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중기에 나온 것으로 펴낸 사람을 알 수 없는 보물 제551호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를 아십니까? 《시용향악보》는 향악의 악보집인데 향악(鄕樂)이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궁중음악으로, 삼국시대에 들어온 당나라 음악인 당악(唐樂)과 구별되는 한국고유의 음악을 말합니다. 이 책에는 악장을 비롯한 민요, 창작가사 따위 악보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악보가 있는 가사(歌詞)는 모두 26편이 실려 있지요. 그 26편의 가사 가운데 ‘상저가’, ‘유구곡’을 비롯한 16편은 다른 악보집에 전하지 않아 제목조차 알려지지 않은 귀한 고려가요입니다. 이 책에는 한문으로만 된 ‘생가요량’과 함께 한글로 된 ‘나례가’, ‘상저가’ 따위가 있고, ‘구천‘, ‘별대왕’처럼 가사가 아닌 ‘리로노런나 로리라 리로런나’와 같은 여음(餘音)만으로 표기된 것도 있습니다. 또 조선의 건국과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노래, 신하들의 언로(言路)를 열기 위한 풍유(諷諭) 등 다양한 가요도 실려 있지요. 이 악보에 실려 있는 노래의 성격은 민요부터 창작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여 조선 초기 궁중에서 불리어지던 가요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하는데, 특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여름 산이나 들의 양지쪽에 가면 높이 80∼120cm 키에 장화 닮은 꽃이 주렁주렁 달린 “활량나물”을 보게 됩니다. 어린순이 올라오는 모습이 닭 볏 같다고 달구벼슬, 활장대, 콩대라고도 하지요. 꽃은 노란빛이다가 서서히 갈색이 짙어집니다. 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한국ㆍ중국ㆍ일본ㆍ우수리 등지에 자랍니다. 어린순을 데쳐서 돌돌 말아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다른 나물과 같이 데쳐서 된장이나 고추장에 무쳐 먹기도 하지요. 그런데 꽃이름이 “활량나물”입니다. 어찌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애기완두보다 꽃이 크다는 뜻에서 활량나물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설득력이 좀 모자랍니다. 어떤 이는 원래 한량(閑良)의 발음식 표기로 “활량”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도 하지요. 신발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 같은 꽃줄기를 보면서 할 일없이 짚신을 동여매고 싸돌아다니는 한량을 빗대고 싶었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활량나물은 콩과식물이기 때문에 다른 콩과 식물들처럼 뿌리에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자라고, 이는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시켜 단백질을 만드는 원료가 되는데 그래서 뿌리혹박테리아는 질소비료 공장이라고도 말합니다. 활량나물의 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역시 롯데백화점입니다. 얼마 전 “Lovely SALE”이라고 광고를 하더니만 이제 “Lovely KOREA Festival”입니다. 저렇게 영어를 신나게 써서 민족기업이 아니라는 증거를 남기려는 것인일까요? 광고 아래에는 “Fighting Korea 스포츠 의류 용품”이란 글귀도 보입니다. 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의 선전을 기원 하는 것이지 모르지만 이건 미국이나 영국 같은 영어종주국에서는 쓰지 않는 콩글리시까지 동원합니다. “‘파이팅’(fighting)‘이란 말은 본래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출처가 모호한 가짜 영어입니다. ‘파이팅’은 호전적인 뜻으로 ‘싸우자’ ‘맞장 뜨자’는 정도의 뜻일 뿐이며, ‘어려움을 무릅쓰고 계속하자!’ 뜻으로는 ‘키프 잇 업’(keep it up)을 쓴다고 하지요. 또 이 말을 ‘화이팅’이라고 소리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외래어 표기법’에 어긋나며, 물고기인 ‘대구’(whiting)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더 이상합니다. 조폭들이나 쓸 “파이팅” 대신 “얼씨구!, 힘내자!, 영차! 아리아리, 아자아자!”라고 쓰면 어떨까요? 낱말 하나라도 우리의 정서를 잘 나타내는 말을 골라 쓰고 어법에 맞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는 보물 제564호 “창녕 영산 만년교”가 있습니다. 만년교(萬年橋)는 1780년 세워진 무지개다리(虹橋)로서 영원히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만년교’라 불렀지요. 또 남산(南山)인 함박산(咸朴山)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에 놓인 다리라고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하며, 다리를 놓은 고을 원님의 공덕을 기리고자 ‘원다리’라고도 부릅니다. 만년교는 실개천 양쪽에 있는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가공한 화강석을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틀었습니다. 홍예 위에는 돌을 비교적 네모나게 다듬어 쌓은 뒤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고르게 흙을 깔았고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웠지요. 난간과 장식은 없으며 자연스럽게 휘어진 노면이 반원형의 홍예와 조화를 이루며 물에 비친 모습과도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줍니다. 만년교 주변에는 1780년 당시 쌓은 목적, 시주자, 공사 감독자, 석공 따위의 이름을 기록한 “남천석교서병명(南川石橋序幷銘)”이라 쓴 비석과 “만년교”라 쓴 빗돌 2기가 세워져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13살 난 글씨 신동이 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하지요. 만년교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蒲席筠床隨意臥 대 평상에 자리 깔고 편한 대로 누웠더니 虛鈴疎箔度微風 쳐놓은 발 사이로 실바람이 솔솔 불어 團圓更有生凉手 방구부채 살살 흔드니 바람 더욱 시원해 頓覺炎蒸一夜空 푹푹 찌는 더위도 오늘밤엔 사라지네“ 위 한시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여름날정경[夏景]”입니다. 옛 선비들의 여름나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에어컨 바람과 함께 거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여름나기를 해야만 하지만 고봉은 그저 평상에 왕골대자리를 깔고 방구부채(부채살에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모양 부채)를 부칠 뿐입니다. 굳이 탁족(濯足,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쫓는 일)을 하지 않아도 오늘밤은 푹푹 찌는 무더위도 사라졌다고 하지요. 고봉은 어려서부터 독학하여 고전에 능통했고, 나이가 26살이나 위인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쟁한 편지를 8년 동안이나 주고받았는데 후세 유학자들이 이 문제를 말하지 않은 이가 없었지요. 퇴계가 선조에게 기대승을 말하기를 “그는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은 보기 드무니 이 사람을 통유 (通儒, 세상사에 통달하고 실행력이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해남 윤씨문헌(海南尹氏文獻) 공재공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해 마침 해일(海溢)이 일어 바닷가 고을은 모두 곡식이 떠내려가고 텅 빈 들판은 벌겋게 황톳물로 물들어 있었다. 백포(白浦)는 바다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 재해(災害)가 특히 극심하였다. 인심이 매우 흉흉하게 되어 조석 간에 어떻게 될지 불안한 지경이었다. 관청에서 비록 구제책을 쓰기는 했으나 역시 실제로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다.” 이에 공재 윤두서는 마을사람들에게 함께 산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소금을 구워 살길을 찾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한마을 수백호의 주민이 이에 도움을 받아 모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나 떠돌아다니거나 죽는 일이 없게 되었지요. 공재는 단순히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하는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스스로 일을 해서 기근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던 슬기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재는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공재로부터 시작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림에 뛰어났습니다. 또 공재의 그림을 보면 나물캐기, 짚신삼기, 목기깎기, 돌깨기 같은 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어려운 삶을 사는 백성에 대한 애정이 뚝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함안군 칠원면에 가면 중요민속문화재 제208호 “함안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이란 연못이 있습니다. 이는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운 의병장 주재성(周宰成)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는 의병은 물론이려니와 관군에게도 사재를 털어 넉넉히 음식을 제공하고 보살펴주니 칭송이 자자하였고 난이 평정되자 관군들이 원대 복귀하는 길에 마을 어귀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지요. 그 연못을 “국담(菊潭)”이라 부르고, 연못 안에는 작은 모래섬을 만들고 양심대(養心臺)라 불렀습니다, 또 담장 쌓고 영귀문(詠歸門)라 이름 붙인 문을 냈지요. 이는 고마움에 보답하려는 병사들의 정성이었습니다. 이후 주재성은 연못 이름으로 호를 삼고, 연못가의 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사철 모습이 변하는 국담에서 우주를 보고 진리를 탐구합니다. 이 무기연당가에는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바람에 몸을 씻는 집이란 뜻의 “풍욕루(風浴樓)”. 자연의 삶을 고난의 벼슬길과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정자 “하환정(何換亭)”도 있습니다. 이 무기연당은 비교적 원래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종 때의 명신 조말생의 고손자 형제인 조언수와 조사수는 두 사람 모두 청백리였습니다. 특히 아우 조사수는 중종이 만조백관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청문(淸門), 예문(例門), 탁문(濁門)의 셋을 만들고 청백리를 뽑는 행사를 했는데 이때 서슴없이 청문으로 들어갔지요. 물론 청문은 스스로 청백리라 생각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인데 모두 눈치를 보면서 보통이라는 뜻의 예문으로 들어갔지만, 조사수는 거리낌 없이 청문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도 조사수의 이런 행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하루는 조사수가 영의정 심연원과 한 자리에서 경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사수는 영의정을 앞에 두고 “영의정 첩 아무개의 집은 처마 끝이 너무 깊고, 또 사랑마루의 칸 수가 법도보다도 더 넓게 지어 큰 사치를 하고 있으니 이는 영의정이 법도를 어긴 것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라고 했다고 하지요. 아무리 대쪽 같은 청백리요, 언관이라고는 하지만 임금 앞에서 만인지상이라고 하는 영의정의 체면을 무참히 깎아내리는 것은 아마 조사수가 아니고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심연원은 이때 오들오들 떨면서 당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기는커녕 이후 첩의 집 사랑을 쓰지 않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두째인 대서(大署)입니다. 이때는 대개 중복(中伏) 무렵으로, 장마가 끝나고 “염소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더위가 가장 심하지요. “쇠를 녹일 무더위에 땀이 마르지 않으니”라는 옥담 선생 시 가운데 나오는 구절은 이즈음의 무더위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데 이런 불볕더위, 찜통더위에도 농촌에서는 논밭의 김매기, 논밭두렁의 잡초베기, 퇴비장만 같은 농작물 관리에 쉴 틈이 없지요. 그러나 우리 겨레는 더위가 극성인 때 혀끝에서는 당기는 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뜨거운 음식으로 몸을 보양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슬기로움인데 더운 여름철의 더운 음식은 몸 안의 장기를 보호해준다고 합니다. 이 이열치열의 먹거리로는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실제로는 잉어와 오골계)으로 끓인 “용봉탕”, 검정깨로 만든 깻국 탕인 “임자수탕” 그리고 보신탕, 삼계탕, 추어탕 따위가 있지요. 그리고 옷을 훌훌 벗어던질 수 없었던 선비들은 냇가에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하거나 소나무 그늘이 진 정자에서 솔바람 맞으며 시를 읊는 것으로 더위를 피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건강에 해롭다는 에어컨 바람으로 여름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여러분은 조선 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에 가보셨나요? 경희궁(慶熙宮)은 광해군 때 창건한 궁궐로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렸지만 영조 때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그 경희궁의 정전은 숭정전(崇政殿)입니다. 숭정전은 경종, 정조, 헌종의 즉위식이 열렸고 비운의 소현세자가 혼례를 치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경희궁은 일제가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궁궐에 동물원을 만든 창경궁은 물론 총독부를 지어 훼손한 경복궁처럼 모든 궁궐이 피해를 봤지만 특히 경희궁은 거의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정문인 흥화문은 이등박문을 기리는 절 박문사 정문이 되었다가 신라호텔에서 영빈관 정문으로 쓰였습니다. 그 뒤 경희궁 복원 사업 과정에서 경희궁터로 옮겨왔지요. 또 정전 숭정전은 일제가 중학교로 쓰다가 조계사로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동국대 안에 정각원이란 이름의 법당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신 경희궁 터에 있는 숭정전은 원래의 건물이 아니고 1980년 경희궁 복원 사업 과정에서 새롭게 지은 것이지요. 이렇게 일제는 조선을 망가뜨리고 식민지로 가두기 위해 궁궐의 훼손을 철저히 진행했는데 경희궁은 정말 비운의 궁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