 분대를 전멸시키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어서 고 지사는 1938년 11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장을 맡아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드높이는 선전활동을 이끌었지요. 또 대한민국임시정부 정식 군대인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으로 임명된 뒤 서안을 거쳐 내몽고 지역으로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대원 모집활동을 펼쳤습니다. 1942년 중경으로 돌아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병을 얻어 1943년 37살의 나이로 순국의 길을 걷습니다. 고운기 지사의 본명은 공진원인데, 고운기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시절 신분을 숨기기 위해 썼던 이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을 때도 공진원이 아닌 고운기란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군훈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가면 명승 제30호 <죽령 옛길>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라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가 있는 옛길입니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이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함께 죽령 이북 열 고을을 빼앗은 기록과,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지요. 소백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이 길은 길 위로 나무가 우거지고, 덩굴이 퍼져 한여름에는 햇살 한줄기 비추지 못할 만큼 짙은 그늘을 만듭니다. 또 죽령 들머리에는 넓은 사과밭이 있는 덕분에 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새 고을의 관청은 틀이 잡혔으나 민가는 아직 두서가 없다. 그 가운데 대략 지어놓은 집이라 할 만한 것은 움막도 아니고 참호도 아니어서 달팽이 껍질 같기도 하고 게딱지같기도 하다. 지금 헤아려보건대, 집들이 즐비하고 거리가 번창하여 서울 근처의 큰 도회지가 되는 것은 짧은 시일에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정조실록》 14년(1790) 2월 11일 치 기록입니다. 정조 당시 민가의 모습이 게딱지같다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4년 화성 동탄 신도시 15지점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집자리는 움막집 또는 토막집이라 불릴 정도였지요. 땅을 파서 위에 거적 같은 것을 얹고 다시 흙을 덮어 추위와 비바람만 겨우 가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까지도 많은 백성은 이렇게 허름한 집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고대광실에 살았던 사람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라서 양반과 상놈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달랐다고는 하지만 평등사회로 들어선 오늘날도 주거공간의 차는 하늘과 땅차이임을 실감합니다. 서울 강남 도곡동의〇〇팰리스라는 아파트는 176평이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는 보물 제848호 “보은 법주사 신법천문도병풍(報恩 法住寺 新法 天文圖 屛風)”이 있습니다. 신법천문도는 조선 영조 18년(1742)에 관상감에서 황도(해가 지나는 경로) 남북의 별자리를 그린 것으로, 높이 183㎝, 너비 451㎝의 대형입니다. 이 병풍은 북경천문대 대장이었던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쾨글러-Kogler, I.)이 만든 300좌, 3,083성의 별자리표를 써서 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남쪽 하늘의 별까지 포함하여 만든 것이지요. 8폭 병풍으로 되어 있는 이 천문도는 제1폭에는 신법천문도설의 표제로 그 당시 천문학적 지식을 510자로 설명하고, 그 왼쪽에 해와 달, 그리고 당시의 망원경으로 관측한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의 순으로 5개 행성을 크기와 색깔을 달리해서 그렸습니다. 제2, 3, 4폭에는 직경 165㎝의 큰 원이 3중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황도입니다. 제5, 6, 7폭은 위의 세 폭과 같은 양식으로 황도의 남극을 중심으로 남쪽 하늘의 별들이 있습니다. 제8폭에는 이 천문도를 만드는데 함께한 관원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지요. 이와 같이 황도의 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10년 오늘(8월 29일)은 조선 왕조를 세운 지 519년, 대한 제국을 선포한 지 14년 만에 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국치일(國恥日)입니다. 데라우치 통감과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미 8월 22일 ‘합방 조약’을 맺었지만 우리 겨레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발표를 뒤로 미루고 조약 체결을 숨긴 채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다음 8월 29일에 순종으로 하여금 나라를 일본에게 넘긴다는 조칙을 내리게 강제했습니다. 공포된 합방 조약에는 모든 통치권을 일왕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지요. 그러나 이 강제협약은 무효임을 증명하는 문서가 2010년 공개됐습니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일본 도쿄 국립공문서관에서 입수해 공개한 ‘일본 측 한ㆍ일병합 조서’ 사진 자료에 따르면 1910년 8월 29일 일본 메이지(明治) 일왕은 한ㆍ일병합을 공포한 조서에 국새 ‘천황어새(天皇御璽)’를 찍고, 일왕의 본명인 ‘목인’(睦仁)이라는 서명이 있습니다. 반면 같은 날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반포한 조서(칙유) 원본에는 국새 대신 행정적 결재에만 찍는 ‘칙명지보(勅命之寶)’라는 어새가 날인돼 있지요. 또 순종황제의 본명인 이척(李拓)의 서명이 없어서 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 음력 7월 7일은 우리 겨레 명절의 하나인 칠석(七夕)입니다. 칠석은 양수인 홀수 7이 겹치는 날이어서 길일로 여겼지요. 또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까막까치들이 놓은 오작교(烏鵲橋)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전설이 있는 날로 꼭 비가 온다는 속설이 전해 옵니다. 그런데 칠석 전날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타고 갈 수레를 씻는 '세거우(洗車雨)'라고 하고, 칠석날에 내리면 만나서 기뻐 흘린 눈물의 비라고 하며, 다음 날 새벽에 내리면 헤어짐의 슬픔 때문에 '쇄루우(灑淚雨)'가 내린다고 합니다. 또 칠석 속설의 하나로는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를 만들려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요. 이날 풍속으로 아낙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거나 우물을 퍼내어 깨끗이 한 다음 시루떡을 놓고 식구들이 병 없이 오래 살고 집안이 평안하게 해달라고 칠성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처녀들은 견우성와 직녀성을 바라보며 바느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것을 “걸교(乞巧)”라 하고 걸교제(乞巧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장독대 위에다 정화수(井華水)를 떠놓은 다음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놓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가면 국보 제33호 “창녕 신라 진흥왕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拓境碑)”가 있습니다. 이 진흥왕척경비는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살핀 뒤 그 기념으로 세운 비입니다. 비석의 높이는 162㎝, 너비는 174㎝, 두께는 30∼51㎝입니다.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을 편평하게 다듬어 글자를 새기고, 비면의 둘레에는 윤곽을 선으로 새겼습니다. 비는 창녕읍의 목마산성(牧馬山城)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입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지만, 뒷부분은 선명한데 각 행 18∼27자씩 모두 27행 643자이지요. 특히 맨 처음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있어 561년(진흥왕 22) 곧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진흥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고 합니다. 비문에는 ‘답(畓)’과 같은 우리나라 특유의 한자가 있는 것도 의미가 있으며, 뒷부분에 당시 임금을 따르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興到卽運意(흥도즉운의) 흥이 나면 곧 뜻을 움직이고 意到卽寫之(의도즉사지) 뜻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간다 我是朝鮮人(아시조선인) 나는 조선 사람이니 甘作朝鮮詩(감작조선시) 조선시를 즐겨 쓰리 위 한시는 다산 정약용이 쓴 “노인일쾌사 육수 효향산(老人一快事 六首 效香山)”의 한 꼭지입니다. 다산이 노인의 한 가지 즐거운 일에 관한 시 여섯 수를 향산거사(香山居士) 곧 백거이(白居易, 중국 당나라 때의 뛰어난 시인)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1832년 지은 것이지요. 이 시는 “조선시선언(朝鮮詩宣言)”으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의 시를 중국 문학의 예속에서 해방시키려는 다산(茶山)의 강한 주체의식(主體意識)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한시읽기(한국학술정보)》에서 원주용 교수는 다산이 <척발위론(拓跋魏論)>에서, “성인의 법은 중국이면서도 오랑캐의 짓을 하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의 짓을 하면 중국으로 대우하니, 중국과 오랑캐는 그 도와 정치에 있는 것이지 강토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여,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화이(華夷)의 개념과는 달리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절대적 권위를 거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