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덕을 쌓은 집안엔 경사가 모이고 德門集慶 덕(德)을 쌓은 집안엔 경사가 모이고 仁宅弘祥 인(仁)을 닦는 집안엔 상서로움이 크도다 雲散見日 구름이 흩어지니 해가 드러나고 月明疑霜 달이 밝으니 서리인가 의심스럽네 고 운암(雲庵) 곽영민(郭永敏) 선생은 일본, 미국 ,중국 등에서 수십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대한민국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예계의 원로 작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00년 이화문화출판사를 통해서 《갑골문집(甲骨文集)》을 펴낸 바 있는 갑골문(甲骨文)의 대가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넷째인 “처서(處暑)”로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듭니다. “處暑”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 되지요.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만큼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 잡는 때입니다. 처서 무렵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고 하는데 모기 입이 삐뚤어지기보다는 비가 많이 와 걱정입니다. 농사의 풍흉에 대한 관심 때문에 처서 즈음엔 날씨에 대한 관심도 컸는데 요즘처럼 처서 무렵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고 하지요.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라고 하는데, ‘처서비가 오면 십리에 천석 감한다.’라고 하거나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에 든 쌀이 줄어든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맑은 바람과 왕성한 햇살을 받아야만 나락이 제대로 익는데, 비가 내리면 나락에 빗물이 들어가고 결국 제대로 자라지 못해 썩기 때문입니다. 처서 때의 세시풍속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포쇄(曝曬)라고 해서 뭔가를 바람이나 햇볕에 말리는 것이지요. 나라에서는 사고(史庫)에 포쇄별관이란 벼슬아치를 보내서 눅눅해지기 쉬운 《조선왕조실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33년 오늘(8월 22일)은 남자현 애국지사가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며 순국한 날입니다. 187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남자현 지사는 19살에 혼인한 남편 김영주 씨가 의병에 합류해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하자 항일 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아들과 함께 만주에 조직된 무장독립단체 서로군정서에 가입,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남 지사는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쪽 약손가락을 잘라 흰 무명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 보내 조사단원들을 놀라게 한 분입니다. 또 그는 1925년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 왜경에 잡히자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 끝에 먼 이역 땅에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름다운 디자인의 유리병과 유리잔 따위가 즈믄 해(천년)전의 것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병 1점과 유리잔 3점이 그것으로 1978년 12월 7일 국보 제19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연녹색을 띈 높이 25㎝의 유리병은 물을 따르기 편하도록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좁게 오므렸고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용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병목에는 10개의 가는 청색 줄이 있고, 입구부에는 약간 굵은 선을 돌렸으며, 손잡이에는 굵은 청색 유리를 ㄱ자로 붙였지요. 손잡이에는 금실이 감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무덤에 넣기 전 이미 손상되어 수리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밖에 유리병과 같은 연녹색의 3개 잔은 각각 위는 넓고 밑은 좁아진 모양으로 발굴 당시 파손이 심한 상태였으나 다행히 원형을 알아 볼 수 있게 복원되었습니다. 연녹색의 유리병과 유리잔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한 모음(세트)을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유리병과 잔은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김종진 신임 문화재청장은 19일 낮 11시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보물 제182호 '임청각(臨淸閣)’을 찾아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년)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의 복원ㆍ정비계획 추진방향을 권영세 안동시장과 협의했으며, 석주 이상룡선생의 종손 이창수 씨 등을 만나 복원관련 의견을 들었다. 우리 신문은 일제는 지난 2013년 5월 29일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항일투사의 집 임청각 없애려 했지만 여론이 좋지 않자 집 몇 채를 허물고 마당으로 철길을 내버렸다. 그 철도를 이제 서쪽으로 옮기고 임청각을 제대로 복원한는 계획이다.”라고 보도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현재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아흔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 난 그 모습 그대로”라면서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후 임청각 복원ㆍ정비는 급물살을 타는 모양새다. 문화재청은 안동 임청각 앞마당을 관통하는 중앙선 철도가 철거된 이후(2020년까지/국토교통부) 안동 임청각 복원ㆍ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지(窯址)란 도자기, 그릇, 기와들을 굽던 가마터를 말합니다. 사적 제69호로 지정된 부안 유천리 요지는 굴포만이 있는 바닷가 앞의 넓은 들판에 자리하고 있는 가마터로, 토성으로 둘러싸인 안쪽 언덕에 주로 널려 있습니다. 모두 40여 곳으로 대부분 유천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의 남쪽에 모여 있고 북쪽 야산 기슭에도 10여 곳이 있지요. 이곳의 그릇들은 대체로 11세기말에서 13세기 전반의 것들이며 이 가운데 가장 우수한 도자기 조각이 나오는 곳은 12호 가마터 일대입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조각들은 최상급 고려자기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강진의 사당리 당전부락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이면서 백자ㆍ진사백자 종류는 훨씬 양이 많고 다양합니다. 도자기의 형태는 접시ㆍ완(밥그릇)ㆍ발(대접)ㆍ매병(꽃병)ㆍ병ㆍ탁잔(술병) 따위로 특히 높이 1m 이상의 매병은 크기ㆍ무늬ㆍ제작기술이 매우 뛰어나서 고려도자기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지요. 또한 ‘효문(孝文)’ㆍ‘조청(照淸)’이라는 글씨가 있어 고려 도자기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유천리 가마터는 고려왕실과 귀족층이 사용하는 최상급 도자기를 생산한 곳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청주시 서원구 내수동로의 충북대학교박물관에는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안동 김씨 묘역을 옮길 때 출토된 국가민속문화재 제217호 “안동김씨 무덤 출토의복”이 있습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시아버지인 김첨(金瞻: 1502∼1584)과 15∼16살로 짐작되는 그의 딸, 그리고 그의 손부(孫婦)인 원주 원씨(原州元氏: 17세기말 추정)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입니다. 출토된 것들을 보면 장옷 외에 회장저고리, 치마, 바지, 옷감, 보자기, 솜이불 등 15점이지요. 김첨의 무덤에서는 장옷 2점과 명주 솜누비 바지 1점, 솜이불 2점을 거두었습니다. 여자의 대표적인 포(袍)인 ‘명주겹누비장옷’은 뒷길이 122㎝, 뒷품 55㎝이며 화장(깃에서 소매 끝까지)은 70㎝인데 누비의 간격은 2㎝입니다. 동정과 고름 등, 일부 훼손된 부분은 있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로 출토되었습니다. 김첨의 딸 무덤에서는 연두색 ‘명주겹회장저고리’가 출토됐는데 목판깃과 섶, 끝동과 겨드랑이 사다리꼴 무 부분에 자주색 회장이 둘려져 있으며 섶과 겨드랑이 무에는 연꽃당초무늬로 꾸몄습니다. 뒷길이 59㎝, 화장 70㎝, 품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제72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은 안 된다”라고 강하게 강조했다. 그러나 이날 기념식에서 또 하나 뭉클한 장면이 있었다. 생존해 계신 여성독립운동가 세분 가운데 한분이신 오희옥 애국지사가 스코트랜드 민요 올드랭사인 곡에 애국가 가사를 붙인 옛날 애국가를 부른 것이다. 오희옥 애국지사는 중간에 숨이 찬듯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시절을 회상하는듯 끝까지 불렀다. 오희옥 애국지사는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 아버지 오광선 장군, 어머니 정현숙 애국지사, 언니 오희영 애국지사, 형부 신송식 애국지사 등 일가족 3대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4살 때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독립군을 모으면서 한편으로는연극ㆍ무용등을 통한 독립군들을 위문하는 활동을 한 당당한 독립운동가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 댁에 가서 처음 클래식 음악이란 걸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려놓고는 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LP판에 녹음된 것은 그 유명한 명곡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일명 “운명교향곡”이었지요. 연주는 스위스로망드오케스트라였고, 지휘자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던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였습니다. 처음엔 졸린 듯 했지만 이후 나는 강렬한 “빠빠바밤”하는 부분에 도취되어 정말 이 곡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베토벤 5번 교향곡은 5명의 지휘자를 비교하면서 들어보기도 했지만 처음 강렬하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앙세르메는 그 유명한 카라얀도, 푸르트벵글러도, 번스타인도 내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요. 이렇게 갑자기 서양음악 클래식 얘기를 하는 것은 한국문화에서도 어떤 음악이 어떤 그림이 으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냥 각자가 좋은 대로 느끼면 그만일 것입니다. 여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오원 장승업의 “호취도(毫鷲圖)”가 있습니다. 호취도는 독수리의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진한 먹과 엷은 먹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속도감 있는 필선을 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6형제는 서간도로 떠나기 전 가산을 정리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자유를 얻은 노비 중 20여 명은 6형제와 함께 서간도로 가고자 하였다. 이렇게 6형제의 가족과 노비를 포함하여 50~60여 명이 서간도로 향했다.” 우당 6형제가 서간도로 가기로 결정한 당시의 상황을 풀어낸 이 말은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 <민국의 길, 자유의 길> 전시물의 한 내용이다. 6형제 가운데 어느 한 명도 서간도의 길에서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자유를 준 노비 20여 명까지 동참했다. 아까울 만도 했지만 6형제는 지금 돈으로 600억 원이나 되는 재산을 정리해 미련 없이 서간도로 떠난 것이다. 특히 6형제 가운데 이시영은 순종으로부터 종2품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리는 칙서를 받았지만 서간도로 출발하려는 결심을 흔들지 못한다. 재산이건 벼슬이건 독립운동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건 과감히 던져버린 그들이었다.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겠다는 결심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이들은 독립운동사에 지지 않는 별이 되었다.” 그렇다 전시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