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검참판(檢參判) 안경(安璟)의 아들 안관후(安寬厚)안인후(安仁厚)안중후(安重厚)안근후(安謹厚)안돈후(安敦厚)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으니, 청컨대 예(例)에 의하여 어미에게 쌀을 내려 주고, 아비에게 치제(致祭, 나라에서 대신이나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제문-祭文과 제물-祭物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하소서.'라고 예조(禮曹)에서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위는 《세조실록》 6년(1460) 윤11월 29일(신미)의 기록입니다. 아들 다섯을 두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 누리는 복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 하는 일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부모에게 해마다 쌀을 내리고, 돌아가신 부모는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하고 치제한다.는 조항이 있을 정도입니다. ▲ 오자등과(五子登科)가 새겨진 수저집(국립민속박물관-왼쪽), 오자장원(五子壯元)이 새겨진 실패(서울역사박물관) 이렇게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는 오자등과(五子登科)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큰 복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째 절기로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입니다. 눈이 내려 추위가 시작되는 때여서 겨울 채비를 합니다. 그러나 한겨울이 아니어서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므로 소춘(小春)이라고도 하지요. 이때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추워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김장을 하기 위해 서두릅니다. 또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하는데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기도 하며 목화를 따서 손을 보기도 하고, 겨우내 소가 먹을 볏짚을 모아두기도 하지요. ▲ 소설 즈음, 무청을 떼고 무를 구덩이에 묻는 월동준비도 한다.(사진 양인선 기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소설은 손돌이 죽은 날이라고 합니다. 고려시대에 임금이 배를 타고 통진과 강화 사이를 지나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심하게 흔들렸고 임금은 사공이 고의로 배를 흔들어 그런 것이라고 사공의 목을 베었습니다. 사공은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 사공의 이름이 손돌이었지요. 그래서 해마다 그날이면 큰바람이 불고 날씨가 찬 데, 이는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 때문이라고 하여 강화에서는 이날 뱃길을 나가지 않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나라에 가마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신라 기와에 바퀴 달린 연 비슷한 것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전실 서쪽벽에 있는 <주인도(主人圖)>와 <부인도(婦人圖)>에는 호화로운 가마에 앉아 있는 주인과 부인의 모습이 각각 그려져 있지요. ≪고려도경≫에도 채여(采輿)견여(肩輿) 따위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가마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 혼례식 때 이용하는 사인교 (국립민속발물관 제공)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타던 가마 연, 공주나 옹주가 타던 가마로 연과 비슷한 덩, 앞뒤에 말을 한 마리씩 두어 끌고 가게 한 것으로 임금이 타는 가마 가교, 앞뒤에 각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가마로 혼인 때 신랑ㆍ신부가 주로 이용하는 사인교, 외바퀴 수레인 초헌, 먹거리나 흙 또는 곡물을 실어 나르던 갸자 따위가 있었고, 그밖에 남여, 삿갓가마(草轎), 용정자(龍亭子), 채여 등도 있었지요. 그리고 이 가마들에는 문에 드리우돈 가마발이 있었습니다. 가마발은 혼례나 장례 따위 의식용 가마에 사용하는 꾸밈의 하나로 가마의 앞면과 옆면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날씨가 쌀쌀해지니 여기저기서 김장소식이 전해옵니다. 김장은 길고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하는 한국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월동 준비의 하나였지요, 그러나 지금은 사철 배추를 살 수 있어 예전처럼 김장에 큰 비중을 두는 가정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김장을 마쳐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집이 많습니다. 요즈음에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김장을 많이 담가 소외된 이웃에게 나눠주는 훈훈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우리의 건강한 먹거리 김장김치 일본에 닥구앙, 나쓰께, 하구사이쓰께들은 말할 것도 업시 우리네의 김치에는 족달불급임니다. 위선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김치 맛을 본 후에는 귀국할 생각조차 업서진다니 더 말할 것도 업고 서양 사람들도 대개는 맛만 보면 미치는 것이 나는 서양 음식을 먹고 그러케 미처보지 못한 것에 비하면 아마도 세계 어느 나라 음식 가운데에든지 우리나라 김치는 조곰도 손색이 업슬 뿐 안이오 나의게 물을 것 가트면 세게 뎨일이라고 하겟슴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1928.5.1.)》 제12호에서 류춘섭 선생이 김치를 세계 으뜸이라고 소개한 기사입니다. 김장의 기원은 알 수 없으나,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의 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가을 깊어가는 오는 11월 17일 저녁 5시 30분 서울 중랑구민회관 대극장에서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무대에서 날았다. 다. 서울특별시 주최, 서울문화재단ㆍ즉흥프로젝트 르뽀엥(Le Point, 대표 문정온) 주관으로 하하! 호호! 우리 어머니 예술가 만들기 즉흥움직임 행복프로젝트 공연이 열린 것이다. ▲ 60~75 살의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혼신을 다한 아름다운 현대판 소고춤 공연 최근 뉴스를 보면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한 고급 아파트에서 75살 노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문 앞에는 일주일치 신문이 쌓여 있어서 노인은 혼자 죽은 뒤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판단됐다. 왜 돈 많은 이 노인은 홀로 죽어야 했을까? 노인들에게 돈만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닐 테다. 아니 보통의 노인들처럼 생활비와 건강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은 홀로 살고, 아무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 문제는 그들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껴안아야할 사회적 과제이다. 그런 사회적 과제의 한 축을 맡으려고 출발한 즉흥프로젝트 르뽀엥(Le Point, 대표 문정온)은 서울특별시ㆍ서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것은 정월노리로써 고래로부터 경기이남 각지에서 성행하는 것이엿스나 모다들 정월 십오륙일 즉 대보름날 한 것이다. 한 부락이 동서로 난누어저 각 집에서 집흘모아 굴근 바를 꼰다. 그리하야 그 마을의 사람들은 남녀 물론하고 모다 나와서 이 줄을 잡아 다니는 것이다. 이 줄에는 수(雄)줄 암(雌)줄이 잇서 동은 수, 서는 암이라고 불으며 이긴 쪽은 일 년 동안 병에도 안걸니며, 또 한해 농사도 풍작이라는 말이 잇슴으로 모다 자기의 힘을 다하야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승부를 결한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삼천리》 제5권 제1호(1933.1.1.)에 나오는 그리운 우리 정조( 情調) 줄다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줄다리기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양쪽으로 패를 나눠 하는 놀이이기에 무엇보다도 마을사람들의 하나 됨이 필요한 놀이지요. 줄다리기는 어느 지방에서나 볼 수 있던 놀이로 이 놀이에 필요한 것이 굵고 튼튼한 줄입니다. 이러한 튼튼한 줄은 단순한 줄이 아닌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소중히 모셔지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경상북도 포항의 모포리 마을에는 뇌성산 아래 골매기당에 있으며, 이곳에 줄이 모셔져있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10년 8월 29일, 국치일을 당해 자신의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자정순국한 분들 가운데 향산 이만도 선생이 계십니다.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살 때, 선대 고향인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하계마을은 퇴계의 학문을 가장 전형적으로 계승한 곳으로 조선 후기 걸출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지요. 선생은 24살 되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과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의 관직을 지냈습니다. ▲ 을사오적을 극형에 처하고, 을사늑약을 철회하라는 향산 이만도 선생의 상소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 그러나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여 파직당하기도 하였고,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같은 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지요. 낙향하여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던 가운데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마침내 9월 의병봉기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郎君去後音塵絶 낭군님 떠난 뒤에 소식마저 끊겼는데 獨宿靑樓芳草節 봄날 청루에서 홀로 잠들어요 燭盡紗窓無限啼 촛불 꺼진 창가에서 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밤 杜鵑叫落梨花月 두견새 울고 배꽃도 떨어지네요 ▲ 홀로 눈물 흘리며 잠드는 밤, 밖에선 배꽃이 떨어집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위는 조선시대 천한 신분의 여종 설죽(雪竹)이 남긴〈낭군거후(郎君去後)〉라는 한시입니다. 이 시는 한다하는 조선의 선비들이 설죽의 실력을 알아보려고 '만일 자신의 낭군이 죽었다고 치고 시를 한수 지어 보라'는 말에 지은 시라고 전해집니다. 한다하던 선비들은 설죽의 시를 듣고 모두 감탄했다는 후일담이 있을 만큼 천한 신분의 설죽은 명시를 지어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지요. 이렇게 설죽이 지은 시는 166수로 조선시대 여류 시인들이 지은 시를 모두 합한 2000여수 가운데 10%에 가까이에 이를 만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뛰어난 시를 지은 인물로 꼽힙니다. 설죽은 원래 조선 중기의 학자 권래(權來)의 여종이었는데 송강 정철의 애제자인 성로(成輅)와 사랑에 빠져 주고받은 연시(戀詩)가 20수나 있습니다. 설죽 시는 조선 중기의 시인 권상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일보는 또 우리말보다 한자를 더 사랑합니다. 기사 제목에 부추로 腎臟을 따뜻하게!라고 썼습니다. 그런 다음 미안했는지 腎臟 아래에 신장이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국어기본법 제14조(공문서의 작성)을 보면 ①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언론사는 공공기관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언론이라면 공공기관에 준하여 한글로 먼저 쓰고 굳이 한자를 쓸 생각이라면 괄호 안에 써야할 것입니다.또 부추로 신장을 따뜻하게!라고 써도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 부추로 콩팥을 따뜻하게!라고 토박이말을 쓰면 안 되는가요? 문화일보가 우리말을 사랑하는 언론사로 거듭나서 온 국민의 손뼉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2015 서울빛초롱축제에는 많은 시민들이 몰려 즐기고 있다. 600여 개의 등이 서울 청계광장에서 수표교를 잇는 물길 1.2km를 화려하게 물들이는 2015 서울빛초롱축제(Seoul Lantern Festival)가 오는 22일(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 축제는 (사)서울빛초롱축제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서울시, 은련카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KEB하나은행, 네파가 공동후원하며, 모두 4개의 주제 전시 서울에서 느끼는 고풍, 서울에서 만나는 옛 삶, 오늘 서울의 모습, 함께 서울로 구성된다. 올해 축제는 도심 속 한국의 전통미를 오롯이 품고 있는 북촌한옥마을, 조선시대 선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종묘정전 등 서울의 명소들이 정교한 형태의 등으로 표현했다. 특히 조선시대 돈의문 성곽을 걸으며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했던 놀이를 표현한 돈의문 순성놀이도 구현됐다. 모든 등이 전통 한지로 제작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15 서울빛초롱축제는 서울은 물론 지역과 세계가 함께하는 지구촌 축제로 치러진다. 이와 관련해 광교갤러리~수표교 구간에서는 경남 고성의 공룡엑스포 등, 미국의 러시모어산 조각 등, 중국의 금사왕국의 성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