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엔 냉면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역사 인물 가운데 냉면 사랑이 유별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조선 26대 임금이면서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었지요. 고종의 냉면 사랑 이야기는 대한제국기의 마지막 황후였던 윤비의 지밀상궁 김명길이 쓴 《낙선재 주변》이란 책에 나옵니다. 이 책은 조선과 대한제국기 황실 모습 이야기가 담긴 것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펴낸 책이지요. 고종은 맵고 짠 음식을 싫어하고 단 음식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넣어서 담근 동치미에 고명으로까지 배를 듬뿍 올려 만든 냉면을 즐겼다고 합니다. 궁중에 잔치가 있을 때는 반드시 냉면을 만들어 올리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냉면에 쓰인 재료는 메밀국수에 양지머리, 돼지 다리, 배추김치, 배, 꿀, 잣 따위였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고명과 육수만 수라간에서 만들고 메밀국수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는지 대한문 밖 국수집에서 사왔습니다. 이때 고종은 술을 전혀 못했기에 식혜를 곁들여 먹었다고 하지요. 황제국가를 선포하고 당당한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고종은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물론 독살 위험에 잠 못드는 나날을 보낸 탓에 불면증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사지길에 가면 높이가 무려 높이가 10.6m에 이르는 불상이 있습니다. 바로 보물 제96호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忠州彌勒里石造如來立像)이 그것인데 사적 제317호인 충주 미륵대원(彌勒大院址)터의 주존불(主尊佛)입니다. 모두 5개의 돌을 다듬고 쌓아올려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판석을 넓적하게 팔각으로 깎아 갓을 만들어 머리 위에 올렸지요. 크기가 다른 돌들을 적당히 잘라 올린 몸체는 마치 장승처럼 보입니다. 고려 전기 충청도, 전라북도 일대에서 많이 만들어진 큰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 하는 불상인데 현지 지명 “미륵리”와 절터 이름 “미륵대원”이 모두 미륵이기 때문에 미륵불이라고 믿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불상은 충남 당진의 보물 제100호 안국사터석불입상(安國寺址石佛立像), 전북 익산의 보물 제46호 익산고도리석불입상(益山古都里石佛立像),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십신사터석불(十信寺址石佛)을 비롯하여 주로 전라도와 충청도지방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신라의 멸망을 슬퍼하면서 금강산으로 가다가 월악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올해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 한글 반포 570돌이 되는 해이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보급 과정에서 불교의 역할이 아주 컸음은 언문으로 옮긴 각종 불경언해서가 이를 증명해 준다. 이렇게 《훈민정음》은 한글, 한국어 발전과 불교 발전에 동시에 이바지한 바 크다. 그동안 이러한 비중 있는 상호 관계를 제대로 조명한 국제학술대회는 없었다. 이에 연세대학교 언어정보연구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선학회 주최, 국립한글박물관, 한국연구재단 후원으로 “불교와 한글, 한국어 국제학술대회”가 오는 8월 18일 국립한글박물관 강당(13:00~17:30), 8월 19일 연세대학교 위당관 6층 문과대학 백주년기념홀(10:00~18:20)에서 열린다. 불경언해서의 발간과 보급 과정은 바로 훈민정음 발달 과정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므로 거꾸로 불교와 한글 관계를 규명하지 않는다면 훈민정음 반포 570돌의 의미를 제대로 조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불교와 한글, 한국어 국제학술대회”는 그 의미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현대 한국어뿐만 아니라 과거 한국어 역사를 말뭉치를 통해 조명해온 연세대언어정보연구원과 훈민정음과 불교 관련 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임금이 수라상을 밀어 이광좌에게 주니 그는 동료 신하들과 나누어 먹기를 청했다. 임금이 ‘경이 먼저 먹고 난 다음에 우의정에게 주고, 또 나머지를 싸서 좌의정에게 전해주라. 경들이 이 밥을 먹으면 어찌 차마 잊겠는가? 그릇을 자손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하여 오늘 음식을 하사하고 그릇을 나눈 일을 알게 하여 대대로 내 자손을 보필하게 하라’고 일렀다.” 이는 《영조실록》 13년(1737) 8월 14일치 기록입니다. 이렇게 임금이 수라를 들고 난 뒤에 남은 음식은 “퇴선(退膳)” 곧 “상물림”을 합니다. 상물림이란 임금이 수라를 들고 남은 음식을 신하나 아랫사람들에게 내려주어 먹을 수 있게 한 것을 말하지요. 수라상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차려진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임금이 혼자 먹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이 상물림은 궁궐뿐 아니라 감영 등 관아에서도 있었지요. 예를 들면 감사가 밥을 먹고 나면 이 물림상은 이방, 호방 등 6방과 비장, 수청기생들이 번갈아 차례를 정해가며 받아갑니다. 우리 겨레의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국어사전에서 “물림”을 찾아보면 “물려받거나 물려주는 일”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 물림 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밤한울 구만리엔 은하수가 흘은다오 / 구비치는 강가에는 남녀 두 별 있엇다오 / 사랑에 타는 두 별 밤과 낯을 몰으것다 / 한울이 성이 나서 별하나를 쪼치시다 / 물건너 한편바다 떠러저 사는 두 별 / 秋夜長 밤이길다 견듸기 어려워라 / 칠석날 하로만을 청드러 만나보니 / 원수의 닭의소리 지새는날 재촉하네” 위는 《삼천리》 잡지 1934년 11월호에 실린 월탄 박종화의 <견우직녀> 시입니다. 오늘은 칠월칠석인데 흔히 칠석이면 내리던 비는 오지 않고 무더위만 기승을 부립니다. 흔히 칠석 전날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타고 갈 수레를 씻는 '세거우(洗車雨)'라고 하고, 칠석 당일에 내리면 만나서 기뻐 흘린 눈물의 비라고 하며, 다음 날 새벽에 내리면 헤어짐의 슬픔 때문에 '쇄루우(灑淚雨)'가 내린다고 합니다. 또 칠석에는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를 만들려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요. 장마가 끝나고 입추와 말복 무렵이 되면 날씨가 좋아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벼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복 나락 크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라고 하여 귀가 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금은 서양으로부터 나왔는데, 중국이 모방하여 사용하였다. 오동나무판에 쇠줄을 달았으니, 그 소리가 쟁쟁하여 멀리서 들으면 종(鍾)과 같은데, 다만 지나치게 크고 세며, 경박하고 날리는 소리에 가까워 금이나 슬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작은 것은 12현이고 큰 것은 17현이다. 큰 것은 그 소리가 더욱 웅장하고 맑다". 이는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에 소개된 양금 이야기입니다. “양금(洋琴)”은 고대 아시리아(Assyria)와 페르시아(Persia)에서 기원된 악기라고 하며, 서양에서 중국을 거쳐 영조 임금 때 들어온 것으로 천금(天琴), 철사금(鐵絲琴), 번금(蕃琴), 양금(西洋琴), 구라금(歐羅琴), 구라현소금(歐邏絃小琴)이라고도 합니다. 사다리꼴의 널빤지 위에 두 개의 긴 괘를 세로로 질러 고정시키고 괘 위에 14벌의 금속줄을 가로로 얹은 다음, 대나무를 깎아 만든 가는 채로 줄을 때려서 맑은 금속성의 충격음을 얻는 악기지요. 양금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 곧 우리의 향악음정에 맞추어 현의 음률을 조정하고, 풍류방에서 정악을 연주하는데 쓰였습니다. 지금도 <영산회상>의 연주와 가곡반주에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단소와의 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셋째 입추(立秋)다. 입추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인데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 ≪고려사≫ 권84「지(志)」38에 “입추에는 관리에게 하루 휴가를 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입추는 곡식이 여무는 시기여서 이날 날씨를 보고 점친다. 입추에 하늘이 맑으면 만곡(萬穀)이 풍년이라고 여기고, 이날 비가 조금만 내리면 길하고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여겼다. 또한 천둥이 치면 벼의 수확량이 적고 지진이 있으면 다음해 봄에 소와 염소가 죽는다고 점쳤다. 그런데 가을이 들어서는 때라는 입추가 왔어도 이후 말복이 들어 있어 더위는 아직 그대로인데 입추가 지난 뒤의 더위를 남은 더위란 뜻의 잔서(殘暑)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더위를 처분한다는 처서에도 더위가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옛사람들은 왜 입추를 말복 전에 오게 했을까? 주역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을, 여자라고 해서 음기만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조금씩 중첩되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계절도 마찬가지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이 역할을 입추와 말복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드라마나 영화, CF에 자주 등장하는 공세리 성당은 푸른 숲과 고목, 고색창연한 성당 건물이 어우러지는 한 폭의 풍경화 그대로입니다. 1890년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신부가 지은 이 성당은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지정된 적이 있습니다. 벽돌로 지은 건물 외관도 아름답지만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장, 나무 의자 등 120년이라는 시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지요. 그런데 이명래고약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참 흥미롭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뾰루지가 나면 누구나 찾았던 것이 이명래 고약이었습니다. 중국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던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하여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냈고, 이 성당을 다니던 신자 이명래에게 그 비법을 전수해주었습니다. 고약 이름은 처음엔 드비즈 신부의 한국식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래가 이 고약에 민간요법을 더해 1906년 “이명래고약집”을 문 열었지요. 성한 살은 건드리지 않고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다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 고약의 고갱이(중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에는 8가지 괴이한 경치 곧 “8괴(八怪)”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허공에 떠 있다는 바위인 “남산부석(南山浮石)”, 모래가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문천도사(蚊川倒沙)”, 안압지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자라는 풀인 “압지부평(鴨池浮萍)” 따위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탑에 이끼가 끼지 않아 즈믄해(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는 국보 제39호 경주 나원리오층석탑(羅原里五層石塔)도 “8괴”의 하나지요. 이 석탑은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과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비교될 만큼 큰 규모입니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ㆍ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지요. 짜임새 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인 8세기 무렵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5층석탑으로, 탑이 지니고 있는 듬직한 위엄에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맑은 기품이 잘 어우러져 있지요. 1995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새는 한가로움을 좋아하여 골짜기만 찾아드는데(鳥欲有閑尋僻谷) 해는 편벽되기를 싫어하여 중천에서 광채를 더한다.(日慊偏照到中天)“ 위 시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 8. 4∼1943. 8. 3) 선생이 17살 때 의령군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지은 시입니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가장 먼저 시를 써내 군수로부터 칭찬을 받고 후한 상을 받았습니다. 이 시를 보면 이미 백산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겨레를 위한 큰 인물임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고들 말합니다. 선생은 1916년 무렵 고향의 논밭 2천 마지기를 팔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뜻 있는 이들과 함께 부산 중앙동에 포목과 건어물 따위를 파는 백산상회를 세웠습니다. 소규모였던 상회는 1918년 주식회사로 전환했는데 이때 중요 출자자는 선생과 함께 경주 최부자집 주손 최준 선생, 경상우도관찰사를 지낸 윤필은의 아들 윤현태 선생이었지요. 이 백산상회는 일제의 눈을 가리는 구실이었고 실제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창구였습니다. 김구 선생은 광복 뒤 최준 선생에게 독립운동자금 장부를 보여주며 백산상회의 역할에 큰 고마움을 표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