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황금의 나라 신라에는 많은 황금 유물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가운데 경주 황남대총의 금그릇은 보기만 해도 눈이 황홀한 보물입니다. 황남대총은 경주 제98호 고분이라고도 부르며, 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는 쌍무덤으로 경주지역에서 가장 큽니다. 이곳은 1973~75년에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발굴조사한 결과 남분을 먼저 만들고 후에 북분을 남분에 잇대어 만들었음이 밝혀졌지요. 남분과 북분 모두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구조이며 5세기 무렵에 만든 것으로 무덤 규모는 남북분을 포함한 전체 길이(남북방향)가 120m, 남북분 각각의 동서길이는 82m로 같고, 높이는 남분이 22.2m, 북분이 23m 정도입니다. 이곳 북분에서 나온 금은제 그릇 일괄(皇南大塚北墳 金銀器一括)은 3종류의 그릇류로 은제합은 높이 8㎝, 아가리 지름 10㎝이고, 은제완은 높이 5.5㎝, 아가리 지름 10.5㎝이고, 금제완은 높이 4.5㎝, 아가리 지름 11㎝입니다. ▲ 보물 제628호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뮨화재청) ▲ 보물 제628호 황남대총 북분 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관순 소녀의 위훈(偉勳) 천고에 빛날 순국혼, 금일 천안서 기념비 제막식 이는 1947년 11월 27일 동아일보 기사로 천안에서 유관순 열사의 기념비 제막식을 알리는 기사입니다. 유관순 (1902~1920) 열사 순국 26년 되는 해에 천안에 기념비를 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우내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부모님을 비롯하여 일가친척이 순국의 길을 걸어야 했던 유관순 집안의 비극은 다름 아닌 일제 침략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일본은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 서대문형무소 수형사진 / 유관순(왼쪽)과 어윤희 유관순 열사와 함께 만세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인물로는 어윤희(1881~1961) 독립지사가 있습니다. 3월 1일 개성만세운동을 주도한 어윤희 지사는 유관순과 같은 형무소에 수감해 있으면서 선배로서 관순을 잘 보살폈다고 하지요. 또 한 인물은 오정화(1899~1974) 지사가 있는데 1919년 3월 5일 경기도 고양군 동막상리(東幕上里)에서 펼쳐진 독립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당시 사립 흥영학교 직원 이었던 오정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에서 평생토록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 온 고 정조문(1918~89) 선생은 1925년 일본에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사업에 성공한 분입니다. 선생은 1949년 골동품상이 밀집해 있는 교토 산조(三條) 남쪽 거리를 걷다가 어느 한 가게 진열장에 놓인 둥그런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반해 자그마치 1년 동안 돈을 모았고 마침내 달 항아리를 손에 쥐었는데 이후 선생이 가장 아끼는 문화재였습니다. ▲ 국보 제262호 백자 달항아리(용인대학교 소장) 큰 항아리는 형태를 만들거나 구워내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물레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고,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뒤, 두 부분을 붙여 완성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기에 이 달항아리는 붙인 부분의 이음선이 보이거나 조금 어긋나고 기울어서 좌우의 균형이 비대칭을 이루는 어쩌면 찌그러지고 부자연스럽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언듯 보면 뭔가 잘 못 만든 도자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달항아리는 그러한 특징에도 정조문 선생이 자기 자신의 뿌리 곧 조선의 위대한 정신의 소산이라고 생각했고, 미술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원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는 625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입니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고 원각사라 불렀지요.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베풀었습니다. 여기에 신도 1,820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가운데 120명은 옷을, 1,700명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공양하였고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이 아미타불의 은덕을 입어 극락왕생하였으며,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 6ㆍ25 때 불타지 않고 남은 불이문(왼쪽), 섭바라밀석주 이렇게 컸던 절은 625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당시까지 있었던 절집으로는 대웅전ㆍ관음전ㆍ사성전ㆍ명부전ㆍ산신각ㆍ범종각ㆍ낙서암ㆍ극락전 등 모두 642칸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이때 불타지 않고 남은 것은 불이문이 유일한데 이는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건봉사에는 임진왜란 때 왜구가 통도사에서 가져간 부처님 진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애통하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 가운데 셋째로 큰 윤리인데, 무상하게도 나의 아내는 그동안 나와 함께 어려운 사람 속에서도 동고동락해왔으나 뜻하지 않게 오늘 아침에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가운데 줄임) 그러므로 그 사정을 생각해 용서하고 엽전 35냥을 받고서 우리의 혼인관계를 파하고 위 댁(宅)으로 보낸다. 만일 뒷날 말썽이 일어나거든 이 수기를 가지고 증빙 할 일이다. ▲ 엽전 35냥에 이혼을 허락하는 문헌(전주대학교 박물관) 위 내용은 조선후기에 한 평민의 것으로 보이는 이혼 사실 기록 문서입니다. 평민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수기의 끝에 한글로 이름을 쓰고 수결이 아닌 손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지요. 일제강점기 때부터는 모두가 도장을 찍었지만 그 이전엔 양반은 사인(sign)의 하나인 수결(手決)을, 평민이나 노비는 손이나 손마디를 그린 점으로 알 수 있습니다. 손을 그리는 것은 수장(手掌), 손마디를 그리는 것은 수촌(手寸)이라 했지요. 이 수기를 보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35냥을 받고 아내가 위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24일 늦은 2시부터 서울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는 한겨레신문사(대표이사 정영무) 주최, 한겨레말글연구소(소장 박창식) 주관으로 정치적 올바름과 언어의 문제란 주제를 가지고 제11차 연구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회에는 한겨레말글연구소 박창식 소장의 경과보고에 이어 한겨레신문사 정영무 대표이사의 인사말과 한글학회 김종택 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김종택 회장은 축사에서 보통 국어학회 발표장에서는 나오지 않는 귀중한 발표들이 있어 나는 한겨레말글연구소의 발표회는 기꺼이 참석한다. 그리고 발표 자료는 절대 버리지 않고 귀하게 보관하는데 이는 이 발표회가 내게도 좋은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한겨레말글연구소 발표회에서 경과보고를 하는 박창식 소장, 인사말을 하는 한겨레신문사 정영무 대표이사, 축사를 하는 한글학회 김종택 회장(왼쪽부터) 발표회는 1부 정치적 올바름과 언어의 문제, 2부 우리 언어를 풍부하게 사용하기 위한 사전의 구실로 나눠서 가졌다. 먼저 한겨레말글연구소 박창식 소장의 사회로 열린 1부에서는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김하수 교수의 정치적 올바름과 언어의 문제 개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위도 띠뱃놀이는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벌어지는 마을굿의 하나로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대리(大里)마을에 전승되는 놀이입니다.(중요무형문화재 제82-3호) 정월 초사흗날 어민들이 풍어와 마을의 평안 등을 기원하는 마을 공동제사지요. 원당에서는 열두 서낭을 모시고 있는데 선주들은 이 열두 서낭 가운데 한 분을 내림받아 뱃기에 모시고 내려가 한 해 동안 자기 배의 뱃신으로 섬깁니다. ▲ 위도 띠뱃놀이의 띠배(문화재청 제공) 당굿의 진행순서는 먼저 성주굿으로 시작하여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 1(원당본당서낭), 서낭굿 2(애기씨서낭), 서낭굿 3(장군서낭), 깃굿, 문지기굿 따위를 하게 됩니다. 이어서 뱃기를 든 선주들이 행렬을 이루어 마을 뒤쪽을 한 바퀴 돌아오는 주산돌기를 하며 그동안 마을 앞 바닷가에서는 띠풀과 짚, 싸리나무 따위를 함께 엮어 길이 3m, 너비 2m 정도의 띠배를 만들어놓지요. 띠배 안에는 떡ㆍ밥ㆍ고기ㆍ나물ㆍ과일 따위를 넣어놓고 허수아비도 만들어 세웁니다. 그리고 작은 판자 쪽에 소속 : 대리 띠배. 유자망ㆍ낭자망. 대풍어 용왕님 귀하라고 써 붙여놓습니다. 띠배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원래 함경도 원산의 특산물이었던 살이 노란 명태는 황태로 노랑태라고도 합니다. 겨울이면 원산 앞바다에서 명태가 많이 잡혔고 명태가 많이 나는 지역에서는 다들 명태 말리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냥 말린 명태는 바짝 말라 바로 북어가 되지요. 하지만 원산에서는 12월 중순에서 덕장에 걸어 밤이면 섭씨 영하 20도 아래의 추운 날씨에 꽁꽁 얼었다가 낮에는 햇볕을 받아 살짝 녹으면서 물기를 증발시켜 독특한 북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북어는 몸이 두툼한 채로 유지 되면서 살이 노랗게 변했기에 황태라는 이름을 얻었구요. ▲ 인제군 용대리 황태덕장에서 황태를 말리는 모습 한국전쟁 이후 강원도로 내려온 원산 사람들이 이 황태를 재현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제군 용대리 근처입니다. 그런데 황태를 만들려면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겨울 날씨인 삼한사온이 반복되는 게 가장 좋지만 요즘 우리나라 날씨는 삼한사온을 잊은 지 오랩니다. 더구나 겨울이 따뜻하면 황태가 바싹 마르고 검은빛을 띠어 하품이 되지요. 그래서 용대리 사람들은 황태 말리는 일을 하늘과 사람이 7 대 3제로 하는 동업이라고 말합니다. 더 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다. 구름 타고 천천히 운명을 항해하는 저 보름달을 본다. 뒷동산에 올라 너그럽고 따뜻한 달빛에 온몸을 맡긴 채 지난 어린 추억을 더듬는다. 오늘은 우리 명절의 하나 정월대보름(음력 1월 15일)이다. 정월 대보름의 달은 한해 가운데 달의 크기가 가장 크다고 한다. 가장 작은 때에 비해 무려 14%나 커 보인다는데 그것은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기 때문이란다. 조선 후기에 펴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라고 적혀 있다. ▲ 정월대보름 달맞이, 맨 먼저 본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우리나라는 농사를 기본으로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였다. 또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해를 '양(陽)'이라 하여 남성으로 인격화하고, 달은 '음(陰)'이라 하여 여성으로 본다.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 보면, 달-여신-땅으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 출산하는 힘을 가진다. 이와 같은 우리 문화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우리 명절의 하나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엔 재미있는 풍속들이 있지요. 특히 용알뜨기는 새벽 첫닭이 울 때 부인들이 우물이나 샘에서 물을 길어오던 풍속으로 가장 먼저 용알을 뜨면 그해 운수가 대통한다고 하고, 이 물로 밥을 해 먹으면 무병장수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습니다. 지역에 따라 용물뜨기, 용알줍기, 새알뜨기, 복물뜨기, 수복수(壽福水)뜨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 정월대보름 세시풍속 새벽 맨먼저 우물에서 용알뜨기,(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마을 각시들 초록명주 차림새로 / 담장 밖에 모여서 소곤거리는 말 동이 끼고 패 지어 냇물에 가서 / 용의 알 남실남실 떠 이고 오네. 위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인인 김려(1766~1822)가 정월대보름의 다양한 풍속을 노래한 상원리곡(上元俚曲) 25수 가운데에서 용알뜨기의 모습을 읊은 시입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를 가지고 서로 알을 다투어 정화수(井華水)를 길어 온다. 이것을 노룡란(撈龍卵)이라고 한다. 맨 먼저 긷는 사람이 그해의 농사를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