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는 1578년(선조 11) 율곡 이이가 황해도 해주의 석담에 은거할 때 수양산에 들어가 풍경을 노래한 것입니다. 서곡(序曲) 1수를 비롯하여 제1곡 관암, 제2곡 화암, 제3곡 취병, 제4곡 송애, 제5곡 은병, 제6곡 조협, 제7곡 풍암, 제8곡 금탄, 제9곡 문산 따위로 나누어 각각의 경치와 흥을 읊은 노래지요. 이 노래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서 지었다고 하나 시상과 미의식면에서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율곡의 고산구곡가는 조선 후기에 여러 화가들이 그림과 시를 적어 12폭 병풍으로 만들었는데 국보 제237호인 고산구곡시화도(高山九曲詩畵圖)가 그것입니다. 그림은 김홍도와 김득신 등의 도화서 화원과 문인화가들이 맡았는데 이들은 율곡이 은거하던 황해도 고산의 아홉 경치를 가보지 않고 1803년 7월과 9월에 걸쳐 그려 모아 표구한 것이지요. 병풍에는 그림마다 율곡이 동자를 데리고 노니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각 경관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그려져 있는 게 특징입니다. 고산구곡시화도 병풍은 세로 1.38m, 가로 5.62m로 바탕에 수묵과 엷은 채색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고풍(古風), 선풍(仙風) 그 고졸(古拙)한 아름다움 우리춤 이란다. 말 그대로 기교 대신 예스럽고 소박한 멋의 춤을 춘다고 소책자에서 공언해 놓았다. 그동안 우리춤은 전통의 멋보다는 교태와 기교가 판친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이동안류 춤만은 교태와 기교는 쏙 빼고 정중동의 멋만 살린다는 선언인 것이다. ▲ 흰 치마저고리에 검정 장삼을 흩날리며 승무를 추는 이승희 선생 어제 12월 27일 늦은 5시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KOUS)에서는 이동안류 전통춤을 올곧게 전승하는 이승희 선생의 전통춤 공연이 열렸다. 운현궁 한덕택 예술감독의 사회로 열린 공연에는 2층까지 자리가 메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한덕택 감독은 그동안 봐왔던 다른 류의 춤들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무엇이 다른 지는 관객 여러분이 직접 확인 해봐도 좋을 일이다.라고 무대를 여는 말을 했다.맨 먼저 시작은 이진성, 최순희, 김문정, 권혜연, 정하나의 기본무다. 춤의 시작 기본무를 넘지 못하면 다른 춤을 출 수 없다는 것으로 아주 담백한 춤을 춘다. 이어서 최순희, 김문정의 살풀이춤이다. 살풀이춤은 여러 유파를 통해 많이 소개된 춤이라 관객은 익숙한 자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輪圖匠)은 24방위를 원으로 그려 넣은 풍수 지남침(指南針)을 제작하는 장인입니다. 윤도는 남북방향을 가리키는 자석바늘을 이용하여 지관이 집터 또는 묘자리를 정할 때나 천문과 여행분야에서 사용되는 필수도구지요. 지관이나 여행객들이 늘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하여 패철(佩鐵)이라고도 했으며, 자침이 남쪽을 가리킨다 하여 지남철(地南鐵)이라 하고, 나침반, 지남반이라고도 합니다. ▲ 나침반(羅針盤), 육군박물관 소장 지남침의 원리는 중국에서 이미 한나라 때에 실용화되어 점을 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풍수지남침이 신라 후기부터 발달하였고, 고려 전기에는 풍수음양지리와 연결되어 땅의 형세를 보는 풍수가나 지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로 쓰였지요. 조선시대부터는 풍수가들 뿐 아니라 여행자들도 썼으며, 특히 천문학자들에게는 휴대용 해시계에 정확한 남북을 가리키는 자오선을 정하는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윤도는 중심의 지남침을 둘러싸고 24방위를 기본으로 하는 방위명들로 구성되어 있지요. 또 그 안에는 음양오행은 물론 팔괘와 십간십이지가 들어 있습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輪圖匠) 보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안평대군 별장자리 무계원 사랑방에서 “풍류산방” 그 마지막 마당이 12월 26일 늦은 4시에 펼쳐졌다. 이날 먼저 열린 것은 전국국악대전 기악현악 최우수상을 받은 이민영의 가야금 무대다. 해설은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교수의 맛깔스러운 이야기 시작되었다. 이날은 직접 가야금을 들고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초등학생에게 가야금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여 신라 진흥왕 때 우륵 이야기를 들려주어관객과의 분위기를편안하게 해준다.그리고 이어서 가야금 연주의 어려움을 설명하며 가야금 연주는 들어보면 몇년 공부한 것인지 알게 된다며 이민영 연주자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 가야금을 들고 가야금이란 악기와 가야금 음악에 대해 친근하게 설명해주는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 ▲ 백인영류 가야금산조를 하는 이민영 ▲ 청중들 가운데 맨 앞에는 할머니와 함께 온 한 초등학생이 열심히 감상하고 있다. 바로 눈 앞에서 연주자의 숨소리 하나까지 들리는 가운데 듣는 가야금 소리는 우륵이 탄금대에서 탔던 소리처럼 들렸다.서한범 교수는20여년간 가야금 공부를 한이민영 연주자의 깊이 있는 가야금 연주와 더불어가야금 타는 자태의 고운 모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엊그제 동지를 지내고 우리는 엄동설한을 견뎌야 합니다. 지금이야 난방도 잘되는 집과 오리털 점퍼도 있지만, 예전엔 문풍지가 사납게 우는 방에서 오들오들 떠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엄동설한을 견뎠을까요? 먼저 동지부터 입춘까지 물리적인 난방이 어려운 대신 한 가닥 꿈을 꾸면서 구구소한도를 그려나갔습니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에서 구구(九九)란 9×9=81, 곧 여든한 개의 매화 꽃송이로 소한(消寒) 곧 추위를 잊어서 삭여 내는 걸 말하지요. 동짓날 창호지에 하얀 매화꽃 81송이를 그려 벽에 미리 붙여 놓고 매일 하루에 한 송이씩 차례대로 빨갛게 색칠을 해나갔습니다. 빨갛게 칠해가는 방법을 보면 흐린 날은 매화 위쪽을, 맑은 날은 아래쪽을, 바람 부는 날에는 왼쪽을, 비가 오는 날에는 오른쪽을, 눈이 오는 날에는 한가운데를 칠했지요. 하루 한 송이씩 하얀 매화 그림 위에 색을 칠할 때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꽃송이를 완성시킨 것입니다. ▲ 모두 81 송이 홍매화가 피면 봄이 온다는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옛 사람들은 “아홉 번째 아홉 날이 지나면 농사짓는 소가 밭을 갈기 시작한다네.”라고 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청백리였던 조선 중기 문인 설봉(雪峯) 강백년(姜栢年,1603~1681년)은 1628년(인조 6년) 1월에 종4품 조봉대부로 승품한다.는 교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지 뒷면에 보면 이리(吏吏) 심기(沈麒)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지요. 여기서 '이리'는 조선시대 인사를 담당했던 이조의 맨 아랫자리에서 실무를 보는 아전을 말하고 '심기'는 그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내리는 문서에 감히 말단 서리의 이름이 낙서처럼 쓰인 까닭이 무엇일까요? ▲ 1628년(인조 6년)에 내린 강백년(姜栢年)의 승품 교지(왼쪽), 아전 심기(沈麒)의 이름이 쓰여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전경목 교수 제공) 조선시대의 벼슬아치들이 윗자리로 오르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평생 미관말직에 머무르다 생을 마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벼슬이 오르려면 능력도 중요하지만 로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인맥도 없는 지방의 미관말직 벼슬아치들은 로비하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요. 그래서 이들은 이조나 병조의 서리들에게 줄을 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정해진 녹봉이 없었던 서리들은 이들에게서 수수료를 챙기는 대신 인사와 관련된 각종 자문은 물론 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김명규(金明圭)로 말하면 지난번 농상공부(農商工部)의 벼슬에 임명되었던 날에 이미 폐지한 보부상(褓負商)을 제 마음대로 인가하여 규정을 문란케 했으며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심지어 대궐문 가까이에서 백성들을 때려 다치게 함으로써 위로는 임금에게 근심을 끼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울분을 격동시킨 결과 오늘에 와서도 서울 안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김명규가 미연에 화근을 방지하지 못한 죄입니다. 이는 《고종실록》 38권 (1898) 12월 6일 기사로 보부상의 폐해를 들어 고영근 등이 보부상을 없애 버리자고 올린 상소 가운데 한 토막입니다. 지금처럼 집 가까이에 대형 마트나 편의점 따위가 흔치 않던 시절 다양한 물건을 팔러 다니던 보부상이야말로 서민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상소까지 올리는 걸 보면 더러는 적지 않은 폐해도 있었나 봅니다. 이러한 보부상에 관한 책이 있는데 울산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 《경상남도 울산군 우지회 천금록(慶尙南道 蔚山郡 右支會 千金錄)》이 그것입니다. ▲ 울산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 《경상남도 울산군 우지회 천금록(慶尙南道 蔚山郡 右支會 千金錄)》 이 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전통 춤의 소박하고 정결한 아름다움을 담은 이승희 명무의 전통춤 공연이 12월 27일 늦은 5시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서울문화재단 후원으로 열린다. 7번째인 이승희 전통춤 공연은 고 운학(雲鶴) 이동안(李東安) 선생의 서울경기류 원형의 춤맥을 이은 승무, 태평무, 신칼대신무, 살풀이춤, 검무, 아리랑춤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 살풀이춤을 추는 이승희 명무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 속에서 인간의 참모습과 참뜻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학문과 예술이 발달하였고, 한국 춤 또한 자연의 기운에 따라 심신을 수련하듯 유려한 춤사위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춤이 점점 가벼워지고 교태와 기교 위주로 변하여 전통의 고고한 아름다움보다 현대적인 것만을 추구하면서 참 전통예술이 더욱 소중해지고 있다. 이번 공연은 내면 깊이에서 우러나는 기운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우리 전통 춤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고 이동안 선생은 재인청 계열의 춤을 비롯한 다양한 기예들을 보유하고, 평생 외길로 전통춤을 전승해오다 세상을 떴다. 이승희 명무는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두째 이며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동지(冬至)입니다. 이날부터 해가 길어지기 때문에 해가 부활한다는 의미로 설 다음 가는 날이라 하여 “작은 설” 또는 “아세(亞歲)”라 하였습니다. 특히 이날은 팥죽을 만들어 사당에 올려 동지고사(冬至告祀)를 지내고, 귀신을 쫓기 위하여 각 방과 장독, 헛간 같은 집안의 여러 곳에 놓아두거나 벽 따위에 뿌린 다음 식은 뒤 식구들이 모여서 먹지요. 이것은 팥의 붉은색이 양색(陽色)이어서 음귀를 쫓는다고 본 것으로 정월대보름의 오곡밥, 아들을 낳았을 때와 간장독에 두르는 금줄의 붉은 고추, 중양절의 산수유 열매를 머리에 꽂는 것도 역시 같은 믿음입니다. 동지의 다른 세시풍속에는 부채를 선물하는 단오와 함께 하는 “하선동력(夏扇冬曆)”이란 풍속도 있었습니다. 단오는 다가오는 더위를 잘 견디라는 의미로 부채를, 동지에는 새해를 잘 계획하라는 의미로 달력을 선물했던 것이지요. 또 동지에는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에게 버선을 지어 선물하는 “동지헌말(冬至獻襪)”이란 아름다운 풍속도 있었습니다. 이날 새 버선을 신고 길어지는 해그림자를 밝으면 수명이 길어진다고도 믿었지요.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금 22일 은 동지.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날. 이 날은 팥죽(동지죽)을 끓여 조상에 바치는 한편 집안의 잡귀를 쫓는 날이기도 한데... 동지가 지나면 이해도 거의 보내는 김이 된다는 예로부터의 관념이 있기는 하나 올해는 평년보다 일찍든 애동지이기에 음력의 丁유년은 아직도 두 달이나 남아 있는 셈. 어느덧 연말로 박두해오자 거리에는 토정비결로 새해의 신수를 가려보는 이도 한두 사람씩 눈에 띄우기 시작하고... 동아일보 1957년 12월 22일 기사입니다. 올해도 내일로 벌써 동지가 다가왔습니다. 동지(冬至)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한순에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올해 동지는 1957년과 달리 음력 11월 12일로 중순에 들어서 중동지입니다. 중동지, 노동지는 팥죽을 쑤어 먹고, 애동지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하여 팥죽 대신 떡을 해먹었지요. ▲ 아산의 토정 이지함 동상(왼쪽), 원본토정비결(삼척시립박물관) 그리고 지금은 거의 잊힌 풍속이지만 예전엔 위 동아일보 기사처럼 이때쯤이면 《토정비결(土亭秘訣)》로 새해의 신수를 봤었지요.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1517~1578)은 가난한 백성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