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 가지 경치에 사람 눈 번쩍 뜨이고 / 千般景象醒人眼 아침에 창을 열면 저녁까지 안개로세 / 晨啓軒窓至暝煙 누가 알았으랴 천지의 맑은 기운을 / 誰識二儀淸淑意 산천이 가져다 여기에 전해 줄 줄을 / 山川持向此間傳 ▲ 한국 으뜸의 단아한 누각 보물 제528호 제청 청풍 "한벽루" (문화재청 제공) 이는 고산 윤선도의 “한벽루 벽 위의 주 문절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입니다. 제천 청풍 한벽루(보물 제528호)는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 동쪽에 세운 누각입니다. 기둥 사이는 모두 탁 트여있으며 사방에 난간이 둘러쳐 있습니다. 윤선도가 청풍의 한벽루에 올라 지은 시는 이것 말고도 여러 편이 전해오며 건물 안에는 송시열, 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라고 쓴 현판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빼어난 경치에 수많은 묵객들이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풍 한벽루는 밀양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누각 건물로 건물 본채 옆에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이덕일, 만권당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은 주로 한국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다. 민족사의 뿌리부터 왜곡시키기 위해서다. 먼저 조선총독부는 한국사를 반도사(半島史)로 축소시켜 놓았다. 한국사의 본무대였던 대륙과 해양을 삭제하고 반도사로 가두어둠으로써 한국인들 스스로 자국사를 반도사로 좁게 인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통치기구인 한사군이 있었고,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서 《동북아역사지도》는 조선총독부의 이런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만권당에서 내놓은 이덕일이 지은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책은 위와 같은 충격적인 고발장이었다. 일본 사학자도 아니고 한국인 사학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지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을사오적이 되살아온 것인가?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장의 지도가 국민들 앞에 펼쳐졌다. 동북아역사지도. 중국의 동북공정(현재 중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만들기 위한 중국의 역사 연구 프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번의 부경 행차에 이두석장(泥豆錫匠)역청장(瀝靑匠)훈금장(燻金匠)백철장(白鐵匠)을 들려보내는 일은 신들이 지난날에 아뢰었습니다. 다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이번에 가는 사은사(謝恩使)와 진위사(陳慰使) 등은 중국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듯하니 각 장인(匠人)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미처 전수(傳受)하여 익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훈금장과 백철장은 빼고 역청장과 이두석장을 보내어 이두석장에게 훈금하는 것을 겸해서 익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는 《중종실록》 76권(1534) 2월 18일 기록으로 이두석장(泥豆錫匠)이란 장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 두석장 장인이 장석을 만드는 모습 이두석장(泥豆錫匠)을 지금은 두석장(泥豆錫匠)이라고 부르는데 목가구나 건축물에 붙여서 결합부분을 보강하거나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만드는 일을 하는 장인을 일컫습니다. 두석장이라는 용어는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조(工曹)의 경공장(京工匠)에도 나오지요. 한옥이나 목가구는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맞춤과 이음으로 완성됩니다. 거기다 나뭇결의 아름다움까지 더해지지만, 나무는 물기를 가지고 있어 계절에 따라 늘어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성 사촌마을 가로숲은 고려말 안동 김씨 입향조(入鄕祖)인 김자첨이 안동으로부터 이곳 사촌으로 이사를 와서 마을 서쪽의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만든 방풍림입니다. 사촌마을에서는 이 숲을 서림(西林)이라고도 부르는데 당시에 서쪽이 허하면 큰 인재가 나지 않는다는 풍수설이 있어 그를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하려는 뜻도 있다고 하지요. 비보 덕인지 사촌 가로숲에는 조선 선조(재위 1576∼1608)대에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이 출생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옵니다. ▲ 마을을 지켜주는 의성 사촌마을 "가로숲" 사촌 가로숲은 전체 넓이 43,519㎡(약 11,817평)인데 이 지역은 천연기념물 제405호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습니다. 현재 이 숲에는 나이가 300∼600년 정도 되는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 종 5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왜가리를 비롯하여 소쩍새, 황조롱이 등 20여 종의 새들이 살고 있지요. 재미있는 것은 땅이름 등을 지을 때 보통 한자말을 쓰는데 견주어 이곳의 “가로숲”이란 이름은 길거리를 말하는 한자말 “가로(街路)”가 아니라 가로세로의 바로 그 “가로”로 토박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박쥐는 짐승 가운데 유일하게 날 수 있는 동물인데 박쥐에 대한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박쥐는 짐승과 새가 싸울 때 짐승이 우세하자 새끼를 낳는 점을 들어 짐승 편에 들었다가, 다시 새가 우세하자 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새의 편에 들었다는 우화에도 잘 나타나있듯이 박쥐는 변덕이 심한 동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박쥐는 예부터 행복을 상징하는 동물로 생활용품 속에 그 모양을 그려 넣거나 공예품, 가구 장식, 건축 장식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또한 박쥐를 길상(吉祥)무늬로 여겨 베갯모에 수놓았을 때는 다산을 뜻하였고 아들을 점지해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박쥐의 강한 번식력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자문화권에서는 모두 길한 동물로 여겼는데 특히 중국에서는 복(福)자를 크게 써서 박쥐가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걸어두면 복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박쥐를 뜻하는 한자 편복() 속에 들어 있는 복(福)자를 행운으로 해석한 것이지요. 박쥐를 하늘의 쥐를 뜻하는 천서((天鼠)라고 부르거나 신선한 쥐라고 해서 선서(仙鼠)라고도 불렀습니다. ▲ 박쥐무늬가 들어간 비치편복뒤꽂이(왼쪽), 명문장신상자 - 국립고궁박물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국 기원 4306년 세차 계축 8월 병신삭 10표일 경술 후손 준삼은 선조 여러 어른 신위 전에 삼가 고하나이다. 오곡이 무르익은 중추절을 맞이하여 여러 선조님의 높은 은덕이 새삼 느껴지며, 추로의 정이 간절합니다. 이에 간소한 제수를 드리오니 강림하시와 흠향 하시옵소서. 이는 당시로는 매우 드물게 한가위 차례 때 전남 나주 남파(南坡)고택 박준삼 선생이 올린 한글 제문입니다. 그뿐만 아니지요. ▲ 박준삼 선생이 손자의 혼례식 때 쓴 한글 고촉문 이 길한 날을 가려 6대 이래 종손인 경중이가 진주 후인 강대흥 씨의 장녀 정숙이와 혼례를 거행하였음을 삼가 신령님 전에 감히 고하나이다. 여러 가지로 살펴보아 우리 가정 종부로서 적합하게 생각하였슴으로 양가의 충분한 양해 아래 이 의식이 이루어젓아오니 항시 보살펴 주시사 험난한 세파를 헤엄쳐 가는데 큰 지장이 없이 영원무궁토록 앞길을 열어 주시기를 우러러 빌고 바라옵니다. 갑인 四월 一八일 불효손 준삼 아룀 박준삼 선생은 이렇게 손자 박경중의 혼례 때 고축과 훈계는 물론 이력서도 한글로 쓰고, 나주초등학교 교가 노랫말도 한글로 지었으며 한글학회 회원이면서 최현배 선생, 정인승 선생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음력 7월 15일로 명절의 하나인 백중(百中)입니다. 백중은 백종(百種)중원, 또는 망혼일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무렵에 과일과 푸성귀가 많이 나 백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지요. 또 중원(中元)은 도교에서는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한 해에 세 번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 했고, 이때 별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망혼일(亡魂日)은 이날 죽은 부모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음식과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백중이 되면 우선 집집마다 익은 과일을 따서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 다음 먹는 천신 차례를 지냈습니다. 특히 이날은 머슴을 하루 쉬게 하고 돈을 주는데 머슴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을 사먹고 물건도 삽니다. 그래서 백중장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지요. 또 이날은 그해에 농사가 가장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소에 태워 마을을 돌며 놀았는데 이것을 호미씻이라 합니다. ▲ 머슴들의 잔칫날 백중(百中, 호미씻이)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제주도에서는 일손을 쉬지 않고 바다에 나가 일을 더 많이 하는데 백중날에 살찐 해산물들이 많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호군 윤중부(尹重富)가 백자(白磁)에 푸른 꽃무늬가 있는 큰 술잔 한 벌을 바치니, 쌀·콩 20석을 내렸다(세종실록 44권, 1429)” 라든가 “임금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태평관에 거둥하여 하마연(下馬宴)을 베푸니, 사신이 백자 청화 대접(白磁靑化大) 4벌을 바쳤다 (세종 46권, 1429)”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연회를 베풀 때 술잔이나 대접과 같은 백자 그릇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백자에 푸른 꽃무늬의 큰 술잔이란 청화백자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궁궐에서 청화백자를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청화백자 가운데 ‘청화백자산수무늬 항아리(靑畵白磁山水文壺)가 있는데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그린 그림이 한 폭의 동양화를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조선 왕실 자기를 굽던 관요에서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로 몸체 양쪽 면에 능화모양의 창을 만들고 산수화를 그려 넣은 것이 특징으로 꼽힙니다. ▲ "청화백자산수무늬 항아리(靑畵白磁山水文壺)", 국립중앙박물관 가을 밤 절벽 위에 인물과 멀리 동정호(洞庭湖)에 떠오른 둥근 달을 그렸는데, 이러한 소상팔경이 능화모양 창 안에 한 폭의 산수화로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권기옥은 근대문명의 꽃인 비행사가 되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을 했던 신여성이었다. 그의 생애는 ‘식민지-근대-여성’ 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관련 맺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펼쳐지는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권기옥은 인맥과 활동 반경, 실천 양태에서 여성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젖혔다.(중간 줄임) 그의 발자취는 한반도가 대륙적인 지평을 가졌던 한 시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지만 그는 세계인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을 다룬 “날개옷을 찾아서”를 쓴 정해주 작가는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지금도 비행사가 되기 쉽지 않은데 1917년 열일곱의 나이로 권기옥은 미국인 아트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스물셋의 나이에 여학생을 받아 주지 않는 중국의 항공학교 입학허가서를 받아 쥐고는 남자들과 똑 같은 고된 훈련 끝에 조종사 자격을 손에 거머쥐게 되지요. 그는 1961년 ‘여원’ 잡지와의 대담에서 ‘비행사가 되어 왜놈을 쳐부수고 싶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권기옥 지사는 1925년 비행학교 졸업 뒤에 임시정부 소개로 중국의 풍옥상(馮玉祥) 휘하 공군에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는 토끼섬이라 불리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에는 천연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꽃 문주란이 자라고 있는데 원래 이 섬 이름은 난(蘭)이 자라는 섬이라 해서 난섬이라 불렸지요. 960여 평의 넓이의 백사장과 10여 미터 높이의 현무암 동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섬은 썰물 때에는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 바위와 모래밭 언덕에 문주란 군락이 볼만한 곳입니다. 1927년에 주민 윤석후 씨가 토끼를 이곳에 풀어놓아 '토끼섬'으로 불렸다는 이야기와 7-8월에 새하얀 꽃으로 뒤덮인 섬의 모습이 토끼모양이라 토기섬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토끼섬의 "문주란" 자생지(문화재청 제공)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자라는 문주란은 난(蘭)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난과(蘭科)식물이 아니라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높이 60~70센티미터까지 자랍니다. 겨울에 말랐던 잎이 봄을 맞으면 파랗게 새잎이 돋아나고 7월말쯤부터 백설 같은 꽃을 연달아 피워 9월까지 온 섬을 하얗게 물들이는데 그윽한 꽃향기가 온종일 풍기다가도 해가 지면 슬그머니 사그라진다고 하지요. 문주란은 머나먼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