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기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에 가면 천연기념물 제414호 화성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華城 古井里 恐龍알化石 産地)가 있습니다. 이곳 공룡알화석 산지는 중생대 백악기 약 8,300만8,5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퇴적층으로 시화호 간석지가 생기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67개 지점에서 공룡알화석과 함께 알둥지가 발견되었지요.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거의가 중국과 몽고 땅이었으나 시화호처럼 많은 공룡알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뭅니다. ▲ 화성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의 둥지에서 분리된 주발 모양의 공룡알 화석, 문화재청 제공 시화호 화석지에는 가로세로 5060㎝ 크기의 둥지 20여 개에서 둥지마다 56개, 많게는 12개나 되는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공룡알 화석은 보통 주먹 크기보다 작은 타원형으로 지름 1114㎝나 되며, 지금까지 모두 180여 개가 발견되었지요. 현재 뻘로 덮여있는 곳에서도 뻘을 걷어내면 더 많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공룡알 화석이 여러 퇴적층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화호 일대가 약 1억 년 전 공룡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전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 또는 풍어를 빌기 위해 마을마다 굿을 했습니다. 그런 마을굿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 제82-1호 동해안별신굿(東海岸別神굿)은 부산 동래로부터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동해안지역 일대에서 마을의 평화와 안녕, 풍요와 다산, 배를 타는 선원들의 무사와 풍어를 빌기 위해 지냈던 큰굿을 이릅니다. 풍어제, 풍어굿, 골매기당제라고도 하는 동해안 별신굿은 해마다 지내는 동제와는 달리 특별하게 몇 년 터울로 벌어지는 별제(別祭)입니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82-1호 동해안별신굿(東海岸別神굿) 모습(문화재청 제공) 이 지역에는 마을마다 골매기당이라는 마을 수호신을 모신 당(堂)이 있습니다. 특히 이 별신굿은 내륙지방의 마을굿과는 달리 집안 대대로 굿을 해 온 이 지역의 세습무당이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별신굿을 하는 마을은 잔치분위기로 들뜨고, 굿청은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노는 놀이판이 되지요. 굿이 진행되는 도중 노름굿이라고 하여 마을 청년들과 무녀들이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굿거리도 들어갑니다. 또 심청, 당금아기 같은 서사무가는 보는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중도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곡우(穀雨), 봄비가 내려 백 가지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날이다. 그래서 이 무렵 농가에서는 못자리할 준비로 볍씨를 담근다. 또 곡우 무렵부터는 찻잎을 따서 덖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즈음 언론들은 이를 취재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이 죄다 녹차라며 보성 차밭만 취재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녹차는 우리 고유의 전통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여러 차 관련 문헌을 봐도 차(茶)라고만 나오지 녹차(綠茶)는 없다. 그 까닭은 우리 전통차가 녹차와는 다를뿐더러 예전부터 그냥 차라고만 했기 때문이다. ▲ (그림 뉴스툰 제공) 2천 년 전통차와 일본 역수입 녹차 전통차와 녹차는 우선 품종이 다르고 가공 방법이 다르며, 우려내면 빛깔이 다르다. 먼저 전통차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야생으로 맥이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가공방법은 솥에 열을 가하면서 비비듯 하는 덖음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차를 우려내면 빛깔은 다갈색을 띈다. 그러나 우리 차나무가 일본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토착화 과정을 거치며 녹차가 되었다. 가공방법은 찐차(증제차)이고 차를 우
[신한국문회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여섯째. 봄의 마지막 절기로, 곡우(穀雨)입니다. 곡우란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한다 하여 붙여진 말이지요. 그래서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 같은 속담이 전합니다. 옛날에는 곡우 무렵에 못자리할 준비로 볍씨를 담그는데 볍씨를 담은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둡니다. 밖에 나가 부정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잡 앞에 와서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다음에 집안에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볍씨를 볼 수 없게 하였지요.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이날은 부부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데 땅의 신이 질투하여 쭉정이 농사를 짓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부부 잠자리도 피하는 날 곡우(穀雨)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곡우 무렵엔 나무에 물이 많이 오릅니다. 곡우물은 주로 산 다래, 자작나무, 박달나무 등에 상처 내서 흘러내리는 수액이지요. 몸에 좋다고 해서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에서는 깊은 산 속으로 곡우물을 마시러 가는 풍속이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林華香不斷 숲 속에는 향기가 끊이지 않고 庭草綠新滋 뜰 풀은 새롭게 푸르름이 더해지지만 物外春長在 보이는 것 밖에 언제나 있는 봄은 惟應靜者知 오직 고요한 사람이라야 알 수가 있지 ▲ 보이는 것 밖에 언제나 있는 봄은 있나니(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위는 조선후기 때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사가시인(四家詩人) 가운데 한 사람인 척재(惕齋)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한시 “봄이 머무는 마을”입니다. 지금 숲은 온갖 꽃들이 흐드러져 한 폭의 수채화인 듯합니다. 꽃보라 속에서 꽃멀미도 한창일 때고요. 그러나 척재는 보이는 것 밖에 언제나 있는 봄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그 봄은 오직 고요한 사람이라야 알 수가 있다고 하지요. 그 봄을 만나기 위하여 스스로 고요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척재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외로움 탓에 벼슬보다는 숨어서 살기를 즐겼습니다. 더구나 아들이 없이 늙어가고 벼슬 한 일을 평생의 애석한 일로 여겼다고 하지요. 척재의 시는 그의 개인적 성향 탓에 부드럽고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은 물론 사색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농촌의 수공예품으로 멀리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수출되는 수량이 날로 늘어 지금 조선 부업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완초(莞草, 왕골) 슬리퍼는 대대적으로 성가가 높아져 그 생산량도 날로 성황이라고 한다. 더구나 작년 수해가 극심한 지방은 완초 생산이 가능한 지방의 이재민을 구제하는 부업으로 장려하게 되어 달성, 고령, 칠곡 세 고을이 완초 슬리퍼 왕국이 되었다. 이는 1935년 1월 13일치 동아일보에 나온 산더미 같은 완초 슬리퍼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완초란 우리말로 왕골로 이 무렵만 해도 왕골제품은 돗자리, 방석, 바구니 따위 다양한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어 썼으며 슬리퍼 곧 실내화 같은 물건을 만들어 수출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우리나라에도 왕골대신 플라스틱이 등장하여 왕골 제품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왕골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을 일컬어 완초장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103호로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사는 이상재 선생이 지정되어 그 전통의 맥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왕골은 논 또는 습지에서 자라는 1~2년생 풀로 키는 60200㎝에 이르며 완초, 용수초, 현완, 석룡초라고도 부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는 목장하면 스위스 알프스 목장이나 미국 서부 목장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서양 목장만큼 넓은 형태는 아니지만 조선시대에 소나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에 목장을 그려 넣고 소와 말, 그리고 목자(牧子)의 통계와 목장의 넓이 따위를 적어놓은 목장에 관한 지도책이 전해집니다. 1663년(현종 4) 허목(許穆)이 지은 보물 제1595-1호 《목장지도(牧場地圖)》가 그것입니다. 이 책은 전에 있던 지도를 허목이 보완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부본(보물 제1595-2호)이 부산대학교도서관에 있습니다. ▲ 보물 제1595-1호 《목장지도(牧場地圖)》, 국립중앙박물관 《목장지도》 후서(後序)를 보면, 1635년(인조 13) 장유가 당시 사복시정(司僕寺正, 사복시-司僕寺 - 말 관리나 마구, 수레 따위를 관리하는 관청의 정삼품으로 사복시의 으뜸 벼슬)으로 있을 때 《목장지도》를 지어 올린 적이 있다고 되어 있지요. 또한 효종 때 사복시제조 정태화(鄭太和)가 정비하여 베꼈고, 이것을 허목이 다시 정비했다는 내력이 소상히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밀양에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비(表忠碑)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1742년 10월 사명대사의 5대손인 남붕선사가 경상북도 경산에서 돌을 가져다가 현재의 자리(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것입니다.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는 380cm, 비 몸체의 높이 275cm, 너비 98cm, 두께 56cm의 큰 비석이지요. 비석의 앞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靈堂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 사적기를 오목새김(음각)했습니다. ▲ 사명, 서산, 기허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삼비(三碑) 표충비의 다른 이름은 삼비(三碑) 또는 사명대사비라고도 부르는데 사명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했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군을 통솔했습니다. 비문에는 표충사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았는데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승병활동을 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 선조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한양행은 한 신문광고에 “숙취完生“라고 광고를 냈습니다. “숙취完生“이란 얼마 전 인기를 끈 만화와 드라마의 ”미생(未生)“과 관련된 말인가요? ”미생(未生)“은 바둑에서 두 집이 나지 않아 완전히 살아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또 드라마에서의 의미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완전하게 살지는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完生“이란 말의 의미는 완전히 살아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광고에선 숙취에서 완전히 살아날 수 있음을 말하는듯 한데 꼭 이렇게 한자를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지 한심합니다. 한자말을 함부로 쓰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 말글살이에선 굳이 한자를 쓴다면 한글을 먼저 쓰고 괄호 안에 한자를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발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한국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올 때 만주옷 마괘를 입고 왔는데 이 마괘가 변형되어 마고자가 되었습니다. 이 흥선대원군이 입던 자적 단령 (紫赤 團領)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어 현재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요. 단령은 조선 말기까지 모든 관원이 평소 집무복으로 입던 평상복입니다. ▲ 중요민속문화재 제214호 흥선대원군 자적 단령 (紫赤 團領),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보통 관원의 평상복은 단령과 함께 사모(紗帽,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와 띠[帶], 화(靴, 목이 긴 신)로 구성되지요. 이 흥선대원군의 단령은 겉감은 자주색으로 둥근 깃이고, 안감은 붉은색으로 곧은 깃이며, 넓은 동정이 달려있습니다. 소매가 넓고 고름은 붉은색과 자주색을 쌍으로 겹쳐 달아서 모두 4개가 양옆에 달려있지요. 단령의 가슴부분에는 기린흉배가 달렸는데, 기린무늬는 그의 지위가 대군임을 표시해 줍니다.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장(儀章)조에서 기린흉배는 대군이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흉배는 흑색의 공단에 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