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1151호 <청동 옻 발걸이 (靑銅黑漆壺鐙)>가 있습니다. 말을 올라타거나 달릴 때 발로 디디는 발걸이 부분을 한자말로 “등자”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호등”(壺鐙)이란 이 발걸이처럼 발 딛는 부분을 주머니처럼 넓게 하여 쉽게 발을 넣거나 뺄 수 있게 한 것으로 삼국시대 둥근 테를 지닌 고리형의 윤등(輪鐙)에서 발전된 것이지요. 이 발걸이 곧 호등은 높이 14.7㎝, 폭 12.1㎝, 길이 14.9㎝로 말안장과 쉽게 연결할 수 있도록 네모 모양으로 튀어 올라오게 하였고, 아랫부분에는 작은 구멍을 뚫었습니다. 발걸이 겉에는 꽃과 사선ㆍ불꽃무늬ㆍ물고기 뼈 무늬를 정교하게 새겼으며, 발걸이 1쌍 모두 청동으로 빚었는데 전면에 검은색의 옻칠이 남아 있지요. 삼국시대 발걸이가 출토되기도 했지만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것으로는 유일하며, 일본 정창원에 이것과 비슷한 1쌍의 발걸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비교하여 고증할 자료가 없지만 제작수법으로 보아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발걸이는 그 희귀성과 함께 통일신라 금속 공예의 발전을 연구하는데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6월 26일은 백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진지68주기 되는 날이었다. 이날 낮 11시 경교장 1층 바불마루에서는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가 중심이 된 추모식이 있었다. 추모식은 김구 주석 국민장 녹음 파일을 들으면서 참석자들의 헌화와 분향으로 시작됐다. 이어서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신재현 추진위원의 백범 김구 선생의 약력보고와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김인수 대표의 경과보고가 이어졌다. 김인수 대표는 경과보고 뒤에 22년 동안 투쟁해온 소회를 덧붙였다. 그는 “오늘의 경교장은 삼성병원에 포위되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교장을 두고 서울시는 원형복원이라 주장하고 이를 언론들이 그대로 받아쓰니 안타깝게도 국민은 그런 줄만 안다. 2년 뒤엔 삼일만세운동 100돌,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돌이 되는 동시에 백범 선생 서거 70돌이 된다. 이때를 맞아 6월 26일 나는 경교장을 백범기념관으로 고쳐 부르는 명명기념식을 열 것이다.”라고 피를 토하듯 말했다. 경교장을 백범기념관으로 불러야 한다는 김인수 대표의 주장은 정치인들이 인위적으로 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날 막대한 폐단 중에 다리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지극히 가난한 유생의 집에서도 60, 70 냥의 돈을 내서야 다리를 살 수가 있고, 만약 모양을 갖추고자 하면 수백 냥의 돈을 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논밭과 집을 팔아야 할 형편입니다. 이 때문에 아들을 둔 자가 며느리를 보아도 다리를 마련하지 못하여 시집온 지 6, 7년이 넘도록 시부모 뵙는 예를 행하지 못하여 인륜을 폐하는 데 이른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위는 《정조실록》 정조 12년(1788년) 10월 3일 기록입니다. 내용은 부녀자들이 머리를 부풀어보이도록 하기 위해 덧붙이는 덧머리 곧 다리(한자말 가체-加髢)의 사치가 너무 심하여 이 폐단을 금하려 조정에서 논의한 것이지요. 다리도 다리려니와 그 다리에 온갖 보석을 부치니 그 사치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이보다 40년 전 영조 때에도 이 폐단을 지적하여 다리를 금하고 족두리를 쓰도록 했지만 백성들 사이에선 이것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이 사치는 그 대상물만 다를 뿐 시대를 초월하여 문제가 되는 모양입니다. 최근 뉴스를 보면 먼저 결혼한 친척이나 친구보다 못한 혼례를 했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혼례식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위는 《백범일지》(도진순 주해)에 나오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말씀입니다. 1949년 6월 26일 오늘,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에서 역적의 무리가 배후인 안두희의 흉탄에 백범 선생이 쓰러지신 날이지요. 《백범일지》에 나오는 위 말씀처럼 자나 깨나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온몸을 불사르시고, 결국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 곧 통일을 보지 못한 채 통한의 죽음을 맞으신 것입니다. 죽음을 맞으신 68돌을 맞아 경교장에서는 오늘 오전 11시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추모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 김인수 대표에 따르면 경교장은 삼성병원에 짓눌려 아직도 완전한 원형복원을 이루지 못한 상태입니다. 경교장 앞에서 바라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도종환, 이하 문체부)는 6월 19일(월)부터 ‘제3회 한글 창의 아이디어 공모전(Hangeul Idea Award)’을 연다. 문체부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직무대행 강만석)이 주관하며 네이버가 후원하는 이번 공모전에는, ‘한글’을 활용해 새로운 문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전 세계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 우리의 한글과 세계인의 상상력이 만나 창의적인 아이디어 발굴 기대 올해로 세 번째 열리는 공모전은 ▲콘텐츠, ▲스마트 정보기술(IT), ▲디자인 등 3개 분야로 나누어 진행되며, 특히 디자인 부문은 타 부문에 비해 응모 방식을 간소화해 누구든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심사 기준은 한글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더불어 아이디어의 상품화 가능성에 중점을 둘 계획이다. 이번 공모전에서는 전문가 심사를 통해 대상 1명(팀), 우수상 3명(팀), 장려상 9명(팀) 등 총 13명(팀)을 선정한다. 대상 수상자에게는 문체부 장관상이, 우수상 및 장려상 부분 수상자에게는 각각 한국콘텐츠진흥원장상과 네이버상이 수여된다. 아울러 공모전 수상자는 ▲상품화 및 창업 컨설팅, ▲특허 출원 지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가을이 조곰 깁흐면 착착 접어 두엇든 듯 십흔 겨울 양복을 주름도 펴지 안코 닙고 다니는 남자가 거리에 수두룩함니다. 양복장이 업는 것하고 典當局하고가 원인이겟지만은 그러케 접힌 옷을 입고 나스게 한 부인, 아니 닙고 나스는 남자나 끔쯕이 대담한 부부라 할 것임니다. 차곡차곡 접힌 양복을 그대로 닙고 나서서 그래도 지나가는 여자를 소유물 감상하듯 아래우를 흘터 보는 꼴이란 가련함니다.” 위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34호(발행일 1930년 11월 01일)에 나오는 “가을거리의 남녀풍경“ 가운데 김경선이란 사람이 쓴 전당국(典當局)이 원인”이라는 글 일부입니다. 이 글은 각계 사람들에게서 받은 글을 실은 것인데 주로 거리에서 보이는 남녀들 꼴불견 옷차림 얘기입니다. 특히 위 내용은 가난한 처지면서 마치 영화배우인 듯 죽어라고 양복만 입는데 집에는 양복장이 없어서 전당포에 맡기는 신세로 봄이 오면 겨울옷을 전당포에 맡기는 대신 춘추복을 찾아 입고, 겨울이 되면 춘추복을 전당포에 맡기고 겨울옷을 입는 사람들을 비꼬는 글입니다. 또 그 글 가운데는 “구역질 나는 남성”이라는 제목의 최의순 씨 글도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근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울산광역시 남구 두왕로의 울산박물관에 가면 정공청 장군이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쓰고 입었던 투구와 갑옷, 장갑, 혁대, 화살 따위의 국가민속문화재 제38호 “정공청 유품 (鄭公淸 遺品)”이 있습니다. 정공청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여 울산, 서생포, 기장 등지에서 백여 번에 달하는 왜군들과 싸워 수적인 열세에도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이 때문에 그는 1등, 그의 아들은 2등 공신에 책봉되었지요. 유품 가운데 투구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圓)모양의 철로 만든 것으로 부식이 심하지만 원래 모습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면에는 앞쪽으로 3㎝, 길이로 17㎝ 정도의 해가리개를 양끝과 가운데 못을 박아 달았고, 목가리개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지요. 이것은 《세종실록》 ‘오례(五禮)’에 나오는 병기(兵器) 가운데 “원두(圓兜)”라는 것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갑옷은 남자들의 겉옷인 포(袍)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겉은 화려한 초록빛이고 안은 명주이지요. 앞쪽에는 옷을 여밀 수 있도록 4개의 매듭단추가 있으며 어깨에는 가운데가 꺾일 수 있도록 경첩장식을 달아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6월 16일 충남 홍성군은 백월산(해발 394.3m)에서 단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6월 초 구항면 거북이 마을 보개산 산제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낸 뒤 올해 들어 두 번째라고 하며 기우제에는 김석환 홍성군수와 김덕배 군의회 의장을 비롯해 주요 기관ㆍ단체장 100여명이 참석해 비가 오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런데 《태조실록》 태조 3년(1394년) 5월 6일 “가뭄으로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지내다.“란 기록을 시작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기우제“란 말이 무려 1,660번이나 등장합니다. 특히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년) 7월 2일에는 ”사내아이 수십 명을 모아 상림원에서 도마뱀으로 기우제를 지내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정성을 다해서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으면 용이 게을러서 비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용을 닮을 도마뱀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지요. 우리나라는 “농사천하지대본”이라 하여 농사를 천하의 근본이라 생각했는데 하지 무렵에는 농사의 시작인 모내기를 끝내야 하므로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라도 지내서 모내기를 마쳐야 했습니다. 충남 금산 어재마을에는 충청남도무형문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제 한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지금이야 냉장고와 에어컨으로 여름을 나지만 예전 우리 겨레는 어떻게 여름을 났을까요? 에어컨을 대신한 것은 부채였고, 냉장고를 대신한 것으로 '석빙고(石氷庫)'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냉장고는 냉기나 얼음을 인공으로 만들지만, '석빙고'는 겨울에 얼음을 깨 보관해두었다가 봄ㆍ여름ㆍ가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냉동 창고인 것이지요.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윤용현, 교학사)》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이 얼음 저장 창고를 지었다는 《삼국유사》와 지증왕이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 때 석빙고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사》에도 얼음 배급에 관한 얘기가 정종 때와 문종 때 나오는데 그때 있었던 석빙고들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경주, 안동, 영산, 창녕, 청도, 현풍과 북한 해주 등 7개뿐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완벽한 것은 바로 경주시 인왕동의 보물 제66호 “경주 석빙고 (慶州 石氷庫)”가 꼽힙니다. 이 “경주 석빙고”는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져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자식의 병으로 근심 중이었는데 강세황이 와서 거문고를 연주해 주었다. 그의 음악은 근심하는 사람은 기쁘게 하고, 병든 사람은 소생하게 하는 듯 했다. (중간 줄임) 어쩌면 그렇게 소리가 맑아서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이는 성호 이익의 《성호전집(星湖全集)》에 나오는 글로 강세황이 그림뿐만이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수준급이었으며, 그가 거문고 연주로 슬픔과 기쁨을 주변과 함께 나누었음을 증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강세황은 8살에 시를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관직에 나가야 할 즈음엔 집안이 기울고, 집권세력에 밀려 벼슬길이 꽉 막힌데다가 몸도 허약하여 우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강세황은 절망하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았습니다. 덕분에 그는 몸과 마음의 병이 사라지고 평화로워졌으며 우울증도 떨쳐 버릴 수 있었지요. 강세황은 충청도 예산의 탁천장에서 이루어진 시모임에서 지은 <섬사편(剡社編)>에서 “노래 한 곡조, 거문고 한 가락((歌一曲 琴一彈)”이라고 한 것처럼 벗들과 어울리며 거문고로 몸과 마음을 다스린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어려움을 치료한 그는 남들이 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