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와 나주시 문평면 사이에는 보물 제1372호 함평고막천석교(咸平古幕川石橋)가 있습니다. 고막천(古幕川)에 동서로 가로놓인 돌다리 고막천석교는 1273년(고려 원종 14) 무안(務安) 법천사의 고막대사가 도술을 부려 놓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떡을 만들어 이 돌다리를 건너 나주와 영산포에 떡을 팔았다 하여 일명 “떡다리” 혹은 “똑다리”라고도 불립니다. 다리 모양은 좀 투박해 보이지만 멋 부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줍니다. 자연을 닮은 화강암 돌 4~5개를 포개어 교각을 만들고 네모난 돌을 한두 개 받쳐 굄돌로 삼았지요. 그 위에 다시 시렁돌을 올렸는데 이 돌은 노면보다 양쪽으로 50cm가량 튀어나와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다리의 날개처럼 보입니다. 전체 길이 20m, 너비 3m, 높이 2.1m인 이 다리는 옛날엔 수수, 조를 널어도 한 알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상판에 틈이 없었다고 하는데 700여년이 지난 세월 때문인지 다리 상판 위에 서면 약간의 틈새가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다리 원형은 7∼8m 정도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최근 콘크리트로 잇대어 놓았는데 이왕이면 손상된 부분도 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가면 사적 제214호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이 있습니다. 이는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입니다. 구형왕은 521년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532년 왕비 그리고 세 아들과 함께 돈과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방의 전설에 보면 구형왕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힐까. 차라리 돌로 덮어 달라.”고 하여, 살아남은 군졸들이 주검을 묻고 돌들을 하나씩 포개어 얹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예전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있다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지요.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 중간에 전체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농악 곧 풍물굿은 지역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크게 경기농악ㆍ영동농악ㆍ호남우도농악ㆍ호남좌도농악ㆍ경상도농악으로 나뉩니다. 농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진주삼천포농악(晋州三千浦農樂, 제11-가호), 평택농악(平澤農樂, 제11-나호), 이리농악(裡里農樂, 제11-다호), 강릉농악(江陵農樂, 제11-라호), 임실필봉농악(任實筆峯農樂, 제11-마호) 등 다섯 지방의 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오른 바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임실 필봉농악은 전북 임실 강진면 필봉리에 전승되고 있는 풍물굿으로 호남 동부지역의 좌도농악에 속합니다. 필봉농악의 굿패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남색조끼를 입고 삼색띠를 두르는데, 쇠잡이(꽹과리나 징을 치는 사람)만 상모(털이나 줄이 달린 풍물굿에서 쓰는 모자)를 쓰며 나머지는 고깔을 쓰지요. 농기, 용기(그릇), 영기(깃발), 긴 쇠나발, 사물(꽹과리, 징, 북, 장구), 법고(불교의식 때 쓰는 작은 북), 잡색(대포수, 창부<남자광대>, 양반, 조리중<삼태기를 맨 중>, 쇠채만 든 농구, 각시, 화동과 무동<사내아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이인수(李仁壽)는 본디부터 재주와 덕망이 없으며 다만 음식을 요리하는 일만 알았을 뿐이 온데, 지금 새로운 정치를 하는 때에 추부(樞府, 중추원) 에 오르게 되니, 사림(士林, 조선시대 유교를 닦는 선비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관직을 파면시키고 다시 벼슬을 주지 마소서." 이는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년) 8월 19일 치 기록입니다. 이인수란 사람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오래 전부터 태조의 밥을 책임지던 사람으로 태조는 이인수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이에 다른 벼슬아치들이 반발을 했습니다. 학문을 닦지 않고 오로지 음식만 할 줄 아는 천한 사람에게 벼슬을 준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그러자 태조는 그에게 병권(兵權) 등 다른 권한은 주지 않고 오직 사옹(司饔, 대궐 안에서 쓸 음식물을 만들던 요리인) 일만 맡긴 것이라며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인수는 어쩌면 조선 최초의 궁궐요리사 “숙수(熟手)”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세종 때는 이교(李皎)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추원 부사 김익생(金益生)을 이교(李皎) 대신으로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로 삼았다. 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시청 로비에 온갖 나방세상이 열렸다. 바로 “시민 허운홍의 나방이야기전”이 3월 23일(목) 시작하여 4월 7일(금)까지 16일 동안 열리는 것이다. 전시회를 여는 서울시청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비가 아닌 나방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방이 아닌 나비표본도 있지만, 나방들은 나비에 뒤지지 않고 아니 더욱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호랑나비처럼 화려하고 큰 것들도 있지만, 아주 작아 바람만 좀 세게 불면 훅 꺼지거나 날아갈 것만 같은 정말 작은 것들 있다. 나방들을 꼼꼼히 표본을 해놓은 것을 보니 허운홍 선생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가 있다. 전시장에는 수십 년 동안 나방애벌레를 채집하고 길러낸 나방표본 900여 종 2천여 마리(표본액자 45점)가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표본만 전시한 것이 아니다. 선생은 벽면에 나방의 큰 사진과 함께 “생태, 왜 나방 연구가 중요한가?, “수분 매개자로서의 나방”, “먹이사슬 고리로서의 나방” 같은 설명판을 붙여놓아 나방이 비교적 생소한 일반인의 이해를 돕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 내용을 보면 “지구상 현 종수는 약 1천만~1,400만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화강암을 다듬어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8각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8각형 기둥의 맨 위의 가운데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물이 고이지 않게 배수구멍을 뚫었다. 깃대 끝에는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었다.” 이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있는 내용인데 이로 미루어 조선 후기에는 궁궐에 돌로 만든 풍기대를 설치하여 바람을 관측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국보 249호 <동궐도(東闕圖)>에 풍기대 그림이 있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지요. 지금도 창경궁(昌慶宮)과 경복궁(景福宮) 그리고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앞뜰에 풍기대가 남아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편서풍이 불면 날씨가 좋고, 동풍이 불면 궂은 날씨가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지요. 이러한 것을 좀 더 과학적인 생각으로 가다듬어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를 재기 위하여 풍기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농업을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상북도 기념물 제98호인 경주 석장동 암각화는 다른 암각화에서 보기 힘든 동물 발자국 따위의 암각화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27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들 암각화 가운데는 기하무늬 8점과 검과 창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점, 발자국 4점, 여자성기(女子性器) 3점, 배 1점, 그 밖에 동물모습과 해석이 어려운 그림 따위가 새겨져 있습니다. 암각화가 있는 곳은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근처로 경주 시가지 북서쪽 서천과 북천이 합쳐져 형산강을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은 경치가 좋은 곳이라 조선시대에는 금장대라는 정자가 있던 곳으로 강물에서 약 15m 높이의 수직 절벽 윗부분에 가로 약 2m, 세로 약 9m되는 바위에 새겨져있으며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모양이 많습니다. 석장동 암각화는 서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기본은 방패 모양과 도토리 모양, 꽃 모양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도토리 모양과 꽃 모양의 그림은 다른 지역의 바위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모습입니다. 특히 검과 결합된 여자성기(女子性器)의 그림 따위는 포항 칠포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암각화는 1994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KTV 국민방송(원장 류현순)은 오는 24일 늦은 4시 40분, 화제의 인물을 찾아가 시청자들과 공감의 시간을 갖는 새 프로그램 『직격 인터뷰』(진행 이충현, 연출 최정윤) 첫 방송을 내보낸다. 『직격 인터뷰』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리더와 멘토, 작은 영웅, 자신만의 철학과 경륜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이들을 찾아간다. 사람과 세상, 세대와 세대를 잇는 ‘휴먼 메신저’로서 현 시기 한국인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는 인터뷰이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얻고자 기획됐다. 첫 회에선 ‘생각이 에너지다’, ‘사람을 향합니다’, ‘진심이 짓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등의 명카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광고계 미다스의 손으로 자리매김한 TBWA코리아 박웅현 대표를 만난다. ‘여덟 단어’, ‘책은 도끼다’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이자 인문학 전도사이기도 한 박 대표는 창의력과 진정성을 갈구하는 청년들에게 손꼽히는 멘토다. 이날 방송에선 2030 젋은이들에게 꿈과 창의력을 키워주기 위해 진행해온 강의 프로젝트인 ‘망치 프로젝트’의 취지와 성과, 그리고 향후 계획을 들어본다. 또 광고만의 틀에 갇히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인이라면 애틋한 전설이 서린 1,300년 된 ‘에밀레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에밀레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공식이름으로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인데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고,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지요. 오래 전 ‘한국의 범종’이라는 이름의 녹음테이프 하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여러 종소리가 녹음돼 있었지만 그 가운데 “성덕대왕신종”의 울림을 듣고는 다른 종소리는 깊이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덕대왕신종” 종소리는 아래쪽으로 깔리면서 깊고 그윽한 소리를 내는데 듣는 이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방사선으로 투시해서 본 결과 보통의 종들과 달리 종신 안에는 기포 하나 없이 매끄럽게 주조되었으며, 종신(鐘身)의 모든 부분이 균일한 두께를 하고 있었다고 하지요. 1970년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박정희신종을 만들어 바친 적이 있습니다. 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청동기시대ㆍ초기 철기시대(서기전 3세기경) 무렵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보물 제1823호 “농경문 청동기(農耕文靑銅器)”가 있습니다. 한 면에 밭을 일구는 남성과 새 잡는 여성, 다른 한 면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장면을 새긴, 의례 때 사용하는 도구로 여겨지는 유물입니다. 크기는 남은 길이 7.3㎝, 너비 12.8㎝, 두께 1.5㎜입니다. 아랫부분이 떨어져 없어졌으나 같은 시기의 다른 청동기와 달리 당대의 생업과 종교의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과 정교하게 만들어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지요. 남성이 밭을 일구는 모습은 한 해가 시작되는 이른 봄에 풍요를 비손하는 농경의례 가운데 씨뿌림을 나타낸 것으로, 조선 후기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서 하던 나경(裸耕, 벌거벗고 밭을 가는 행위)을 떠올립니다. 그 아래 사람은 가을에 추수하는 여성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옆 여성 앞에는 항아리가 놓여 있습니다. 뒷면에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 모양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소도(蘇塗, 솟대)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농경문 청동기의 주된 무늬는 돋을새김(양각)으로 새겼고 각 면의 테두리 무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