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 곧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이 당간과 당간지주가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도 있는데 이것은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지요.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세웠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습니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었지요.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이었다고 합니다. 이 당간은 세운 때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지요. 전해오는 얘기로는 예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왕세자입학도는 효명세자의 입학식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효명세자는 1817년 3월 11일, 아홉 살의 나이로 성균관에서 입학식을 치렀습니다. 이날 행사의 생생한 모습이 여섯 장의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첫 번째 장면은 효명세자가 창덕궁을 나와 성균관으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맨 앞 의장 행렬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행사였는데 여기에 앉아 있어야할 가마에 왕세자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관련된 행사를 그릴 때 임금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왕세자의 모습도 그리지 않은 것이지요. 이날 효명세자는 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와 여러 성인들의 신위에 술잔을 올리며 예를 갖춘 다음 수업 장소인 명륜당 문 앞에서 스승에게 수업을 청합니다. 허락을 받은 효명세자는 명륜당 안으로 들어가 감사의 뜻으로 스승에게 예물을 드립니다. 아무리 왕세자라도 가르침을 구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스승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다섯째 그림을 보면 세자가 스승으로부터 수업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스승은 서안 위에 한 권의 책을 놓고 있지만 제자인 세자는 서안 없이 바닥에 책을 놓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 ~ 1759)은 우리 산천을 가장 우리답게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을 창안해 그린 진경산수화의 문을 연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은 그저 실경산수화로 부르지 않고 특별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고 합니다. 그 정선은 금강산을 그린 그림을 참 많이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것은 금강전도(金剛全圖)처럼 금강산의 모든 모습을 한 장에 압축해서 그린 그림과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가운데 장안사(長安寺)처럼 한 장소를 두드러지게 그린 그림입니다. 그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가운데 장안사는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길에 자리 잡은 절 장안사를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의 특징으로 보면 반원을 그리고 있는 무지개다리 곧 홍예교(虹霓橋)의 하나인 만천교(萬川橋)가 아름답게 그려졌습니다. 홍예교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다리라고 하지요. 그리고 만천교 옆으로는 석가봉(釋迦峯), 관음봉(觀音峯), 지장봉(地藏峯) 같은 봉우리들이 유독 하얗게 그리고 크게 그려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금강의 시냇물들이 하나로 모아져 나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는 우리나라 과학발달의 전성기였던 세종시대의 문신의 한 명으로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흠지(鄭欽之)・김담(金淡)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서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펴냈습니다. 그는 월식을 보고 월식이 진행될 때 보이는 그림자가 바로 지구의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가 둥글다는 것을 관찰하여 “지구는 둥글고 해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지요. 당시의 중국이나 조선의 우주관은 천원지방(天圓地方) 곧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였기 때문에 이런 그의 주장을 믿지 못하자 이순지는 월식이 언제 발생해서 언제 끝나는지를 계산했습니다. 그의 그런 계산이 맞아 떨어져 같은 시각 월식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다른 문신들도 그의 주장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순지의 이러한 주장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보다 100년 빠른 주장이었다고 하지요. 이순지는 또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것을 계산하여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세종대왕이 중국에서 들여 온 역서(曆書)를 통해 이순지의 계산한 결과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1431년부터 이순지에게 천문 관측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08년 오늘은 소설가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이 원각사를 세워 자신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처음 상연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이인직이 《혈(血)의 누(淚, 1906)》, 《귀(鬼)의 성(聲, 1908)》, 《치악산(雉岳山, 1908)》, 《은세계(銀世界, 1913)》 따위 신소설을 쓴 작가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특히, 《혈(血)의 누(淚)》는 첫 장편소설로서 본격적인 신소설의 효시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배웠지요. 그러나 이윤옥 시인의 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2011≫에는 “《혈(血)의 누(淚)》 작가 이인직이 일본 유학시절 스승인 미도리 교수에게 찾아가서 일본과 조선의 병합을 부추긴 일”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또 이인직은 한말 을사5적신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리는 친일파 이완용의 비서로 을사늑약의 막후 조정자로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최근 저는 이 수상(이완용을 말함)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근고(謹告, 삼가 아룀) 해보았습니다. 2천 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 만 일본 사람과 함께 나아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북 김제시에 있는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421호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南原實相寺藥水庵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이 있습니다.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나무에 불상을 새겨서 만든 탱화인데, 탱화는 대개 옷감이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형태로 만들어 거는 불화를 말하지만 나무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며 ‘목각불탱(木刻佛幀)’이라고도 합니다. 또 정조 6년(1782)에 조각한 것으로 연대가 확실하고 원만한 불상들의 모습과 배치구조, 정교한 세부조각 등은 조선 후기 목각탱화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가로 183㎝, 세로 181㎝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현재 전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 탱화 가운데 가장 간략한 배치구도를 가지고 있지요. 화면은 크게 위 아랫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윗부분에는 석가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월광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으로는 일광보살과 미륵보살이 자리 잡았습니다. 또 아랫부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보현보살과 세지보살을, 왼쪽으로는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이 있지요. 본존인 아미타불은 타원형의 광배를 가지고 있고 사자가 새겨진 대좌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 나라는 온통 뒤숭숭하다. 연일 광화문광장에서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대통령 하야” 외침이 메아리가 된다. 그 와중에 청와대는 물론 검찰을 비롯한 법조계에까지 국민의 눈 흘김은 계속된다. 그런데 이런 난리 속에서 한 변호사의 북콘서트가 11월 8일 밤 7시에 서울 서초동 변호사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다. 그동안 우리 우리문화신문에도 꾸준히 좋을 글을 써서 인기를 얻고 있는 양승국 변호사가 《중년에 떠나는 인문학 여행(디자인브레스)》이란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연 것이다. 흔히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경직되고 차가운 사람들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동안 양승국 변호사와 소통했던 사람들은 그에게서 따뜻함을 느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건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도 이런 인문학여행을 꾸준히 떠나고 그러한 가운데서 사람과 자연 그리고 역사와 문화를 껴안으려는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한 덕분이리라. 콘서트장에 들어서니 양승국 변호사가 책에 저자 서명을 해주기에 바쁘다. 행사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자리를 메웠다. 그는 인사말을 한다.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을 하면서 여행은 기록만 남는다는 생각을 했고, 따라서 2003년부터 기록으로 남기기 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금년에 낸 문제가 혹 다음해에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출제한 것이 혹 지방에서 나오기도 하며, 유생이 사사로이 지은 문제가 역시 국시(國試)에서도 나올 수 있어서 혹 남의 작품을 외웠다가 합격하는 자도 있고, (중간 줄임) 또 과장이 엄격하지 못해 무뢰배가 요란하게 밟고 다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갖은 수단으로 엿보고, 책을 끼고 들어와 답안을 대신 써주므로 공부하는 자가 이로 인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위는 《명종실록》 8년(1553) 6월 9일 치 기록입니다. 그런가 하면 《광해군일기(중초본)》 5년(1613) 3월 16일 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전 도사(都事) 전욱(全頊)은 근래 충홍우도(忠洪右道) 감시 초시관(監試初試官)으로서 본 고을의 친지 30, 40명을 사사로이 이끌고 와 과거에 합격시키려고 꾀하였습니다. 전 강릉 부사 박경업(朴慶業)도 강원도 시관으로서 시험 응시자 30여 명의 답안지 겉봉에다 ‘삼가 봉한다.[謹封]’고 손수 써서 알아 볼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초장(初場) 시험에서 합격된 사람이 무려 17명이나 된데다가 응시한 여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다카하라 히미꼬(高原 日美子)라는 여인이 한국 종 1구를 기증하고 싶다고 하여 1999년 11월 5일 이 한국 동종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동종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주면(全州面, 1914년부터 1931년까지 전주시 공식 이름)에 살던 박 아무개가 자신 소유 낙수정(樂壽亭) 수리를 하다가 땅 속에서 발견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원 소재지였던 전주에 있는 전주박물관에 소장하게 되고 2001년 보물 제1325호로 지정되었지요. 이 동종이 발견된 곳에서 1909년에 '開元寺'(개원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동종은 전주 개원사라는 절에 걸려있던 종으로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종을 매다는 부분이 깨어지자 땅속에 묻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후 개원사는 폐사되고 조선시대 낙수정이라는 정자가 들어섰을 것으로 짐작되지요. 이 낙수정 동종은 통일신라 동종을 연상시키면서도 고려 초 동종의 세부 표현과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10세기 중반에서 11세기 전반에 빚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동종과 비슷한 종이 일본 원청사(圓淸寺)에도 있는데 이 두 종은 크기는 물론이고 넝쿨ㆍ비천 등의 묘사까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아홉째로 겨울에 들어선다는 입동(立冬)입니다. 입동 무렵이면 밭에서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을 하지요. 입동을 앞뒤로 하여 닷새 안팎에 담근 김장이 맛이 좋다고 합니다. 농가에서는 냉해(冷害)를 줄이기 위해 수확한 무를 땅에 구덕(구덩이)을 파고 저장하기도 하지요. 또 추수하면서 들판에 놓아두었던 볏짚을 모아 겨우내 소의 먹이로 쓸 준비도 합니다. 예전에는 소가 먹을 풀이 없는 겨울철에는 주로 볏짚을 썰어 쇠죽을 쑤어 소에게 먹였지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10월부터 정월까지의 풍속으로 궁궐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임금에게 우유를 만들어 바치고, 기로소(耆老所)에서도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했다고 하지요. 이런 궁궐의 풍습처럼 민간에서도 ‘치계미(雉鷄米)’라고 하는 아름다운 풍속도 있습니다. 이는 입동(立冬), 동지(冬至), 섣달 그믐날에 나이든 노인들을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아무리 살림이 어려운 집이라도 치계미를 위해 곡식을 내놓았다고 하지요. 입동에는 또 다른 아름다운 풍속도 있었습니다. 농가에서 고사를 많이 지내는데 음력 10월 10일에서 30일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