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황금빛 탈을 쓴 그 사람 방울 채찍 손에 들고 귀신 부리네. 빨리 뛰다가 천천히 걸으며 추는 춤은 봉황이 너울너울 나는 듯 하구나." 9세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대면(代面)>이라는 시입니다. 특정한 인물이나 동물을 형상화한 탈 곧 가면을 쓰고 나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전통연극을 우리는 “탈놀이”, “탈춤”, “탈놀음”이라고 부르는데 처용무, 북청사자놀음, 은율탈춤, 오광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 따위의 탈놀이들이 있습니다. 위 최치원의 시로 미루어 보면 이미 신라시대에 탈놀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 신석기시대 유적인 부산 동삼동에서 나온 조개탈과 강원도 양구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탈이 있고, 4세기 중반의 고구려 안악 3호 무덤 벽화에도 탈춤 추는 사람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탈놀이의 역사는 무척이나 오래된 듯합니다. 특히 신라시대의 처용무는 고려와 조선시대는 물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장수 탈놀이지요. ▲ 퇴계원산대놀이에서 왜장녀의 익살스러운 모습 다만 처용무처럼 오래 전의 탈놀이는 주로 귀신을 쫓기 위한 것이었지만 조선시대 이후 전승된 탈놀이들은 안동대 임재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30년대 초, 골동상 장형수는 친일매국노라 불리는 송병준의 집 근처를 지나다가 나라를 팔아 얼마나 잘 사는가 보자고 그 집을 구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사랑채 옆에 있는 변소에 가다가 그 집 머슴이 사랑채 아궁이에 군불을 때는 것을 보았는데 이때 아궁이에 넣으려는 초록색 비단으로 꾸민 책 한권이 눈에 띕니다. 그래서 그 책을 뒤져보니까 겸재 정선의 화첩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송병준의 손자로부터 이 화첩을 사서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넘기게 됩니다. 이렇게 간송미술관의 수장품이 된 “바다와 산의 초상화”라는 뜻의 이 해악전신첩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년)이 금강산을 여행하며 그린 것으로 그림 21점과 각각의 그림에 붙인 화제(畵題, 그림 위에 쓰는 시와 글) 21점으로 이뤄졌는데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다”라는 뜻의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같은 뛰어난 작품이 들어 있습니다. ▲ 겸재 정선(謙齋 鄭敾)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가운데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왼쪽)과 "문암(門岩) 하마터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갈 뻔 한 이 해악전신첩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줄 운명이기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추사 김정희를 50년 동안 스승으로 모시고 추사체 글씨와 그림을 배웠던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은 중인 출신의 화원이었습니다. 빼어난 그림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로 알려진 화원 조희룡은 벼루를 극진히 사랑했던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신의 서재 이름도 ‘백 두 개의 벼루가 있는 시골집’이란 뜻으로 “백이연전전려(百二硯田田廬)”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벼루를 좋아했던 것은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차가워지는 염량세태(炎凉世態) 속에서 벼루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며, 벼루는 군자를 가깝게 하지만 소인을 멀리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아끼던 벼루도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왔을 때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홍매도(紅梅圖) 하지만 그의 눈앞에 벼루가 남아 있지 않았어도 매화를 잘 그렸던 그는 매화가 활짝 필 때면 그토록 아끼던 벼루를 꺼내 여전히 먹을 갈았지요. 평생 가슴속에 담아둔 벼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눈엔 보이지 않지만 가슴속엔 늘 남아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우리에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안의 명물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호두과자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호두과자 속에는 호두가 한 조각 들어있기 마련인데 고소하게 씹히는 호두맛은 달콤한 팥소와 함께 호두과자의 이름값을 톡톡히 해주고 있지요. 호두과자 속 재료인 호두는 원래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는 충남 천안시 광덕사에 있는 호두나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된 광덕사 호두나무는 나이가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8.2m로, 지상 60㎝의 높이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 있습니다. ▲ 400살 된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문화재청 제공) 이 호두나무 앞에는 나무의 전설과 관련된 유청신 선생 호도나무 시식지란 빗돌이 세워져 있지요. 전설에 따르면 약 700년 전인 고려 충렬왕 16년(1290) 9월에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호두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어린 나무는 광덕사의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광덕사 호두나무는 400년으로 추정 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가 아닌 훨씬 후대에 심은 나무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중외일보 1927년 7월
[우리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버리고 버려도 / 비워도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마음/ 시작인가 싶으면 / 또 하나의 시작/ 어찌하려는가/ 저 꼿꼿한 노승의 잰 걸음/ 자박자박 옮겨 놓은 그림자/ 수행의 포상인가/ 유골뿌린 절벽 위에서 바다를 보다. 이는 원산(圓山) 스님의 네 번째 시집 《나는 누구인가?》에 나오는 무심(無心)이라는 제목의 시다. 원산 스님은 그간 《도솔천의 꽃》, 《보이지 않는 바람》 《얼래달래》 등의 시집과 《삼세 인과경》 등 여러 권의 수필집을 낸 중견 시인이자 수필가로 문학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어제 29일 늦은 3시 원산 스님의네 번째 시집 출판 기념회가부천 라펠리체에서 열렸다. ▲ 원산 스님 네번째 시집 이날 《나는 누구인가?》 시집 출판 기념회는 원로 화담 큰 스님의 개식사로 시작되어 원선채 스님의 축원문에 이어 대천스님의 축사로 출판 잔치를 활짝 열었다. 원산 스님의 네 번째 시집을 축하해주기 위해 경향각지에서 온 스님과 한국정신문학 작가, 지인, 신도 등 백여 명이 모여 수행자이자 문학인의 길을 걷고 있는 원산 스님의 시집 출간을 축하 해주었다. ▲ 꽃다발을 받고 활짝 웃음꽃을 핀 원산 스님 시집 출판기념회답게진흥회
[우리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우렁찬 아이 울음소리, 단아한 여인의 다듬이질 소리, 선비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으뜸이라고 한 사람은 고려대 유영대 교수다. 유 교수는 2014년 12월 5일(금) 저녁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에서 열린 유창 명창(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41호 송서율창 예능보유자)의 공연에서 그렇게 운을 떼었다. 송서율창(誦書, 律唱)이란 선비들이 일정한 음률로 한문이나 소설 등을 읽는 행위에 음악적 가락을 붙이고 멋을 넣어 구성진 음악으로 표현한 전통예술이지만 아직 일반인 가운데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송서율창의 대가인 유창 명창은 뛰어난 예술 장르이면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송서율창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 할만한 2015 전국 국악학 학술대회 송서 율창의 확산방안이란 주제의 학술행사가 마련되어 국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 2014년 12월 5일 스승 이은주 명창과 제자 유창 명창의 다정한 민요 한마당 자료사진 2015년 12월 10일(목) 오후 1시 무형문화재전수회관(서울 삼성동)에서는 서한범 한국전통음악회장의 개회사에 이어 유창 명창의 환영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는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고령의 나이에 폭탄의거로 순국의 길을 걸은 분입니다. ▲ 서울역 앞에 세워진 강우규의사 동상 강우규 의사는 지금으로부터 96년 전인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마코토 총독을 향해 힘차게 폭탄을 던집니다. 강 의사는 왜 젊은 사람들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폭탄의거에 뛰어든 것일까요? 강우규 의사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덕천)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강탈당하자 식구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한인촌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을 전개합니다. 31만세운동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즈음 솟대는 하나의 장식으로 세워 놓는 곳이 많지만 예전에 솟대는 마을 수호신의 상징으로 세워두었는데 흔히 마을 어귀에 높다랗게 세운 장대 끝에 나무로 깎은 새를 붙여 두었습니다. 솟대 위에 앉아 있는 새는 기러기나 오리 모양으로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 오리 모양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솟대 위에 오리를 달아 두었을까요? 예전에는 오리가 닭보다 크고 무거운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풍요를 가져오는 새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물을 오가며 잠수까지 하는 생활 모습을 보고, 오리는 지하 세계와 지상 세계를 모두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실제로 대구 달성 지방에서는 오리를 신성하게 여겼는데 이 지방에서 오리의 이미지는 홍수 때 구원의 새, 인간과 신의 매개자, 다산성과 풍년, 천둥새로 물과 비의 지배라는 연구 보고가 있습니다. (김정애 동제에서의 솟대연구) ▲ 솟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강릉 진또배기 (문화재청 제공) 솟대는 만든 이의 솜씨에 따라 그 모양이 천차만별이겠지만 우리나라 솟대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전하는 솟대는 강릉 강문 마을의 솟대입니다. 이 솟대를 이곳 사람들은 진또배기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교 경전의 하나인 《예기(禮記)》 「혼의(昏義)」에 따르면 혼례의 날자가 정해진 뒤 신랑이 신부를 맞이해오는 “친영(親迎)”의 예를 거행합니다. 이 친영의 절차에 “합근례” 곧 신랑과 신부가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예가 있는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주박을 둘로 자른 잔으로 술을 마시고 기를 편안케 하고, 그럼으로써 몸을 합한다(소이합체, 所以合體)”라고 하였지요. 그런데 표주박을 둘로 자른 “합환주(合歡酒)잔”은 아래쪽이 둥글기 때문에 바닥에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합근례 때 합환주잔을 올려놓는 “합환주상(合歡酒床)”이 생겨났지요. 이 상은 대부분 해주반으로, 재료는 피나무, 은행나무를 썼습니다. 합환주상의 모양을 보면 양쪽 판각다리 위에 얹은 상판 면에 지름 6.5cm 안팎의 두 구멍을 나란히 뚫어, 둥근 표주박이 넘어지지 않게 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지요. ▲ 표주박을 잘라 만든 합환주잔과 잔을 올려놓는 합환주상(合歡酒床),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그러나 이 합판주상을 백성들은 쉽게 만들어 쓸 수가 없어서 둥근 표주박 바닥 밑에 종이를 싸서 발라 평평하게 만들어 소반 위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또 구멍이 두 개인 ‘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민공(忠愍公) 금석(琴石) 홍영식(洪英植)은 고종 때 문신으로 병조참판을 하면서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겸임하여 우정국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홍영식은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으로 사흘 만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 등 대부분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박영교(박영효의 형)와 함께 고종을 호위하다가 관군[고종실록 참조-발굴]에 죽임을 당했다 이때 홍영식은 “우리가 대의를 위해 일어섰다가 세 불리하다 하여 모두 떠난다면 누가 상을 호종[扈從]하는가”라고 외쳤다고 한다. ▲ 고종 때 문신 충민공(忠愍公) 금석(琴石) 홍영식(洪英植) 선생 이 홍영식을 추모하는 “방송 정보통신의 과거와 융합의 미래 비전”이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오는 12월 7일(월) 늦은 1시 (사)한국미디어콘텐츠학술연합 주최로 광화문우체국 10층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방송정보통신 통합역사 편찬의 과제”를 주제로 열리는 학술회의에는 먼저 최창섭 서강대 명예교수의 “전파ㆍ방송의 시발과 미디어 콘텐츠 발달사 정리”를 시작으로 김부중 성결대 교수의 “방정통 근대 유물 등재와 역사 문화 기념관 건립 문제”, 서영길 전 국제 경영교육원 원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