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전 8시 30분 종로 삼정목(三丁目)에 있는 단성사 앞으로 대여(大輿, 왕실의 초상을 치를 때 쓰던 큰 상여)가 지나갈 때 이선호의 선창과 중앙고보생 30~40명의 호응으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고 격문 1,000여 매를 뿌리며 태극기를 휘날리니 근처에 도열한 민중일부가 이에 동조하였다. 현장에서 학생 30~40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오전 8시 25분 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 학생 50여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하였으며 보성전문과 민중의 동조를 얻고 기세를 올렸다. 주동학생 이병립·이천진·박하균 등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는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였던 순종의 인산(因山, 왕과 왕비 등의 장례) 일을 기해 일어난 학생들의 만세운동으로 《한민족독립운동사》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이날 순종 황제의 인산을 애도하는 군중이 장안을 가득 메웠는데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봉도(奉悼, 임금이 탄 거가(車駕)를 편히 모시라고 별감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경계하던 일)를 위해 참여한 학생만도 약 2만 4천여 명에 이르며 시민까지 합치면 무려 30만 명에 이를 만큼 마지막 황제를 보내는 슬픔은 비통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백(李時白, 1581/선조 14∼1660/현종 1)은 효종 때 영의정까지 올랐던 선비입니다. 이시백은 용모가 우람하고 기력이 장대했지만 지혜가 깊고 겸손한 것은 물론 자신이 처리한 정사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하루 종일 근심하면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백성을 사랑하고 부정과 불의를 용서하지 않았지요. 효종 3년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 평양에 도착했을 때 성문 밖에서 아름다운 기생들이 열을 지어 그를 마중하는 것을 본 이시백은 평양 벼슬아치를 크게 꾸짖고 어린 기생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했습니다. 또 하루는 이시백이 퇴청하여 집에 들어오자 부인이 비단을 두른 방석을 만든 것을 알고 수십 년을 써와 쥐가 갉아 먹고 얼룩져 더러워진 부들자리를 내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들자리에 부인도 앉도록 하면서 “내 다행히 어진 임금님을 만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소. 그래서 부들방석에 앉아도 오히려 마음이 불편한데 어찌 비단을 두른 방석에 앉을 수 있겠소”라고 한탄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인은 방석에서 비단을 뜯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지요.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시백 영정(문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수단곤륜옥(誰斷崑崙玉) 누가 곤륜산 옥을 베어내어 재성직녀소(裁成織女梳) 직녀의 머리 빗 만들었나 견우일거후(牽牛一去後) 견우 한번 떠나간 뒤 수척벽공허(愁擲碧空虛) 수심에 젖어 푸른 허공에 던져버렸네 위는 조선 여류시인 황진이가 쓴 “영반월'(詠半月-반달을 노래하다)”이란 한시입니다. 반달은 보름이면 보름달 곧 만월(滿月)이 되는데 임이 없는 나는 외로운 반쪽 달님일 뿐이지요. 또 곱게 머리를 빗질해 단장하는 까닭은 임이 있기 때문인데 임이 없으면 빗질도 필요 없으니 직녀는 그 얼레빗을 하늘에 던져버릴 밖에요. 여류시인 황진이의 문학성은 참 뛰어납니다. ▲ 견우 떠나가자 수심에 잠겨 얼레빗을 하늘에 던지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얼레빗은 반달모양으로 생긴 전통빗으로 월소(月梳)라고도 부르지요. 빗으로 빗어 단장했던 우리의 머리카락을 여성은 정조를, 남성에겐 지조를 상징했다고 합니다. 혼인을 앞둔 신랑 집에서는 중매쟁이가 가져 온 규수감의 머리카락 굵기와 빛깔로 건강상태를 확인했다고 하며, 처녀 총각이 눈이 맞으면 처녀가 머리카락 세 올을 뽑아 주었는데 정조를 바치겠다는 표시였습니다. 또 우리 혼인 풍습에는 청혼 때 신랑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아홉째인 “망종(芒種)”입니다. 망종이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적당한 때라는 뜻이지요. 이 시기는 모내기와 보리 베기에 바쁜 때로 “발등에 오줌 싼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도 있는데 망종까지 보리를 모두 베어야 논에 벼도 심고 밭갈이도 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 “햇보리를 먹게 될 수 있다는 망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이때쯤은 가뭄이 들기도 합니다. 논과 밭 모두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옹달샘 물마저 끊겨 먼 데까지 먹을 물을 길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엔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까지 나서서 기우제를 지내야 했지요. 조선시대에는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기에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짓기가 어려워지면 나라에 큰 재앙인 것인데 《조선왕조실록》에 “기우제”가 무려 3,122건이나 나올 정도입니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먼저 산 위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산에서 불을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며,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그리고 최근의 일들을 보면 정사에서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 인재를 취하는 데에는 나약한 사람만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중간 줄임) 이제 만약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본분에 지나친 것을 삼가라는 경계와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벼슬 반열에 끼어 따라다니고 길가에서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하게 자족하면서 아무것도 꺼리는 바가 없이 처신한다면 또한 사람들의 드센 비방과 무엄하고 불경스럽다는 주벌이 잇따라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달려 나가고 싶어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종실록 10년 (1873) 10월 25일 기록으로 올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하던 최익현 선생의 정치 폐단 시정 요구 상소문의 일부입니다. 이에 고종황제는 답하기를, “그대의 이 상소문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또 나에게 경계를 주는 말이 되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감히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일을 계승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제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한 말에 대하여 만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소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지요. 면암(勉庵) 최익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지난해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진행된 고미술품 경매회사 (주)마이아트옥션(대표 공상구)의 제13회 메인경매 결과 추사 김정희의 “시우란(示佑蘭)”이 10억 4000만 원에 낙찰되어 13회 경매의 최고가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추사의 작품은 누구나 소장하고 싶어 하는 명품일 것입니다. 그러나 추사가 천하의 명필이 될 수 있었던 데는 그 누구보다도 엄청난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임을 잘 모릅니다. 그는 유배 당시 쓰라리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부단히 담금질했던 것입니다. 화날 때에도 붓을 들었고, 외로울 때도 붓을 들었으며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북받칠 때도 붓을 들었다지요.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 반가운 편지와 소식이 올 때에는 자다가도 일어나 붓을 들었습니다. 그는 또 중국의 비석 글씨 309개를 베끼고 베끼면서 고전과 글씨를 익혔고 일흔 살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벼루 열 개를 갈아 치우고, 붓 천 자루를 닳도록 썼을 정도입니다. ▲ 이한철이 그린 추사 영정(왼쪽), 추사의 제자 소치 허유가 그린 추사 반신상 친구 김유근이 자신의 벼루에 글씨를 새겨달라고 하자 마음에 들 때까지 글씨체를 연습한 것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지난 2010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쌍따비를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따비는 대전 출토품으로 전하는 국보 유물인 농경문 청동기에 보이는 쌍따비와 같고, 근현대에 사용하던 따비와도 상당히 유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따비”는 삽과 같은 원리로 땅을 일구는 농기구의 하나입니다. 다만, 삽과 다른 점은 날이 넓적한 삽처럼 흙을 베면서 파거나 흙을 다른 곳으로 퍼 옮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따비는 날이 하나인 “외따비”와 날이 두 개인 “쌍따비”가 있습니다. 쌍따비는 크기가 보통 사람의 키보다 약간 길며, 무게도 외따비의 배 정도가 됩니다. 따라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 쌍따비를 다루기가 벅찰 수도 있지만 제주도처럼 돌이 많은 지형적인 조건 아래서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지요. 쌍따비는 제주도 가운데서도 가축을 많이 기르던 구좌읍과 성산읍에서 많이 싸왔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 따비질 할 때 부르던 민요입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돌이 많은 척박한 땅에서도 “썽따비”라는 농기구 따위를 써서 강인하고 슬기롭게 살아왔습니다. 말들을 방목하는 한라산의 목장지대에서 지금도 쌍다비질 노래가 들리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 선비들이 거처하는 사랑방에는 선비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구들이 있습니다. 사방탁자(四方卓子)는 그 가운데 선비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가구입니다. 다과(茶菓), 책, 가벼운 꽃병 등을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사방탁자는 선반이 너덧 층으로 되었으며 널빤지로 판을 짜서 가는 기둥만으로 연결하여 사방이 트이게 했지요. 사방이 터졌기 때문에 사방탁자라고 하는데 제일 아래층은 장(欌)형식으로 짜인 것도 있습니다. 간결한 구성과 쾌적한 비례 그리고 여백의 아름다움은 좁은 한옥 공간을 시원하게 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는데, 이러한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현대적 감각에 가장 가까운 가구로 평가받지요. 또 사방탁자는 앙상한 뼈대 사이로 기품이 유유히 흘러 선비의 방을 더욱 선비의 방답게 완성해주고 있습니다. ▲ 간결한 구성과 쾌적한 비례 그리고 여백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사방탁자 이렇게 조선 선비의 사랑방에서 사방탁자가 사랑받게 된 데에는 조선시대 성리학이 큰 몫을 했지요. 청자가 발달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에 오면 깨끗한 순백색의 백자가 발달합니다. 불교국가인 고려는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고 환상적이며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즐겼지만 조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이틀동안 광복 70년 기념 통일박람회 2015가 열리고 있다. 그 행사의 하나로 저녁 5시부터 통일부와 (사)물망초의 공동주최로 통일콘서트가 열렸다. ▲ 북간도아리랑을 부르는 남은혜 명창 다문화콘텐츠협회 장원재 회장의 사회로 먼저 무대로 오른 남은혜 명창은 온 배달겨레의 노래 아리랑을 다양하게 불러 청중들의 큰 손뼉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고향을 등지고 만주 북간도로 떠났던 동포들의 아픔을 노래한 북간도 아리랑을 시작으로 본조아리랑, 공주아리랑, 치르치크아리랑(고려인들의 한을 노래한 아리랑) 등을 불렀다. 이어서 무대에 오른 구미꼬김과 주세페김의 듀오아임은 주세페김이 작곡한 윤동주의 서시와 아리랑 아라리오를 환상의 화음으로 불러 청중들의 넋을 빼놓았다. 듀오아임은 한국과 일본 크로스오버 듀오로 한국의 문학과 역사를 소재로 한 인문학적 노래를 불러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윤동주의 서시를 부르는 듀오아임(구미꼬김과 주세페김) 이후 평양인민군예술학원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가 탈북해 현재 여주의 물망초학교에 재학중인 김운룡 학생의 아코디언 연주가 있었고, Magna F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100여 년 전만 해도 장고를 잡은 모갑이의 지휘에 따라 산타령패들이 소고를 치면서 대형을 만들어 나가고 목청을 드높이기 시작하면 소리판은 후끈 달아올라 주위의 구경꾼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는 것이 산타령이다. 그 산타령의 맥을 이어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 선소리 산타령 발표공연이 어제 5월 29일 늦은 3시에 서울 성동구 소웥아트홀에서 선소리산타령보존회 주최로 열렸다. ▲ 제자들과 산타령을 하는 황용주 명인 ▲ 해설하는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왼쪽), 맛깔스러운 사회를 보는 방영기 전수교육조교 공연에 앞서 단국대 서한범 명예교수는 “무엇보다도 산타령은 다리밟기(답교) 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다. 구한말까지도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 <살고지다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놀이가 행해졌는데, 이날 밤에는 서울, 경기 일원의 산타령패(牌)들이 전부 모여 <산타령>을 부르며 밤 새워 놀았다고 한다. 각 지역의 선소리패들이 각각의 특징을 살린 복색과 율동을 곁들이고, 저마다의 기량을 들어내면서 그곳에 참가한 시민들과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부르던 모습은 그 상상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