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 흔히 표구라고 말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 수입말입니다. 그럼 그 이전엔 뭐라 했을까요?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년) 4월 5일 기록을 보면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백 25장이온데, 삼가 쓰고 장황(裝潢)하여~라고 하여 장황이라고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단종실록》 단종 1년(1453년) 7월 4일 기록에는 일본의 중 도안(道安)이 일본과 유구(琉球) 두 나라의 베낀 지도(地圖) 4벌을 가져왔는데, 장배(粧褙)하여~라고 하여 장배라고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기록에는 장표, 표배, 배첩(褙貼)이라는 말도 쓰였습니다. 그 가운데 간재집(艮齋集)에서는 안감을 대어 풀을 붙이는 것을 속어에 배첩(褙貼)이라 이른다 하였는데 병풍장, 배첩장(褙貼匠)이라는 다른 기록들과 함께 적어도 조선후기에 배첩이 주로 쓰는 말이었지요. 조선의 글과 그림은 종이ㆍ비단 따위를 붙여 미적 가치를 높임과 동시에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서화처리법을 거쳐 족자ㆍ액자ㆍ병풍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배첩의 제작기법은 액자ㆍ병풍ㆍ족자ㆍ장정 그리고 고서화 처리의 다섯 가지지요. 이 가운데 장정(裝幀/裝訂)은 책의 겉장이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16121645)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병자호란(1636)으로 인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뒤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이때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실록에 학질 때문이라고 기록되었지요. 그러나 당시 종친이었던 이세완은 세자의 주검이 검은빛이었다며 독살 가능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더구나 인조는 세자가 죽었는데도 어의의 처벌은 고사하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채 세자의 장례도 간소하게 치러 의심을 받고 있지요. 여기서 아버지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까지 한 데는 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인조의 소심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조선과 청을 이어주는 외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했음은 물론 병자호란 당시 노예로 끌려온 조선 백성들의 구해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등 큰 활동을 했습니다. 더구나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부터 소현세자가 인조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세자가 청의 고위 관료들과 친하게 지낸 탓에 청나라가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라고 할까봐 불안해했기 때문에 독살했다고 보아왔지요. 그러나 소현세자의 동궁일기 4종 25책을 완역한 서울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사]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들머리에 당(幢)이라는 커다란 깃발을 달아둡니다. 그러나 이 당을 걸어두는 것은 행사를 알릴 때뿐만이 아니라 절의 종파나 문파를 알리는 목적도 있었으며, 또 절에 일이 있을 때 이를 알리기도 하고 모든 액을 물리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합니다. ▲ 공주의 보물 제256호 갑사철당간(甲寺鐵幢竿, 왼쪽), 나주동문밖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 보물 제49호) 당간은 찰간(刹竿)ㆍ장간(長竿)ㆍ정간(旌竿)ㆍ기간(旗竿)ㆍ치간(幟竿)ㆍ번간(幡竿)ㆍ범장(帆檣)이라고도 불렀는데, 주로 나무ㆍ돌ㆍ구리ㆍ쇠 따위로 만들었습니다. 현재 옷감으로 만든 당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당간을 지탱하는 지주(支柱)만이 남아 있지요. 당간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너지거나 깨지거나 부서져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당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 때 것으로 보이는 공주의 보물 제256호 갑사철당간(甲寺鐵幢竿)으로 당간지주와 함께 있으며, 높이는 철당간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 한란은 한라산 남쪽 경사면인 서귀포시 지역 해발 250~600m 사이의 늘푸른나무(상록수림대) 숲속에 분포합니다. 제주 한란은 늘푸른잎을 가진 난과식물로서 잎의 너비가 1.3cm 안팎이고 길이는 40~70cm 정도 되는데, 잎 모양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잎 표면은 윤기가 있고 가장자리는 매끈합니다. 또 하나의 꽃대에는 약 3~10송이가 달리는데 보통 5송이 정도 꽃이 피지요. 그런데 이 한란은 자생분포지나 거기에 자생하는 그루 수가 매우 적은 것도 문제이지만 살아있는 극소수의 어린 나무들마저도 주변 환경의 변화와 무분별한 개발, 그리고 마구 베어짐으로 인하여 점차 사라져만 가고 있습니다. 제주 한란은 워낙 희귀해서 꽃이 필 때가 와도 자생지에서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기란 안타깝게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반인이 함부로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한 서귀포시 돈네코의 자생지 보호구역 안에서는 해마다 때가 되면 탐스럽게 꽃이 핀 한란들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연유산 한란 (사진작가 이명호 제공) 조선시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瓊苑梨花杜鵑啼 아름다운 뜰에 배꽃은 피고 두견새 우는 밤이어라 滿庭蟾影更凄凄 뜰에 가득 쏟아지는 달빛은 처량하기만 하구나 想思欲夢還無寢 그리운 님 꿈에서나 만나볼까 했지만 잠마저 오지 않고 起倚梅窓聽五鷄 매화 핀 창가에 기대서니 새벽닭 우는 소리만 들리누나 ▲ 매화 핀 창에 기대서니 새벽닭 우는 소리만 들리누나(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 한시는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의 하나인 매창(李梅窓,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 본명은 李香今. 1573-1610)이 지은 "청계(聽鷄)" 곧 '닭울음 소리를 들으며"라는 시입니다. 달빛이 가득 쏟아지는 봄밤 꿈속에서나마 님을 만나보려 했지만 잠은 안 오고 매화 핀 창가에 기대서니 새벽 닭 소리만 처량합니다. 시인 유희경과의 가슴 시린 사랑이 매창의 시 한편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매창은 전북 부안의 명기(名妓)로 한시 70여 수와 시조 1수를 남겼으며 시와 가무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정절의 여인으로 부안 지방에서 400여 년 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지요. 매창은 천민 출신으로 뛰어난 시인이었던 유희경과의 가슴 시린 사랑은 물론 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으로 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 곧 추분점(春分點)에 왔을 때다. 이날은 음양이 서로 반인만큼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다. 음양이 서로 반이라 함은 더함도 덜함도 없는 중용의 세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24절기는 단순히 자연에 농사를 접목한 살림살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세계를 함께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다. 빙실(氷室)의 얼음을 내기 전 현명씨에게 사한제를 지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이날 조정에서 빙실(氷室)의 얼음을 내기 전에 작은 제사로 북방의 신인 현명씨(玄冥氏, 겨울ㆍ북방의 신)에게 사한제(司寒祭)를 올렸다.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빙고에서 얼음을 꺼내기 전 겨울의 신 현명씨에게 사한제를 지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고려사(高麗史)》 길례(吉禮) 소사(小祀) 사한조(司寒條)에 “고려 의종 때 정한 의식으로 사한단(司寒壇)에서 초겨울과 입춘에 얼음을 저장하거나 춘분에 얼음을 꺼낼 때에 제사한다. 신위는 북쪽에 남향으로 설치하고 왕골로 자리를 마련하며 축문판에 ‘고려 임금이 삼가 아무 벼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청북도 진천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 제작사 성종사가 있습니다. 성종사에서는 최대 56톤 규모의 종을 만들 수 있다는데 단일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큽니다. 이 성종사 대표로 53년째 종 하나만을 만들고 있는 장인이 있으니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인 원광식 선생이지요. 이 원광식 선생처럼 쇠를 녹여서 범종이나 각종 기물을 만드는 장인을 주철장(鑄鐵匠)이라고 합니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鑄鐵匠) 원광식 선생(문화재청 제공) 우리나라에서 쇠를 녹여서 각종 기물을 만들기 시작한 때는 대략 기원전 6세기5세기 무렵으로 보이며,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쇠가 생산되고 매매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인류문명 발달에 쇠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에 고대부터 쇠를 이용하여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기술과 장인은 큰 관심사였지요. 또 한반도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면서 절을 짓고 범종을 많이 만들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범종은 정교한 새김은 물론 울림소리가 웅장하여 동양권의 종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지요. 형태는 항아리를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며 고리 구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제 바야흐로 꽃이 흐드러지고 혼례철이 돌아 왔습니다. 우리 전통의 혼례 절차는 혼례를 준비하는 단계, 혼례 당일의 예식, 혼례 예식 뒤의 마무리로 나눌 수 있지요. 그 가운데서 당일 예식은 크게 전안지례, 교배지례, 합근지례가 있습니다. 먼저 초행(醮行)이라고 하여 신랑이 여러 일행들과 말을 타고 신부집으로 갑니다. 이 때 부정을 막기 위해 신부집에 들어설 때 짚불을 넘어가기도 하지요. 이어 신랑이 신부의 혼주에게 기러기를 전하는 전안지례를 합니다. 기러기는 백년해로(百年偕老)를 기원하는 혼례의 성스러운 약속을 상징하지요. 신부집에서는 기러기를 맞이하기 위해 전안상을 차리고, 신랑은 전안상에 기러기를 놓고 공손히 절을 올립니다. 이어 신부의 어머니는 기러기를 치마에 조심스럽게 안고, 기러기를 신부방에 던지며, 이를 통해 아들을 낳을지 딸을 낳을지를 점치기도 하는데 기러기가 똑바로 놓이면 아들입니다. 혼례에 기러기를 쓰는 것은 기러기가 암컷과 수컷이 일부일처제를 이루며, 심지어 상대가 죽어도 다시 배우자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 평생도 가운데 혼인식, 국립중앙박물관 전안례가 끝나면 신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북 봉화군 상운면 설매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47호 봉화설매리3겹까치구멍집이 있습니다. 까치구멍집이란 지붕 용마루의 양쪽 합각(지붕 위의 양옆에 ㅅ 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곳)에 둥근 구멍이 있는 집을 이릅니다. 공기를 통하게 하려고 낸 둥근 구멍이 까치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상운면 설매리는 깊은 산속에 숨겨져 있는 산골마을로 예전에는 까치구멍집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경북 봉화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47호 봉화설매리3겹까치구멍집(문화재청 제공) 약 170여 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이 건물은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인데 입구의 봉당(마루를 깔지 않은 흙바닥으로 된 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외양간을 오른쪽에는 부엌을 두었는데 외양간 위에는 다락을 두고 마루에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뒤쪽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랑방과 아랫방을 오른쪽에는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부엌사이에는 작은 바라지창(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바람벽에 내는 자그마한 창)을 달았지요. 반자(방이나 마루의, 종이나 나무로 반반하게 만든 천장)와 지붕틀 사이의 지붕에 까치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궁궐에는 세답방(洗踏房)이란 곳이 있었습니다. 세답방은 옷이나 이불을 빠는 것은 물론 염색 다듬이질 다리미질까지 담당했던 곳을 이릅니다. 곧 궁궐 내 세탁소라고 하면 될 것이지요. 이곳의 궁녀들은 옷감에 따라 어떻게 옷을 다듬어야 하는가에 대해 꿰뚫고 있어야 하고, 무명천일 때와 베옷일 때, 비단일 때 맞는 다리미 온도를 감지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직접 염색까지 했어야 했으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 조선시대 궁궐에서 빨래를 담당했던 세답방(洗踏房)(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궁궐에서 또 특이한 곳으로는 복이처(僕伊處)란 곳이 있었습니다. 복이처는 내전 아궁이 불 때기, 등불 켜기와 그 관리를 하였는데 이를 담당하는 이들은 조라치(照剌赤)라 하여 내시의 몫이었지요. 그런데 일제에 나라를 뺏긴 뒤 내시제가 폐지되자 그 일을 궁녀가 맡게 되었는데 이들을 복이나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밖에 궁궐에는 임금과 왕비가 입는 옷은 물론 이불, 누비보 같은 것들을 바느질하는 침방이 있지요. 또 옷과 이불 그리고 주머니와 병풍에 이르기까지 자수를 담당하던 수방, 임금이 평상시에 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