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옛날 경상도 어느 마을에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열심히 집안일을 하며 살았지만 시어머니는 늘 트집을 잡고 구박하며 고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집 며느리를 동정하고 칭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의 큰 제사 때 며느리는 조상들께 올릴 쌀밥을 지었다. 항상 잡곡밥만 짓다가 쌀밥을 지으려니 혹 밥을 잘못 지어 시어머니께 꾸중 듣는 것이 두려워서 며느리는 밥에 뜸이 잘 들었나 보기 위해 밥 알 몇 알을 먹어보았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시어머니가 부엌에 들어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제사에 쓸 밥을 며느리가 먼저 퍼먹었다며 온갖 학대를 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었다. 이듬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나무 가득 피워 냈다. 동네 사람들은 이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서 생긴 나무라 생각했고,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 불렀다.” 위 전설은 이팝나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푸레나뭇과 갈잎 큰 키 이팝나무의 탄생설화에는 서민의 가난한 삶이 배어있습니다. 이팝나무에 꽃이 피는 입하 때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가
[힌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노리개는 조선 여인네들의 한복 저고리 겉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꾸미개(장식)입니다. 모양이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노리개는 궁중 사람들은 물론이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겨 찼습니다. 몸에 차는 꾸미개는 원래 칼이나 숫돌 같은 삶에 필요한 물건을 허리에 찼던 북방 유목민들의 풍속이 전해진 것이라 하지요.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시대 귀족 부녀자들이 허리띠에 금방울금향낭(金香囊, 향주머니)을 찼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허리띠에 달았던 꾸미개들은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 대신 고름에 달게 되었지요. ▲ 대삼작노리개(왼쪽), 노리개 - 국립민속박물관 노리개는 대삼작, 중삼작, 소삼작으로 나뉘는데 대삼작노리개는 궁중이나 양반가의 혼례용으로 쓰였고, 중삼작노리개는 궁중과 양반들의 일상에서, 소삼작은 젊은 여성이나 아이들이 차던 것입니다. 특히 대삼작은 옥나비, 밀화불수(密花佛手, 밀랍 느낌의 천연호박으로 만든 꾸미개), 산호가지, 은장도 따위로 꾸며 매우 화려하지요. 노리개는 띠돈, 끈목, 꾸미개, 매듭, 술의 5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띠돈(帶金)은 노리개의 맨 윗부분에 달린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가서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할 때에 각기 제 주장대로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좋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 심히 우려하고 있노라.” 위는 《세종실록》 12년 7월 5일의 기록입니다. 세종임금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백성이 싫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생각이 만능이 아닐 수 있음을 잘 알고 임금이라도 맘대로 정책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벼슬아치들이 공정성을 잃어 양반과 부자만 좋게하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고 있음도 꿰뚫고 있습니다. 들판을 지나갈 때면 일산(日傘, 양산)과 부채를 쓰지 않았으며 말을 타고 가다가 농부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걸어 갔음은 물론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공법이라는 세제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직접 경기도 장단현 들판을 답사하기도 할 정도로 백성사랑에 철저했던 세종임금. 오늘은 바로 우리의 위대한 세종임금이 태어난 날입니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국의 전통 집에는 곡물을 비롯한 각종 물건을 넣어두는 방 또는 집을 일컫는 곳간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광이나 고방이라고도 하며, 따로 독립하여 있는 경우 곳집·곳간채라 부르기도 하지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보이는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는데, 그것을 부경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의 “부경”이 곳간과 같은 것으로 문헌상으로는 처음 나온 내용입니다. 《북사(北史)》 백제전 직관조와 《삼국사기》 신라 직관조에 나오는 “경부”도 역시 곳간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에는 여러 기능으로 나누어진 관설고(官設庫)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조선시대는 보통 집의 일부(주로 행랑채)를 칸막이해서 곳간으로 쓰거나 독립된 건물을 마당의 적당한 곳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곳간의 종류에는 넣어두는 물건에 따라 창고ㆍ곡간ㆍ찬광(반찬이나 반찬거리를 넣어 두는 광)ㆍ골방ㆍ서고로 나누기도 합니다. 문짝이 없는 광인 헛간은 따로 독립된 건물을 이루는 수도 있으나 보통은 행랑채나 안채의 일부로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지요. 행랑채에 부속된 헛간은 가마·수레 따위를 놓아두거나 작업용 기물을 두는 방으로 쓰이며, 안채에 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기록유산에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이 올랐을 정도이니까요. 이 가운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조선시대 임금의 비서실 기능을 했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날짜별로 기록한 책입니다. 원래 조선 건국 초부터 쓰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순종 4)까지 288년간의 기록 3,243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이라고 합니다. 1999년 4월 9일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9월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랐지요. 임금의 주변에서 있었던 세세한 부분까지 정리된 방대한 기록임은 물론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된 날씨, 1870년대 이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관한 기록 따위는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승정원일기》는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승정원에서 이루어진 기록인 만큼 임금의 기분, 숨결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놓은 것이지요. 승정원은 “후원(喉院)”이라고도 불렸는데 ‘후(喉)’는 목구멍을 뜻하는 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삼국시대 고구려가 당나라 수나라에 견주어 강력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한민족의 장기인 활이 중국에 견주어 그 성능이 월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강력한 활은 이민족과의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임금이 행차하여 대장군 이하 병사에 이르기까지 활로 과녁을 쏘게 하였다든가 백관이 활쏘기를 연습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관통력이 강한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특수부대 경궁군(梗弓軍)도 있었지요. ▲ 완성된 각궁의 모습 이후 조선시대에서도 화포가 나오기 이전까지 궁시는 주된 전투무기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각궁(角弓)과 편전(片箭)은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무기입니다. 삼국시대의 맥궁(貊弓)에서 비롯한 각궁은 무소뿔, 참나무, 소 힘줄, 실 등의 여러 재료를 복합해서 독특한 기술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그 탄력성이 외국의 활에 견주어 탁월하였지요. 대신 각궁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지만 각궁의 성능에 대해서는 1488년(성종 19)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부(朝鮮賦)》에서 “조선이 사용하는 화피궁(樺皮弓, 각궁)은 중국 제도에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위 노래는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정읍사’의 가사지요. 정읍사는 7세기 중반 이전부터 불리던 백제의 노래로 고려인들에게까지 전해졌다가 조선조에 와서 처음으로 문자화된, 한글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정읍현에 사는 어느 상인의 아내가 행상 나간 남편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높은 산에 올라가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부른 노래로 ‘달아 높이 떠서 멀리 비추어 우리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밝혀 주소서’ 하는 아내의 애달픈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위 “빗가락정읍”이라고도 부르는 정읍사는 조선 중기 이후 노래는 없어지고 지금은 관악 합주 형태로 남아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수제천(壽齊天)”입니다. 천상의 음악이라 불리는 이 수제천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메트로놈으로 측정하기 조차 힘들다는 곡의 느린 속도에 우선 놀랍니다. 이 곡은 이처럼 속도가 느릴뿐더러 한 박 한 박의 길이가 또한 불규칙하기 이를데 없기에 각 박의 길이가 똑같은 서양음악의 입장에서 보면 이 곡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 되고 맙니다. ▲ 천상의 음악 수제천을 연주하는 국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나무 위에 사는 영장류 중 가장 큰 오랑우탄이란 녀석이 있습니다. 서울동물원에 설명에 따르면 수컷은 보통 혼자 생활하지만 번식기가 되면 짝을 찾아 함께 생활한다고 하지요. 번식기에 짝을 고를 때 선택권은 암컷에게 있으며 한 마리 암컷이 여러 수컷과 교미를 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 녀석들은 대략 13~15 가지의 소리를 내는데 그 가운데 특이한 것은 1 km 밖에 있는 사람도 들을 수 있는 긴 신음소리로, 자신의 영역임을 다른 동물에게 알린다고 하지요.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에 나온 조리서 《소문사설(謏聞事說)》에도 오랑우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엔 어미가 새끼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그려놓고는 “《삼재도회》 <성성(猩猩)으로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일설에 따르면 오랑우탄이라고 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 《소문사설(謏聞事說)》에 나온 오랑우탄 또 “오랑우탄의 모습은 원숭이와 같고 털은 길며, 머리와 얼굴은 각지고 아이 울음 같은 소리를 내는데, 개 짖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시골 사람이 술과 짚신을 길가에 놓아두면 오랑우탄이 보고서 그 사람 조상의 이름을 들먹이며 욕하고 간다. 잠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정조(正祖, 1752~1800)는 재위 기간 내내 과중한 격무에 시달렸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을 쪼개어 많은 편지를 쓴 임금입니다. 그는 편지로 막후에서 정치에 활용하기도 했고, 인척과 가까운 신하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기도 했지요. 정조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했는데 다음의 숙모님께 드리는 편지를 보면 그의 어린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정조가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편지 “숙모님께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오며, 뵈온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워하였는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으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오니, 기쁘기 한이 없나이다. ― 원손(元孫) 올림" 정조가 아직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기 전 외숙모에게 보낸 한 통의 한글 편지입니다. 어린 왕세손이 편지를 보낸 외숙모는 사도세자의 빈(嬪)이던 혜경궁 홍씨의 친정 오라버니댁큰 외숙모인 여흥 민씨에게 보낸 것이지요. 편지 내용을 보면 외가의 집안 어른께 문안을 드리는 편지의 형식에 맞추어 편지를 쓰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며 어린 감수성이 그대로 묻어나온 여느 아이의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 20여년 전만해도 청계천 6~7가에는 헌책방이 즐비했다. 뿐만이 아니라 헌책방을 순례하는 사람도 많아서 길을 지나다니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새학기만 되면 교과서나 참고서를 사려는 학생들과 학부모들로 북새통을 이뤘는데 2평 남짓한 가게에 10여명의 손님이 들어서면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가게 가운데 하나가 배동근 선생이 대표로 있는 유림사이다. 배 사장은 헌책방 사업으로 45년간 잔뼈가 굵은 그야말로 현직 헌책방가의 최고 전문가이다. 그런 배 사장도 헌책방 사양길에다가 나이도 80이 되니 손을 놓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는 이달 말로 한 평생 끈을 놓지 않았던 헌책방 사업과 이별을 한다. 그가 청계천 헌책방가를 떠나기 전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청계천 헌책방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유림사가 바로그 한책방가의 역사를묵묵히 간직해온 곳이다 ▲ 헌책방가 앞 인도에까지 엄청난 책이 쌓여있다. - 언제 어떤 계기로 헌책방을 하게 됐나요? 내 고향이 부산인데 헌책방골목으로 유명한 보수동에 아버지가 책가게를 세 개나 세를 내주고 계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물려받아 1970년부터 헌책방 사업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