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만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는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사형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나이인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져 3ㆍ1만세 운동의 열기를 되살렸지만 이 일로 끝내 순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강 의사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덕천)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강탈당하자 식구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한인촌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뒤 3ㆍ1만세 운동 직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그때 신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러시아로부터 영국제 폭탄을 구입하여, 1919년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8월 4일 서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원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 가면 명승 제29호 “구룡령 옛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양양과 홍천을 연결하는 옛길로 산세가 험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보다 산세가 평탄하여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였고, 양양, 고성 지방 사람들이 한양을 갈 때 주로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하지요. 특히 양양, 고성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갈 때 용의 영험함을 빗대어 과거 급제를 기원하며 넘나들던 길이라고 합니다. 구룡령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옛길 들머리에는 굽이쳐 흐르는 계곡이 있고, 길의 중간 중간에 길의 위치를 표시하는 횟돌반쟁이, 묘반쟁이, 솔반쟁이 따위가 자리 잡아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여 주기 때문에 이 고갯길을 걸어서 넘는 것도 운치가 있지요. 또한 구룡령 옛길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일대 주민들이 강제 징집되었던 애환의 역사가 서린 철광소와 케이블카가 남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옛길 길가에는 1989년 경복궁 복원 당시 쓰기 위해 잘라내 밑동만 있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보물 제1899호 “은제도금화형탁잔(銀製鍍金花形托盞)”은 잔과 함께 잔을 받치는 잔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개 잔과 함께 한 벌을 이룰 때에 ‘탁잔(托盞)’이라고 부릅니다. 이 탁잔은 표면에 도금이 고루 입혀져 금색이 완연하지요. 고려시대에는 은제도금 탁잔뿐만 아니라 은제 주전자, 은제 합, 팔찌 등에도 타출기법(打出기법, 금이나 은 등 금속제품을 안팎으로 두드려 문양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금속 문양 장식 기법)을 써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또 고려시대 탁잔은 잔 받침대의 형태에 따라 연꽃이 폈을 때의 모습과 같은 앙련식(仰蓮式)과 연꽃을 엎어 놓은 모습과 같은 복련식으로 나누는데, 이 탁잔은 복련식이지요. 또 탁과 잔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것과 꽃잎을 낱낱이 표현한 것이 있는데, 이 잔탁은 잔은 물론 탁(托)의 받침대와 아가리 부분까지 모두 꽃잎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탁잔은 조형적으로 매우 아름다운데 새겨진 무늬가 세련되고 조화로우며 타출기법 또한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하여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고 평가 됩니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중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시가 건립하고 세종문화회관(사장 이승엽)이 위탁 운영하는 서울돈화문국악당(예술감독 김정승)이 오는 9월 1일(목) 개관한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은 창덕궁 일대의 정체성 회복과 국악 활성화를 위해 서울시에서 주유소가 있던 자리를 매입해 국악 전용 공연장으로 조성한 곳이다. 전통 한옥과 현대 건축 양식을 혼합해 건축했으며, 친환경적인 공연장을 표방해 지열을 이용한 난방, 기계적 확성을 하지 않는 자연음향 등을 추구한다. 지하 2~3층에 위치한 서울돈화문국악당의 실내 공연장은 음향 장치에 의한 별도의 확성 없이 보다 청명한 연주를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모두 140석의 좌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된 작은 객석으로 무대 위 예술가와 관객과의 거리가 가까워 상호 소통이 중요한 국악 장르에 더욱 어울리며, 객석의 경사도가 일반 공연장보다 높아 앞좌석으로 인한 시야 방해가 거의 없다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 객석 내부가 전통 창호로 마감되어 있어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맨 뒤의 객석까지도 음량이 적은 국악기의 소리가 잘 전달되어 우리 국악의 정수인 산조, 판소리 등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함안군 법수면에 가면 넓이 33,911㎡의 늪지대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늪지식물이 자라고 있지요. 이 늪지는 남강(南江)을 끼고 발달했으며, 물의 깊이는 1.5∼2m입니다. 늪지와 늪지식물들은 날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는데, 법수면의 늪지대는 이곳에 광주 안 씨가 정착하면서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후손의 번창을 위해 늪지대를 보존하여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조사된 늪지식물로는 보풀, 자라풀, 줄풀, 세모고랭이, 창포, 개구리밥, 물옥잠, 골풀, 나도미꾸리낚시, 애기마름, 마름, 가시연꽃, 붕어마름, 털개구리미나리, 노랑어리연꽃, 통발, 뚜껑덩굴 등이 있으며 식물성 프랑크톤인 먼지말류와 돌말류도 발견되었다고 하지요. 이 18 가지의 고등식물은 겉핥기식 조사에서 나타난 것들로 좀 더 집중조사를 하게 되면 더 많은 종류가 기록될 것입니다. 이 늪지는 문화재청에서 1984년 천연기념물 제346호로 지정되어 보호하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합니다. 이곳은 늪지식물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가 이 늪지를 보호해 온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의미가 있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제의 한일합병 조약이 강제 체결되며 식민시대가 시작된 바로 그 곳, 남산공원 통감관저터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피해 할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공간인 ‘기억의 터’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시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위원장 최영희)는 경술국치일인 8월29일(월) 늦은 1시 남산 통감관저터에서 민‧관 협력으로 조성한 ‘기억의 터’ 제막식을 열었다. 행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와 박원순 서울시장, 양준욱 서울시의회 의장,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기억의 터 최영희 추진위원장과 ‘기억의 터’ 조성 추진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 등 노동계인사들이 참석했으며, 행사장에는 참석자들 말고도 언론사 취재진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제막식의 시작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 최영희 위원장의 인사말씀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피해할머니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동안 여러 대통령은 지금 박근혜 대통령처럼 우리 할머니들을 괴롭힌 적이 없었다.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서 위로금 받아서 할머니들에게 준다는 것은 할머니들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경술국치조약(庚戌國恥條約) 곧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강제로 맺어진 날입니다. 1910년 8월 22일 서울거리에 일본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열도록 하여 이른바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이완용 내각이 결의하는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그 날 전권 위임장을 받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바로 창덕궁을 빠져나와 남산에 있는 통감관저로 향합니다. 그 통감관저에서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했지요. 그러나 일본은 조선 사람들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숨긴 채,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습니다. 이 한일병합조약의 핵심은 바로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입니다. ▲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이완용의 경술국치조약(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경술국치조약 이후 경복궁 근정전에는 일장기가 내걸렸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러나 이는 불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수가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했는데 금슬이 좋았다. 스무 살이 되자 부모가 중매로 용모와 덕행이 있는 고을 여자와 혼인시키려 하니, 강수가 이를 거절하며 다시 장가들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성내며 “너는 유명해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사람을 짝으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고 했다. 강수가 두 번 절하고 “가난하고 천한 것은 수치스런 일이 아닙니다. 도리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는 것이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중간 줄임)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고 했다. 《삼국사기》 ‘강수 전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강수는 신라 명문장가입니다. 위 글에서 나오는 “야합(野合)”이란 말은 중매를 통한 정식 혼례를 거쳐야 혼인이라고 인정하는데 그런 절차를 밟지 않은 사실혼이나 정상적인 나이의 혼인이 아닌 경우를 말하지요. 따라서 강수의 아버지는 그런 관례에 따라 이루어진 것 곧 야합이라며 대장장이 딸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 혼인시키려 한 것이지요. 아버지를 설득하면서까지 자신이 선택한 부인을 버리지 않은 강수이기에 삼국사기에까지 나오나 봅니다. 그럼 예전의 혼인 나이는 어땠을까요? 고려시대에 남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JTBC 뉴스를 즐겨봅니다. 그 어떤 방송보다도 공정하고 심층적인 보도를 한다는 생각 때문이죠. 더더욱 명쾌하고 가슴 울리는 앵커브리핑도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 앵커브리핑에 영어가 대문짝만 하게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 화면에는 “DANGER”라고 크게 써놓고는 그 아래에 “Anger is only one latter short of danger”이라고 돼서 한글은 한 자도 없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면 앵커브리핑도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한글도 없이 영어가 대문짝만 하게 나온다는 건 이해가 안 됩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설명이 잘 되고 멋지게 보이나요? JTBC 뉴스는 꼭지 이름들도 영어가 많습니다. “밀착취재”처럼 우리말도 있긴 하지만, “팩트체크”, “비하인드 뉴스”, “앵커브리핑” 등 영어 일색입니다. 언론은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런 점에서 방송이 우리말보다 영어를 우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우리말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멋있는 우리말로 이름들을 지을 수는 없나요? JTBC가 영어숭배주의자들의 집합소가 아님을 보여주세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남 화순의 운주사에는 하룻밤에 만들었다는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이 있습니다. 물론 현재는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지요. 그런가하면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무렵에 만들었다는 “천불소탑(千佛小塔)”이 있습니다. 이 천불소탑은 일제강점기 때 석굴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원래 2기가 있었는데 1기는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나머지 1기만 경주박물관에 남아 있지요. 석굴암 천불소탑은 탑의 몸돌 일부와 지붕돌, 그리고 상륜부 일부만이 남아 있어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남아 있는 탑의 몸돌 부분을 살펴보면 4단으로 나뉘었고 각 단은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작은 불좌상을 돋을새김(부조)하여 천불(千佛)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탑에 불상을 빼곡히 새긴 천불탑은 불교가 서역에서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습니다. 전하는 얘기로는 석굴암 관음보살상 앞에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오층석탑이 있었는데 1909년 조선의 2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에 들린 이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소네 아라스케의 약탈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 불화 가운데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