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호랑이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민중들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라고 하는 민화(民畵)를 아십니까? 비전문적인 화가나 일반 대중들의 치졸한 작품 등을 일컫는 말로 쓰이지만 직업 화가인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이나 전문화가가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민화는 나쁜 귀신을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기를 바라는 대중의 의식과 삶에 얽힌 그림, 집 안팎을 꾸미기 위한 그림들이 있지요. 그런데 민화 가운데는 글씨를 이용해 그린 문자도(文字圖)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윤리도덕에 관련된 글씨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인데 문자도에 주로 쓰인 글자들은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이렇게 여덟 글자입니다. 그래서 이 문자도는 주로 사랑방이나 글을 배우는 아이들의 방에 병풍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 민화 문자도(文字圖)의 孝에는 잉어와 죽순이, 忠에는 용이 그려 있다.(조선대학교 박물관 소장) 여기서 맨 먼저 나오는 효는 잉어와 죽순, 부채가 나오는데 이는 한겨울 어머니를 위해 잉어를 잡고 죽순을 구해 잡수시게 했다는 고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연적(硯滴)은 벼루에 먹을 갈 때 쓸 물을 담아두는 그릇인데 불교의 나라 고려시대에는 주로 청자로 만들었고 성리학의 나라 조선시대에는 백자로 만들었습니다. 연적의 형태는 참 다양한데 여기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329호 백자 청화소상팔경문 팔각연적(白磁 靑畵瀟湘八景文 八角硯適)은 옆면이 여덟면으로 이루어진 크기가 비교적 큰 백자연적입니다. ▲ 보물 제1329호 백자 청화소상팔경문 팔각연적 윗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판인 윗면에는 용무늬와 구름무늬를 오목새김(음각)과 돋을새김(양각)으로 조각하였는데, 뭉실뭉실 피어나는 구름 사이로 문득 문득 용의 몸이 휘감아 돌고 있는 모습을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지요. 윗면 무늬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오목새김과 돋을새김으로 조각조각 함으로써 나는 용의 모습과 중첩된 구름무늬들에 전율되어 신비감을 더 해주고 있습니다. 이 백자연적은 여덟면 가운데 물이 나오는 부분이 있는 면에는 그림이 아닌 시로써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하고 그 양옆에 각각 한 구절씩 시구를 적어 놓았습니다. 다양한 표현기법과 함께 코발트와 청화물감을 써서 무늬를 표현했는데 회화적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 가면 천연기념물 제355호 전주 삼천동 곰솔이 있습니다. 곰솔은 줄기 껍질이 검은 빛이라고 흑송, 검솔로도 부릅니다. 또 곰솔은 바닷가에 자라기 때문에 해송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곰솔은 매우 드물게도 내륙에서 자라지요. 이 곰솔은 아래에서 보면 하나의 줄기가 위로 올라가다 높이 2m 정도부터 수평으로 가지가 펼쳐져 마치 한 마리의 학이 땅을 차고 날아가려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곰솔은 2001년 누군가의 독극물 주입으로 가지 ⅔ 가량이 죽어버려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합니다. ▲ 천연기념물 제355호 전주 삼천동 곰솔(문화재청 제공) 참고로 일반 소나무와 다른 모습의 반송 곧 다복솔은 나무높이가 10m 안팎으로 땅 위 가까운 곳에서부터 여러 개의 줄기가 나와 잘 어우러지며 고고한 품위를 가집니다. 또 백송도 있는데 당송, 백골송, 백피송으로도 불리는데 자라면서 점차 껍질이 벗겨져 흰빛을 띠므로 백송이라고 부릅니다. 수피가 완전한 백색은 아니고 녹색과 묘한 조화를 이뤄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어, 예로부터 승려나 학자들이 주로 절이나 뜰에 심어 즐겨 감상했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수원화성박물관은 수원화성 완공 220주년과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이방인이 본 옛 수원화성 특별 기획전을 오는 7월 17일까지 열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이방인이 찍은 100여점의 사진과 그림을 정리해 그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기획됐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화성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전경, 화홍문 주변 성곽이 홍수로 부너져 성돌이 수원천 바닥으로 쓸려 내려와 있다. 그 사이에 아낙들이 빠랠르 하고 성돌 위에 말리고 있다. ▲ 팔달문 밖 거리 풍경, 초가지붕의 상점들이 없어지고, 일본식 2층 건물이 들어섰다. 손님을 태우려고 기다리는 인력거들이 보이고, 왼쪽엔 중절모를 쓴 외국인도 보인다. 제1부 백 년 전 수원화성 옛 사진에서는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사진기록과 유리건판 사진 속 수원화성을 보여준다. 특히 헤르만 산더의 팔달문 앞 거리, 화홍문과 수원천 등은 조선 사람들이 등장하여 당시 생활상을 집작할 수 있게 해준다. 제2부 이방인들의 수원화성에 대한 호기심에서 눈에 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오 때 진상하는 부채는 비단에 주칠(朱漆, 붉은 물감)을 하였는데, 사치스럽기만 하고 실용 가치가 없으니, 지금부터는 양대비전(兩大妃殿)에 바치는 것 외에는 다시 그렇게 하지 말라." 이는 《성종실록》 23년(1492) 3월 23일에 나오는 성종의 어명입니다. 얼마나 부채가 호화로웠으면 임금이 직접 나서서 주칠한 부채를 만들지 말라고 했을까요? 또 《정조실록》 정조 18년(1794) 11월 27일 기록을 보면 암행어사 서유문이 임금에게 고하기를 "흥양현(興陽縣 지금의 고흥)은 과거에는 대나무의 산지로서 해마다 부채 만드는 편죽(片竹)을 1천 5, 6백 자루나 혹은 2천여 자루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중간 줄임) 명색이 첩선(帖煽)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길이가 한 자에 가깝고 그 살도 30개가 넘습니다. 대 하나를 베어 쓸 수 있는 것은 겨우 한두 마디뿐이니 만약 첩선을 만들려면 부채 한 자루에 큰 대 몇 개를 소비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박인권 선생의 작품(전주부채연구소 제공) 그래서 너도나도 호화로운 부채를 만든다면 대밭이 벌거숭이가 될 수밖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경복궁은 6년여의 공사 끝에 고종 9년(1872년) 중수되어 옛 위용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궁 경복궁은 얼마 가지 못해 일제로부터 유린당해 국권을 잃어버린 조선의 처참함을 상징하는 유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1915년)와 조선부업품공진회(1923년), 조선박람회(1929년) 때문이었지요. 경복궁 안에서의 조선물산공진회 전에도 일제는 1907년 을지로 황금정 자리에 신축한 대동구락부에서 경성박람회를 열었습니다. 이 박람회는 일제가 생산한 상품을 조선에 선전하려는 것이었지요. 이것은 시작이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 드디어 일제의 흉계를 펼칩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 식민통치를 벌인 지 5년이 되는 해인 1915년 경복궁을 짓밟고 조선물산공진회를 연 것입니다. ▲ 일제, 경복궁을 식민통치를 위한 선전장으로 썼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조선물산공진회 전시를 위해 일제는 르네상스 양식의 백색 전시관을 지었고 이 때문에 기존의 궁궐 건축물은 전근대성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근정전 주의의 행각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바야흐로 농촌 들녘에서는 모심기가 한창입니다. 이런 모심기를 도심에서도 볼 수 있는데 도시공동체 텃밭인 노들텃밭에 딸린 논에서 5월 28일(토) 농사짓는 사람들과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다채로운 모내기 체험 행사가 그것입니다. 특히 이번 모내기 행사에는 강원도 홍천에서 겨릿소를 이용한 논 써레질로 전통 농경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분들을 초대하여 전통모내기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하지요. 예전에는 겨릿소를 이용해 써레질을 하는 곳이 많았는데 겨리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이르는 말로 양우려라고도 합니다. 써레질이란 모내기를 위해 논바닥을 반반하게 고르는 작업을 말합니다. 써레는 단단하고 굵은 향나무와 느릅나무 같은 통나무로 '바탕'을 만들고, 그 밑에 구멍을 파서 밤나무로 말뚝같이 깎은 3040Cm가량의 '발'을 꽂아서 모양으로 만듭니다. 지금 농촌에서는 거의 쓰지 않아 써레를 이루는 부분에 대한 용어도 낯설기만 하지만 써레의 양 끝에서 두 번째 발이 바탕 위로 뚫고 나와 손잡이 가로나무에 연결되는 데 이것을 '직살'이라고 합니다. 바탕에는 다시 '채'를 해 박아 그것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3ㆍ1혁명의 발원지인 봉황각과 순국선열ㆍ애국지사 묘역 그리고 4ㆍ19민주묘지가 자리 잡고 있는 역사의 현장인 북한산 자락에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4월 혁명에 이르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전파하기 위한 근현대사기념관이 5월 17일 문을 열었다. 강북의 위탁을 받아 기념관을 운영하는 (사)민족문제연구소는 근현대사기념관을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를 지키고 키워나가는 산 교육장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근현대사기념관 전경 근현대사기념관은 개관을 맞아 오는 5월 28일(토) 늦은 1시부터 5시까지 시민들이 함께 기념관을 둘러보고 순국선열ㆍ애국지사 묘역을 참배하는 역사 탐방을 민족문제연구소 주최 근현대사기념관 주관으로 진행한다. 주요 일정은 근현대사기념관 관람 - 이명룔 선생 묘소 - 신익희 선생 묘소 이준 열사 묘소 김병로 선생 묘소 이시영 선생 묘소 광복군 합동 묘소 김창숙 선생 묘소 유림 선생 묘소 순서로 진행된다. 모이는 곳은 근현대사기념관 앞뜰이며, 신청할 사람은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문자로 신청하면 된다, 신청할또는 문의 전화번호는 010-8638-8879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도(粧刀)는 몸에 지니는 조그마한 칼로서 남녀 구별 없이 호신용 또는 꾸미개로 썼는데 이를 만드는 사람을 장도장(粧刀匠)이라합니다. 장도의 종류는 칼자루와 칼집의 종류에 따라서 은(銀)장도, 백옥(白玉)장도, 죽(竹)장도, 먹감장도, 오동(烏銅)장도, 대모(玳瑁)장도, 상아(象牙)장도 따위가 있고, 형태로는 원통형,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따위가 있습니다. 장도는 몸에 차고 다니는 것을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을 낭도(囊刀)라 하지요. ▲ 완성된 장도(문화재청 제공) "명나라 관제(官制)를 참작컨대 군현(郡縣)에서 조칙(詔勅,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글)을 맞이하는 의식과 배표(拜表, wh선시대 임금이 중국의 외교문서를 받는 일)할 때나, 본국 사신이 칙(勅, 임금의 문서)을 가지고 온 것을 맞이하는 의장(儀仗)에 황양산(黃陽, 의장으로 쓰는 누런 양산)이 하나, 황룡선(黃龍扇)ㆍ홍룡선(紅龍扇)이 각각 둘, 황개(黃蓋)가 둘, 금은횡조(金銀橫爪)ㆍ금은입조(金銀立爪)ㆍ금은부월(큰도끼와 작은도끼)ㆍ금은장도(金銀粧刀)가 각각 하나, 영자기(令字旗)가 둘, 전도 황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연산군일기 연산 11년(1505년) 5월 8일 기록에 보면 어필을 내려 뇌부(雷斧) 40, 뇌창(雷槍) 40을 서울과 시골에서 널리 찾아 바치라.라 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뇌부는 구리와 쇠로 만든 벼락도끼, 뇌설은 돌로 만든 벼락도끼를 이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돌도끼를 벼락도끼라고 불렀습니다. 벼락도끼는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뇌신의 도끼로,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신묘한 약효를 가진 만병통치약이라고 여겨 임금님께 진상품으로 올리기도 했지요. ▲ 옛 시람들이 우레의 신이 쓰던 벼락도끼로 생각한 간석기(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하지만 점차 성리학이 자리 잡으면서 벼락도끼를 신의 물건이 아닌 자연적인 기(氣)가 뭉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20세기 초 서구의 고고학이 들어오면서 벼락도끼를 천지조화의 산물이나 자연물이 아닌, 사람이 만든 인공물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는 찍개, 격지 같은 구석기시대 뗀석기와 돌도끼, 돌끌, 홈자귀 등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간석기를 문화유물로 생각하여 수집하기 시작했지요.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