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인터넷기자협회(회장 김철관)가 12일 저녁 6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창립 13주년 기념식과 2015 한국인터넷기자상 시상식을 열었다. 이날 기념식엔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배재정 의원, 김환균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박종길 전 문화부 차관, 도영심 UN WTO 스텝재단 이사장 등 각계 인사가 참여했다. 김철관 회장은 인사말에서 여론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게 주류 언론인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 인터넷 언론의 역할도 컸다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현 정부의 신문법 시행령 개정으로 지금의 인터넷 언론의 85%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인터넷 언론이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정론을 위해 노력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면서 인터넷 언론에 대한 합당한 정책을 요구했다. ▲ 인사말을 하는 김철관 인터넷기자협회장 ▲ 축사를 하는 도영심 UN WTO 스텝재단 이사장(왼쪽), 김환균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가운데), 천지일보 이상면 대표이사 축사에 나선 김환균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신문법 개정안의 취지는 이해되지만, 3분의 2 이상 언론이 사라질 위기라는 것은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느 날 황(黃) 씨 성을 가진 부자가 마구간을 치우고 있었는데 태백산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고 했다. 황 부자는 곡식 대신 쇠똥을 던져주었다. 이것을 본 며느리가 민망하게 여겨 시아버지 모르게 쌀 한 되를 시주하고 대신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자 스님이 며느리에게 이 집은 곧 망할 것이니 처자는 나를 따라 오거라.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하였다. 며느리가 이에 스님을 따라서 가다가 구사리(九士里) 산꼭대기에 이르자 벼락 치는 소리가 나고 천지가 흔들렸다. 놀란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니 황 부자가 살던 집이 못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뒤를 돌아본 며느리가 아기를 업은 채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말았다. ▲ 한국의 명수(名水) 100선에 드는 태백의 연목 황지(黃池), 태백시청 제공 이는 태백산 자락에 있는 연못 황지(黃池)에 서린 전설입니다. 이 황지는 남한에서 제일 큰 강인 낙동강의 발원지 매봉산(梅峰山) 천의봉(天衣峯) 너덜샘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든 연못이지요. 황지는 상지(上池)ㆍ중지(中池)ㆍ하지(下池) 등 3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는 각각 100m, 50m, 30m로 한국의 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 해에 전라도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므로 여러 도의 주린 백성들이 모두 가서 얻어먹는데, 그 어린아이를 먹이지 못하여 혹은 길가에 버리고, 혹은 나무에 매어 놓고 가고, 혹은 남의 집에서 하룻밤 자기를 청하고서 버리고 가니, 남녀의 어린 아이가 모두 32명이나 되었다.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그 도에 공문을 보내어 급히 구휼을 하도록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19년(1437) 1월 13일 치 기록으로 고아가 된 아이를 급히 구휼하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세종 때 한양은 날로 번창하고 인구도 많이 늘어났는데 이에 따라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버리는 경우도 많아졌지요. 그래서 처음엔 이 아이들을 빈민구제기관인 “제생원(濟生院)” 노비들에게 보살피도록 합니다. 그러나 노비들도 가난하여 제 자식도 돌보지 못하는 처지라 이 고아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가 없었지요. ▲ 종로구 계동 현대계동사옥 앞에 있는 "제생원터" 표지석, 조선시대 가난이의 치료와 함께 고아를 볼보기도 했다. 이에 제생원의 건의에 따라 1435년 6월 22일 조선 최초의 고아원이 한양 제생원 옆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최초의 세 칸짜리 고아원은 남종과 여종 한 명씩을 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가면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무덤인 사적 제74호 김해 수로왕비릉(金海 首露王妃陵)이 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왕비는 성이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살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하지요.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2명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습니다. 높이 5m 정도의 무덤으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는데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써서 축대를 쌓았습니다. 가운데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글이 2줄로 새겨져 있지요. 무덤에 딸린 건물로는 숭보제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으며,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사적 제74호 김해 수로왕비릉 무덤 앞에는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도 신을 잠재우기 위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도 남아 있지요. 세종 28년(1446)에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踏破千山與滿山 : 천산과 만산을 돌아다니고 洞門牢鎖白雲關 : 골짝 문을 굳게 닫고 흰구름으로 잠갔다 萬松嶺上間屋 : 많은 소나무로 고개 위에 한 칸 집 지으니 僧與白雲相對閑 : 스님과 흰 구름 서로 보며 한가하다“ 위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쓴 한시(漢詩) “산거집구(山居集句)” 곧 “산에 살며”의 하나입니다. 원래 “집구(集句)”란 이 사람 저 사람의 시에서 한 구절씩 따와 새로운 시를 짓되 운자도 맞아야 하기 때문에 완전한 창작 이상의 예술혼이 담긴 작품이지요. 이 작품에는 떠돌이 삶을 산 자신의 모습과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골짝 문을 굳게 닫고 흰구름으로 잠갔다.”라든가 “스님과 흰구름 서로 보며 한가하다.”라고 한 시구는 매월당이 뛰어난 시심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보물 제1497호 <김시습 초상>, 부여 무량사 소장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작가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지요. 특히 그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두 줄의 미학으로 황홀한 해금. 해금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악기는 보통 6줄 이상이다. 하지만 해금은 오직 두 줄을 손으로 감아쥐거나 떼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 두 줄뿐이지만 6줄, 12줄 심지어 25줄을 가진 어떤 악기에도 뒤지지 않는 신비한 악기다. 이 해금으로 청중을 사로잡아온 이유라는 지난 7일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김세종제 춘향가로 듣는 이유라의 해금산조”를 펼쳤다. 난계예술제 문화부장관상 최우수상 등을 수상하기도 한 이유라는 이유라 독집음반 “The Moment of Leeeura”, 해금실내악단 ‘이현의 농’ 1ㆍ2ㆍ3집, 태교음반 <왕자를 키운 음악> 등 많은 음반을 내왔으며, 현재 국악퓨전 “이유라밴드”를 이끌고 있고, 해금실내악단 ‘이현의 농’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새로운 시도를 했다. 판소리를 해금으로 표현한 것이다. ▲ 혼신을 다해 “김세종제 춘향가로 듣는 이유라의 해금산조”를 연주하는 이유라 그동안 해금 연주는 산조나 단편적인 창작곡을 연주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전통음악의 기본인 “법고창신(法古創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김정호(金正浩)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지도, 최고의 지리학자로 꼽힙니다. 그런데 김정호가 유명해진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이 대동여지도를 넣으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전해진 얘기로는 경부선 철도를 놓으려고 온 나라를 측량하여 5만분의 1 지도를 만들었는데 대동여지도와 비교했더니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하니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얼마나 정밀하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성신여대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제850-1호 대동여지도 그런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뛰어난 점은 지도표(地圖標)라는 독특한 범례를 만들어 넣었다는 것이지요. 이 지도에는 산과 산줄기, 강과 바다, 섬과 마을은 물론 역참(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며 접대하는 일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 기관), 관아, 봉수, 성(城), 온천, 길 따위가 간략한 부호로 담겨 있습니다. 또 길은 긴 줄로 그리기에 강과 혼동될 우려가 있어서 곡선의 강과 달리 직선으로 그려 넣었고 10리 간격마다 표시를 해 거리를 파악할 수 있는 축척의 기능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점도 대단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훈민정음 해례본》 가운데 용자례(用字例) 일부를 인쇄한 벽지 한 음식점에 갔더니 벽지에 옛한글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반가워서 들여다봤더니 《훈민정음 해례본》 가운데 용자례(用字例) 부분이었는데 참 재미납니다. 지금 우리가 우산(雨繖)라 부르는 것은 우리 토박이말로 슈룹이었네요. 그리고 단풍은 단풍나무 풍(楓) 자를 썼는데 싣이라고 했습니다. 또 거북 구(龜)를 쓰는 거북이는 남샹이었고 그것이 변해서 60~70년대 만 해도 남생이란 말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런가 하면 연(燕) 자를 쓰는 제비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는 다비였군요. 이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쓰는 말들의 많은 것은 원래 토박이말이 있었지만 한자말에 주인 자리를 빼앗기고 잊힌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 아팠습니다. 조선시대 한문 생활에 익숙하던 양반들 탓일 텐데 그들의 사대주의 한 단면이 아닐까요? 이제라도 우리는 가능한 토박이말을 찾아 쓰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우산(雨繖)은 토박이말로 슈룹, 단풍나무는 싣이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 김남주 시인은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이 즈음의 정경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바로 겨울이 다가왔다는 손짓이다. 무서리 내리고, 마당가의 감나무 끝엔 까치밥 몇 개만 남아 호올로 외로운 때가 입동이다. ▲ 백양사 들머리의 감나무와 까지, 스님들은 아예 까치들에게 모두를 내주었나 보다. 입동은 24절기의 열아홉째이며, 이 날부터 '겨울(冬)에 들어선다(立)'이라는 뜻에서 입동이라 부른다. 이때쯤이면 가을걷이도 끝나 바쁜 일손을 털고 한숨 돌리는 시기이며, 겨울 채비에 들어간다. 겨울을 앞두고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때인데 농가에서는 서리 피해를 막고 알이 꽉 찬 배추를 얻으려고 배추를 묶어주며, 서리에 약한 무는 뽑아 구덩이를 파고 저장하게 된다. 입동 전후에 가장 큰일은 역시 김장이다. 겨울준비로 이보다 큰일은 없는데 이 때를 놓치면 김치의 상큼한 맛이 줄어든다. 큰집 김장은 몇 백 포기씩 담는 것이 예사여서 친척이나 이웃이 함께했다. 우물가나 냇가에서 부녀자들이 무, 배추 씻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것도 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옥새는 옥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이요, 임금의 목소리를 옥음(玉音)이라 하며, 훌륭한 원고를 뜻하는 말로 옥고(玉稿)라는 말도 있듯이 옥(玉)은 매우 귀한 보석의 하나입니다. 옥은 예부터 동양문화권에서는 금, 은과 함께 즐겨 쓰던 대표적인 보석으로 낱말 속에 집어넣어 매우 귀한 것을 나타내는 말로 쓰기도 했지요. 한편 옥은 음양오행의 다섯 가지 덕인 인(仁)ㆍ의(義)ㆍ지(智)ㆍ용(勇)ㆍ각(角)을 상징하는 꾸미개(장신구)로 쓰였는데 방위신에 예(禮)를 베푸는 예기(禮器)를 비롯하여 사회계급의 신분을 구분하는 드리개(매달아서 길게 늘이는 물건)와 악기인 옥경(玉磬), 약재와 의료용구 등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청동기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옥석공예품과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곱은옥, 구슬옥, 대롱옥과 신라의 세 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였던 진평왕의 옥허리띠를 통해 옥이 상류층의 중요한 꾸미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 장주원(張周元) 선생의 옥 원석을 자르는 모습(문화재청 제공) 옥공예품은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왕족계열과 특수계층에 한하여 지닐 수 있었지요. 옥공예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