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219호 “세조대의 회장저고리”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옷은 깃과 끝동, 섶과 옷고름 등에 짙은 배색을 한 회장저고리로 1975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자상에 금을 입히다가 불상 안에서 발견되었지요. 함께 발견된 연기문과 유물의 형태로 보아 1463년(세조 9) 중창 때 수명을 축원하여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저고리의 크기는 길이 52.4㎝, 품 34㎝이며, 전체적인 모습은 품이 넓어서 소매길이와 저고리길이가 짧게 보일 정도지요. 깃은 네모로 각이 진 목판깃이며, 직선 형태의 소매(직배래)와 짧고도 좁은 옷고름 등이 조선초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저고리의 전체적인 구성은 균형이 잘 맞으며, 색상도 전통적인 쪽물 염색이 잘 보존되어 있지요. 같은 색깔을 옅고 짙게 하여 교대로 배치하여 배색효과를 잘 살렸는데, 이것은 우리 옛 겨레가 의생활을 단순히 흰색이나 원색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저고리의 뒷 중심선 오른쪽에 “장씨소대(長氏小對)”라는 글씨가 있어 저고리의 주인이 세조의 후궁 가운데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요. 현재 우리나라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넷째인 “처서(處暑)”입니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만큼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 잡는 때입니다. “處暑”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 되지요. 하지만 아직 찌는 듯한 더위는 처서를 무색하게 합니다. 처서 무렵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고 하는데 모기 입이 삐뚤어지기는커녕 아직 매미만 신이 난 듯합니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 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ㆍ낭군의 애(창자) 끊으려 가져가네.’라고 말한다.” 남도지방에서 처서와 관련해서 전해 오는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처서 때의 세시풍속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포쇄(曝曬)라고 해서 뭔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여자 안중근이라 불리는 남자현 애국지사(1872. 12. 7 ~ 1933. 8. 22)가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 끝에 먼 이역 땅에서 삶을 마감한 날입니다. 옥중에서 원수의 밥은 사절이라며 끝까지 항거하여 기력이 다해 숨진 남자현 애국지사는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면서였지요. 남자현 애국지사는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쪽 약손가락을 잘라 흰 무명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내 조사단원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던 남편 김영주가 왜군과 전투 중 죽고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3월 중국 요녕성 통화현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 가입하고 독립투쟁에 뛰어 들었지요. 남자현 애국지사는 20~30년대 만주 항일무장운동 진영의 유일한 여성대원으로 꼽힙니다. 의열활동, 사분오열된 만주지역 무장단체의 통합, 군자금 조달, 여성들의 계몽을 위한 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수표는 현금을 대신해서 큰돈을 주고받을 때 씁니다. 요즘이야 수표 대신 계좌이체를 써서 수표의 쓰임새가 많이 줄었지만 얼마 전만 해도 경제 활동에 중요한 수단이었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수표를 썼던 사실을 아시나요? 물론 현대에 우리가 쓰고 있는 수표와는 다르지만, 조선사회에서도 수표를 썼음이 경기도 남양주시 실학박물관에서 오는 9월 18일까지 열리고 있는 “경기 청백리 특별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수표를 가진 사람이 발행 은행에 수표를 제시하면 해당 금액을 지급받는 것이지요. 그러나 전시회에 나온 조선시대에 썼던 수표는 전당문서와 같은 것입니다. ‘전당’이란 물건을 맡기고 빌린 돈을 기한 안에 갚지 못하면 맡긴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는 조건 아래 돈을 빌리는 것이지요. 이 수표는 급한 용도로 벼 20가마를 빌리는 대신 논 18마지기를 전당으로 잡힌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어음을 썼으며 요즘의 약속어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음은 ‘어험’, ‘음표’, ‘표권’이라고도 불렀는데, 발행한 사람, 받는 사람, 수령금액, 지급기일 따위를 기록했습니다. 전시회에 나온 수표는 이것을 가진 사람이 어음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은 적은 인쇄소라도 다 규칙 있게 일을 하지오마는 그때는 어디 그랬습니까? 내가 서른하나인가 둘이 되었을 때이니 이십 육칠년 전인가 보오. 그렁저렁 여남은 군데로 돌아다니며 운전, 삽지, 문선 등 별의별 일을 다 하다가 배설이 경영하든 대한매일신보사에 문선공으로 들어갔지요. 그 때 문선공이 육칠 명 됐나요.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상투들이 뾰죽뾰죽한 데다 곰방대를 제각기 하나씩 물고 입담배를 꽁꽁 눌러 담아서 빡빡 빨면서 문선을 하였지요.” 위는 동아일보 1926년 1월 14일 치 기사로 “십년을 하루 같이” 연재의 열한 번째 내용입니다. “십년을 하루 같이”는 교사, 이발사, 부동산 중개업자 같은 이들이 오랫동안 일을 해온 얘기를 담은 것으로 이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오는 10월 23일까지 열리는 “인현동 인쇄골목”에 전시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이야 인쇄기술이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 활자도 없어지고 디지털인쇄가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만 당시 문선공이었던 대동인쇄주식회사 조병문 정판과장 얘기는 딴나라 이야기처럼 재미납니다. 조 씨가 인쇄일을 하던 때는 1900년 무렵으로 갓을 쓴 사람들이 곰방대를 하나씩 물고 빡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지게차 연신 클랙슨을 울려대는 개조한 오토바이 그리고 자신의 키만한 종이를 쉴 새 없이 옮기는 사람들 삶이 무료하고 지루한 사람이 있다면 인쇄골목으로 기꺼이 초대한다. 세상 오디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숙연한 풍경 속으로“(빅이슈 2015. 11. 중) 서울역사박물관 “‘세상을 찍어내는 인쇄골목, 인현동’전”에 있는 말이다. 서울 중구 인현동에는 인쇄소가 즐비한 골목이 있다. 1984년 6월 16일 매일경제에는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에 국내 최대의 인쇄촌, 1500여 업체 몰려”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랐을 정도다. 서울특별시 중구에 자리 잡은 인현동은 2015년 기준 3,651개의 인쇄관련 업체가 집적되어 있어 기획부터 후가공까지 인쇄의 모든 공정이 가능한 전국 최대 규모의 인쇄골목이다. 전시회는 그런 인현동의 모든 것 곧 인현동 인쇄골목의 형성과 변화, 소규모 인쇄업체들의 분업체계와 공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전시회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과 공동으로 오는 10월 23일(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회를 열고 잇다 이번 전시는 인현동 인쇄골목의 형성과 변화, 특징을 잘 볼 수 있도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老牛用力 已多年 늙은 소 논밭갈이 힘쓴 지 이미 여러 해 領破皮穿 只愛眠 목 부러지고 살갗 헐었어도 잠만 잘 수 있다면 좋으리 犁耙已休 春雨足 쟁기질, 써레질도 끝나고 봄비도 넉넉한데 主人何苦 又加鞭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휘두르나 위 한시는 보물 제1627호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 (仁穆王后御筆 七言詩)”로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것입니다. 크기는 세로 110cm, 가로 50cm이고 종이 바탕에 쓴 것으로 근대에 족자로 만들어졌는데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경기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요. 인목왕후가 대비(大妃) 때인 1613년(광해군 5) 이이첨 등에 의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사약을 받고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七長寺)를 원당(願堂)으로 삼아 중건하면서 쓴 글이지요. 시에서 인목왕후는 이이첨 등 대북파에 시달리는 자신을 늙은 소에 견주고 광해군을 그 늙은 소에 채찍을 휘두르는 주인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의미를 곰곰 살펴보면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기업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예전 명절로 지냈던 백중(百中)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백종(百種), 머슴날(칠석), 망혼일(亡魂日), 머슴의생일, 중원(中元), 호미씻는날, 축수한날, 머슴명일(전라북도전주), 상놈명절(경상남도함안)도 있다. 백중은 음력 7월 15일로 세벌김매기가 끝난 뒤 여름철 농한기에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농민들의 여름철 잔치로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백중놀이를 즐기면서 하루를 보냈다. 백중은 원래 불가에서 부처의 탄생, 출가, 성도, 열반일을 합한 4대 명절에 더하여 우란분재(盂蘭盆齋, 불교에서 사후에 고통 받고 있는 자를 위해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가 행해지는 5대 명절에 속한다. 백중에 관한 기록들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7세기 김육(金堉)의 《송도지(松都志)》, 조선 후기의 학자 조재삼의 《송남잡지(松南雜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규합총서(閨閤叢書)》, 《이운지(怡雲志)》, 《용재총화(慵齋叢話)》,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따위에도 기록이 보인다. 백중은 한마디로 먹고 마시고 놀면서 하루를 보내는 날인데 이 날의 놀이는 두레먹기가 두드러진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복날의 마지막 말복(末伏)입니다. 복날에는 보신(補身)을 위하여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여 먹지요. 특히, 개를 잡아서 개장국을 만들어 먹거나, 중병아리를 잡아서 영계백숙을 만들어 먹고, 또한 팥죽을 쑤어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 하여 팥죽을 먹거나 시원한 참외나 수박을 먹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탁족(濯足)이라 하여 계곡에 들어가 발을 씻으며 더위를 피하기도 하고, 해안지방에서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면서 더위를 이겨내기도 했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입추와 말복 무렵이 되면 날씨가 좋아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벼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복 나락 크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라고 하여 귀가 밝은 개는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 속담은 벼가 쑥쑥 자라기를 바라는 농사꾼들의 마음과 닿아 있지요. 한편 ‘복날에 비가 오면 청산 보은의 큰애기가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충청북도 청산과 보은이 우리나라에서는 대추가 많이 생산되는 지방인 데서 유래한 속설입니다. 대추나무는 복날마다 꽃이 핀다고 하는데, 복날에는 날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는 히로히토 일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의 항복을 방송했습니다. 물론 그 소리는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이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방송이라는 것을 사람들 모두는 알았습니다. 온 나라는 광복의 감격에 소리쳐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일제의 영향으로 많은 조선 사람들이 입었던 국민복과 왜바지(몸뻬) 차림은 자취를 감췄고, 대신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입어온 흰 옷 입은 시민들이 거리를 메웠습니다. 또 사람들은 일장기에 푸른색을 덧칠해 급히 만든 태극기를 들고 기뻐 거리를 뛰어다녔지요. 그러나 광복 2시간 전만해도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따위의 소설로 알려졌던 작가 김동인은 조선총독부를 찾아가서 시국에 공헌할 작가단을 꾸리자고 종용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윤옥 시인이 쓴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에 그대로 나옵니다. “(앞 줄임) 광복 두 시간 전 총독부 학무국 / 동인이 찾아간 사무실 안 침묵이 흐른다 / 아 아베 씨 좀 보소 / 그걸 만듭시다 / 시국에 공헌할 작가단을 꾸리자구요 / 아베, 머리 절레절레 흔든 뜻은 / 이런 쓰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