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형조판서 김취로의 말을 듣건대 반인이 한 짓이 매우 해괴하다 합니다. 북부의 장의동 주위에 금송의 정령이 행해지지 않기에 사람을 시켜 살펴봤더니 반인의 무리가 생솔을 함부로 베어가기에 사람들이 잡으려 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성을 넘어 도주하여 그대로 반촌 안에 숨었는데, 모든 금란에도 반쪽에 감히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잡아낼 길이 없다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위는 《영조실록》 6년 10월 11일에 나오는 우의정 조문명의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금란(禁亂) 곧 소나무 벌채금지, 임의적 도살 금지, 양조(釀造, 술빚기) 금지는 나라에서 엄히 금하던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소나무 벌채를 한 사람을 쫓으니 치외법권 지대인 반촌으로 들어가 숨어 잡을 수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반촌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외부인들과는 혼인은 물론 사귐도 없었습니다. 반촌에 사는 반인들은 송도(개성)에서 온 사람들로 여러 풍속도 서울 사람과 달랐다고 하는데 이들은 백정은 아니지만 한성 안에서 소를 잡고 파는 것을 독점한 것은 물론 세금으로 바칠 고기를 성균관 학생들의 반찬을 하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게으른 버릇은 기름진 땅을 믿기 때문 상농(上農)도 중천에 해 뜨도록 잠에 빠졌다가 느릅나무 그늘에서 한바탕 술주정하고 나서 느리작느리작 소 한 마리 몰고 마른 밭을 가는구나." ▲ 단원 김홍도의 "쌍겨리". 국립중앙박물관 위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강진에 귀양 가서 쓴 '탐진농가(耽津農歌)'라는 시 가운데 일곱째 작품이지요. 이 시에는 "경기 지방의 마른 밭은 소 두 마리로 간다."라는 주석이 붙어 있습니다. 귀양 가서 본 전라도 강진에선 외겨리(독겨리)로 밭을 갈지만 경기도에서는 쌍겨리로 갈았기에 주석을 달아 놓은 것입니다. 대개 땅이 평평하여 쉽게 흙을 팔 수 있으면 외겨리로 갈지만, 화전 같은 경사지거나 흙이 단단하거나 돌이 많은 땅에는 쌍겨리로 갈아야 했지요. 그러나 혼자 소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면 괜찮지만 농민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아니어서, 이웃과 함께 어울려 쌍겨리로 갈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이야 쌍겨리로 논밭을 가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지만 단원 김홍도의 “쌍겨리”와 김준근의 풍속화 “밭갈이와 씨뿌리기”에도 쌍겨리 그림이 나오는 것을 보면 예전에는 쌍겨리로 가는 곳이 많았음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는 보통 아이 어머니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하는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예전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육아를 했다고는 상상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였던 이문건(李文健, 1494~1567)이 쓴 《양아록(養兒錄)》을 보면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아록》은 이문건이 손자가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16년 동안 직접 기르며 쓴 일기입니다. 이문건은 부인과 며느리가 머무는 아래채에 가 손자의 발육과정을 지켜보며 그 변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가누며 앉게 되고, 첫니가 나며, 기어 다니기, 걸음마 연습, 책 읽기 흉내 내기 따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손자 자라는 모습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12월 보름 뒤 능히 한 발짝 떼었다. 손으로 창문살을 붙들고 옆걸음질로 걸음마 연습을 한다. 점점 한 발짝씩 더 떼곤 하지만 자주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하는구나.”와 같습니다. ▲ 이문건(李文健)이 쓴 《양아록(養兒錄)》의 표지(왼쪽)와 글머리 드디어 돌을 맞이하여 돌잡이하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손자가 붓과 먹을 먼저 잡자 장차 문장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궁궐 안의 음식 만드는 일을 맡아 하는 곳은 사옹원(司饔院)이었습니다. 사옹원에는 소속 요리사를 관리 감독하는 행정관원들이 있었고, 그 아래에 요즘으로 치면 주방장인 숙수나 반감이 있었으며, 각 영역의 전문가들 곧 각색장(各色掌)들이 있었습니다. ▲ 수라간의 전문가들, 쌀 고르는 미모(米母)와 물 끓이는 탕수탁반(湯水托飯)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 가운데 임금의 수라를 담당하던 대전수라간의 각색장들을 살펴보면 고기 요리를 담당한 별사옹(別司饔)이 14명, 물 긷는 수공(水工)이 6명, 물 끓이는 탕수탁반(湯水托飯)은 4명, 찜 요리를 하는 탕수증색(湯水蒸色)은 10명, 채소요리 전문 채증색(菜蒸色)은 6명이었지요. 또 굽는 요리의 적색(炙色)이 6명, 밥 짓는 반공(飯工)이 10명, 술을 담그는 주색(酒色) 6명, 쌀을 고르는 미모(米母)가 6명, 떡을 빚는 병공(餠工)이 2명, 두부 전문가 포장(泡匠)을 4명 두었습니다. 그밖에 음식전문가는 아니지만 상차림만 전문으로 했던 상배색(床排色)은 8명, 음식을 보관하는 장자색(藏子色)은 6명, 은그릇은 물론 각 곳간의 주방 기구를 관리ㆍ보관하는 성상(城上) 10여 명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천보산 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경기도 양주 회암사는 삼산양수(三山兩水, 천보산ㆍ삼각산ㆍ수락산과 임진강ㆍ한강)에 자리 잡은 절로 지공선사가 터를 잡고 나옹선사가 도량을 연뒤 그의 제자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와 함께 대대적인 중창을 한 왕실불교문화의의 중심이었습니다. 한때 스님만 3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던 회암사는 궁궐과 견줄만한 건물터와 왕실에서 사용되던 도자기가 출토된 곳입니다. ▲ 안성 봉업사터에서 출토된 청동북(고려 때인 1217년 만듬, 경기보물전에서) 뿐만 아니라 대각국사 의천이 초조대장경을 보완하기 위해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10여년의 작업 끝에 속장경을 편찬한 곳은 경기도 장단의 흥왕사였으며, 안성의 봉업사 역시 대표적인 고려시대의 왕실 절이었습니다. 불교나라였던 고려는 거란ㆍ몽고 등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기 위해 초조대장경ㆍ팔만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경기(京畿)’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읍을 지키는 근본의 땅(根本之地)으로 자리했습니다. 성리학을 수용한 조선시대에도 왕실중심의 불사가 이루어졌는데 수종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와 문정왕후가 발원한 불화, 남양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옛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서 보고 올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옛 사람들이 쓴 문헌으로 짐작할 뿐이지요. 특히 세시풍속을 담아 쓴 책들로 그때를 상상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세시풍속지(歲時風俗誌)들은 내용으로 보아 정조 때 쓰인 것으로 판단되는 정조 , 1819년(순조 19) 김매순(金邁淳)이 지은 한양(漢陽)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1849년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들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경도잡지(京都雜志)》의 내용을 보면 제1권 풍속에는 건복(巾服, 두건과 웃옷)·주식(酒食)·과과(果瓜, 과일과 오이)·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마려(馬驢말과 당나귀)·문방(文房)·화훼(花卉, 꽃)·유상(遊賞, 꽃놀이)·성기(聲妓, 노래를 부르는 기생)·시문(詩文)·서화(書) 등 주로 당시의 여러 문물제도를 19항목으로 나누어 풀이하고 있지요. 또 제2권 세시에는 원일(元日, 설날)·입춘·상원(上元)·2월 초하루·한식·중삼(重三, 삼짇날)·4월 파일·단오·6월 15일·복(伏)·중추(中秋)·중구(重九)·동지·제석(除夕, 섣달 그믐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어제 5월 20일 저녁 5시에 경복궁 앞 법련사 내 불일미술관에서는 제20회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개막식이 있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세월을 오직 불교사진을 담기 위해 산사를 찾았던 회원들이 다시 전시회를 연 것이다. ▲ 승무를 추는 이승희 명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열창하는 심진스님 ▲ 제9회 청소년불교사진공모전 대상 시상식 모습 ▲ 인사말을 하는 전제우 회장, 축사를 하는 청전스님과 안장헌 고문(왼쪽부터) ▲ 작품에 매료된 관람객 ▲ 작품이 전시된 전시장 모습 개막식전 행사로 문화공연이 먼저 있었다. 이승희전통무용연구소장 이승희 명인이 승무를 추었고, 가수 박희진 씨가 산사 가는 길을 불러 재청을 받은 데 이어 서울만돌린체임버 단원의 연주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봉선사 심진 스님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열창하여 참석자들의 큰 손뼉을 받았다. 문화공연이 끝난 뒤 제20회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과 함께 한 제9회 청소년불교사진공모전 대상 시상식이 있었고 이어진 개막식에서는 한국불교사진협회 전제우 회장의 인사말과 인도 다람살라에 계신 청전스님, 안장헌 고문의 축사가 있었다. 이번에 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금관은 말 그대로 금으로 만든 모자입니다. 모자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쓰는 것이지만 금관처럼 예전엔 모자를 쓰는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의식을 할 때 그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 유물 가운데 금관은 매우 독특하고 호화로운 모습인데 대부분 삼국시대 특히 신라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었지요.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것들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금관총 금관은 신라 금관 가운데 맨 처음 발견된 것이며, 높이 44.4cm, 머리띠 지름 14cm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신라 금관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들은 눌지왕(訥祗王), 자비왕(慈悲王), 소지왕(炤知), 지증왕(智證王) 때의 것들인데 경주 시내에 동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대형 고분들 중 몇 개에서만 6점이 출토된 것을 보면 아마 고분 전부를 발굴했을 때 틀림없이 많은 금관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독특한 금관 양식이 어디서 왔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동안 주류였던 의견은 이 금관이 시베리아 샤먼들의 관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지정조격(至正條格)》에 이르기를 ‘사위가 장인을 욕하면 그 아내가 이혼한다.’ 하였는데 지금 한환은 장인을 이미 때렸으니, 이는 한환이 조지산을 장인으로 여기지 아니한 것이고, 조지산도 한환을 기꺼이 사위로 여기지 않은 것이며, 한환의 부부도 부부로 서로 대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편이 함께 살기가 어려우니 할 수 없이 이혼시키자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한환은 외방에 귀양보내고, 그 아내는 이혼시키라”. 이는 《성종실록》 21년 11월 4일 치 기록입니다. 사위가 아내와 장인을 때린 죄를 물어 나라가 나서서 부부를 강제 이혼시키고 유배까지 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조선시대 여인들은 남편에게 매를 맞아도 출가외인이기에 이혼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아 왔습니다. 그러나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여성이 이혼은 물론 네 번까지 혼인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나올 정도입니다. 태종은 사헌부에서 영돈녕부사 이지가 죽은 중추원부사 조화의 처를 아내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탄핵하자 처 없는 남자와 남편 없는 여자가 서로 혼인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면서 여성의 재혼에 대해 긍정적이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중앙에는 황제지신 오방지신이 하강하사 소원성취 발원이요 당상학발 절로나오는 오동나무 상상봉에 슬하같이 점제하고 무쇠목숨이 돌큰달어 천만세를 점제할제 이집주인에 대동할제 대명당에다 집을 짓고 수명당에다 우물을 파고 아들을 나면 효자 낳고 딸을 나면 열녀 낳고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일가문중에 화목동이 형제에는 우애동이 친구에는 유신동이 둥글동글 수박동이 부채살에 화락동이...” 청중들을 위한 유지숙 명창의 축원경이 온 공연장을 휩싼다. 청중들은 숨을 죽인 채 감동의 도가니로 빠진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 울려 퍼지는 축원경이야말로 얼마나 큰 위안이던가 ▲ "반메기 비나리"를 부르는 유지숙 명창 ▲ 전형적인 불교소리인 화청(백발가)을 담담하게 살짝 무게 있는 음성으로 풀어나가는 유지숙 명창 어제 5월 18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삼성동 한국의집(코우스)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의 기원덕담(祈願德談) 공연이 열렸다. 지난해 유 명창은 기원덕담(祈願德談) 음반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국내 공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달 일본 초청 공연에서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이번에 국내 공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