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왜구를 물리치는데 가장 공을 많이 세워 세력을 키운 이성계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조선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백성은 태조 이성계가 군사력에 의해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하여 흔쾌히 새 왕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태조는 조선 개국이 단순히 무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인 천명(天命)을 받고 세웠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천명에 따라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말로만 해서는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태조로서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때 마침 한 백성이 옛날 고구려시대 평양성에 있었던 돌판에 새긴 천문도의 탁본을 바칩니다. 태조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 천문도를 바탕으로 새롭게 고쳐 돌판에 조선의 천문도를 새길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것이 태조 4년(1395)에 돌판에 별자리를 새겨서 제작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지요. ▲ 국보 제1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의 의미를 살펴보면 천상(天象)이란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천체와 천문 현상을 말하고, 열차(列次)는 천체들을 선후의 순서에 따라 펼쳐 놓았다는 것입니다. 또 분야(分野)는 땅에도 여러 나라가 일정한 영역으로 나뉘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는 엉뚱한 말에 밀려 본래의 우리말이 잊혀 가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바로 “혼인(婚姻)”도 그 하나로 지금은 모두가 “결혼(結婚)”이란 말을 쓰고 있지요. 뭐가 문제일까요? 먼저 혼인이란 말을 살펴보면 혼(婚)은 혼인할 "혼"이기도 하지만 "아내의 친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姻)은 "사위의 집"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혼인이란 말은 아내와 사위 곧 “남녀가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結婚)”이란 말은 인(姻)이 없음으로 남자가 장가간다는 뜻만 있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에 대한 의미는 없습니다. 따라서 “혼인”에 견주면 “결혼”은 남녀차별적인 말이라 할 수 있지요. “혼인”이란 말뿐이 아니라 우리 겨레는 혼인하는 시각도 양을 대표하는 해와 음을 대표하는 달이 만나는 시각(해와 달은 하루에 새벽과 저녁 두 번 만난다) 가운데 저녁 시간인 유(酉)시 곧, 5시에서 7시 사이에 치렀는데 이는 음과 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하려는 철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남녀의 짝을 배필(配匹)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酉)시에 나(己)의 짝(配)을 맞이한다는 뜻이 들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음력 3월 3일 삼짇날입니다. 삼짇날에는 별명도 많은데 강남 갔던 제비오는날, 삼질(삼짇날의준말), 삼샛날, 여자(女子)의날, 삼중일(三重日), 삼진일(三辰日), 상사일(上巳日), 상제(上除), 원사일(元巳日), 중삼일(重三日), 답청절(踏靑節), 계음일(禊飮日) 따위가 그것이지요. 고려시대에는 9대 속절(俗節)의 하나였던 삼짇날은 양의 수가 겹치는 날로 파릇파릇한 풀이 돋고 꽃들이 피어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삼짇날에는 화전(花煎), 화면(花麵), 수면(水麵), 산떡(餠, 꼽장떡), 고리떡(環餠) 같은 명절음식을 해서 먹습니다. 화전(花煎)은 찹쌀가루에 반죽을 하여 참기름을 발라가면서 둥글게 지져 먹는 것이고, 화면(花麵)은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혀서 가늘게 썰어 오미자(五味子) 물에 넣고, 또 꿀을 타고 잣을 넣어 먹는 것입니다. 더러는 진달래꽃을 따다가 녹두가루와 반죽하여 만들기도 하며, 붉은색으로 물을 들이고 꿀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하여 제사상에도 올립니다. 또 산떡(餠, 꼽장떡)이라 하여 방울 모양으로 떡을 만들어 속에 팥을 넣고, 떡에다 다섯 가지 색깔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여섯째 절기 곡우(穀雨)입니다. 곡우는 봄비가 내려 모든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곡우 무렵이면 못자리를 마련하는 것부터 해서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 같은 속담이 전합니다. 곡우가 되면 농사의 시작인 볍씨를 담그며, 볍씨를 담아두었던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지요. 이때 초상집에 가거나 부정한 일을 당하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불을 놓아 그 위를 건너게 하여 악귀를 몰아낸 다음 집 안에 들이고, 집 안에 들어와서도 볍씨를 보지 않도록 합니다.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거나 만지게 되면 싹이 잘 트지 않아 그 해 농사를 망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 농사를 위해 부부 잠자리도 꺼리는 날, 곡우(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또 이날은 부부가 함께 잠을 자지 않습니다. 이는 부부가 잠자리를 하면 토신(土神)이 질투하여 쭉정이 농사를 짓게 만든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강원도 평창에서는 곡우날 사시(巳時, 이른 9시부터 11시까지)에 볍씨를 담그면 볍씨
▲ 고종명성후 가례 재현 행사에서 선보이는 궁중정재 ▲ 황후가 임금이 계신 북녘을 향해 4번 절을 하고 교명을 받는다. ▲ 교명을 받은 황후가 정좌하고 상궁들로부터 절을 받는다. ▲ 명성황후를 모셔갈 가마가 운현궁에 당도해 기다리고 있다. ▲ 고종임금이 어가를 타고 명성황후를 맞으러 운현궁으로 들어오고 있다. ▲ 고종과 명성황후가 좌정하고 있다. ▲ 명성황후가 비수책의식과 친영의식을 마치고 궁궐로 가기 위해 가마를 타러 가고 있다. ▲ 드디어 황후를 맞은 고종이 황후와 함께 궁궐로 가려고 어가를 탔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4월 18일 늦은 2시 서울 운현궁에서는 서울시 주최, 한국의 장 주관으로 고종명성후 가례 재현 행사가 열렸다. 가례(嘉禮)는 임금을 비롯하여 왕세손과 같이 왕통을 이어나갈 왕실혼례를 가리킨다. 그 절차는 먼저 간택된 왕비가 머물고 있는 별궁에 대궐에서 사신을 보내 청혼을 하는 납채(納采), 대궐에서 사신을 시켜 별궁에 예물을 보내는 납징(納徵), 대궐에서 가례일로 정하여 별궁에 알려주는 고기(告期),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과 별궁에 사자를 보내어 왕비가 책봉을 받도록 하는 책비(冊妃),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 십여 년 전 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물고기를 뽑으려고 투표를 했는데 그 결과 우리가 익히 아는 쉬리와 쏘가리가 2, 3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으뜸으로 뽑힌 물고기는 뜻밖에도 “각시붕어”였지요. 각시붕어는 잉어목 납자루아과에 속한 물고기로 몸길이 4∼5㎝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물고기입니다. 몸과 머리는 옆으로 납작하고 몸높이가 높습니다. 몸빛깔은 등쪽이 담갈색이고, 등지느러미 앞의 등쪽과 꼬리자루의 빛깔이 짙고, 옆구리는 푸른빛을 띤 은백색이지요. ▲ 색동치마를 입은 듯 예쁜 각시붕어(www.yasamo.so.kr 제공) 각시붕어는 흐름이 빠르지 않은 시내 가장자리의 물풀이 무성한 진흙 바닥과 연못에서 삽니다. 헤엄치는 동작은 재빠르지 못하고, 놀라면 물풀이나 돌 사이로 숨습니다. 각시붕어는 4월 하순에서 6월 중순에 특이하게도 조개의 몸 안에 알을 낳지요. 한국 특산종으로 낙동강이나 남부지역 물가에서 삽니다. 붉게 물든 야무진 눈하며, 은은한 색동치마를 입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각시붕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예쁜 녀석입니다. 각시붕어는 더러운 물에도 잘 살아서 3급수 물에서도 보이지요. 다만,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올해는 광복 70돌을 맞는 해이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독립하기까지는 수없는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있었다. 그 가운데 우뚝 선 이가 바로 안중근 의사이다. 1926년 10월 26일 우리 겨레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형식적인 일본 법정에서의 항소를 초기하고 1927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 안중근 의사 / 의거 직후 체포되어 찍은 사진, 러시아헌병대가 찍은 사진,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 안응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찍은 사진(왼쪽부터 시계방향) 그 안중근 의사를 기록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는 특별전 울림, 안중근을 만나다가 오는 6월 7일까지 서울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특별전은 제1부 [하얼빈 역에 울린 총성]에서 애국계몽운동에서 의거에 이르기까지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안중근 의사의 삶의 여정을 관련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또 제2부 [뤼순에 울린 외침]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의거 이후 재판정에서 밝힌 의거의 진정한 목적과 동양 평화에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돌이켜 여러 가지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서 어찌할 것인가? / 등불을 돌려놓고 푸른 거문고를 비스듬이 안고서 / 벽련화 한 곡조를 시름으로 함께 섞어서 연주하니 /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 망주석에 천 년 만에 찾아온 이별한 학이 울고 있는 듯 / 아름다운 여인네의 손으로 타는 솜씨는 옛날 가락 그대로 이건만은 / 연꽃무늬 휘장이 드리워진 방 안이 텅 비었으니, 누구의 귀에 들리겠는가? / 간장이 구곡되어 굽이굽이 끊어질 듯 애통하구나.” ▲ ≪교주가곡집 校註歌曲集≫의 <규원가(閨怨歌)> 위 시는 조선 중기에 지어진 가사 <규원가(閨怨歌)>를 현대어로 뒤친 일부인데 ‘원부사(怨夫詞, 怨婦詞)’ 또는 ‘원부가(怨婦歌)’라고도 합니다. ≪고금가곡 古今歌曲≫과 ≪교주가곡집 校註歌曲集≫에 실려 전하지요. 작자는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과 ≪교주가곡집≫에는 허난설헌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에서는 <원부사>를 허균(許筠)의 첩 무옥(巫玉)이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아름답던 자신이 늙어버리자 남편은 떠나가고 이미 떠난 임인데도 그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일본 중위가 4월 15일 오후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유시와 훈계를 한다고 기독교도들을 모두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그 중위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 했으나 병사들은 내민 어린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 일본군이 불을 질러 폐허가 된 제암리 마을 (제암리3ㆍ1운동순국기념관) 이는 민간인 학살현장인 화성 제암리교회의 참사 현장을 목격한 전동례 할머니의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군은 학살 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두 번 죽인 셈이지요. 이때 갓난아이를 업은 김씨 부인 (1899 ~ 1919. 4.15)도 현장에서 참혹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씨 부인은 남편 강태성과 함께 화성 출신으로 제암리교회 참사가 일어나기 전인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가 쓰던 칼에는 몸에 지니는 자그마한 장도(粧刀)가 있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장도 하나씩을 품에 지니고 다녔지요. 호신과 함께 장식용으로 장도를 차는 풍습이 생긴 것은 고려 때부터인데,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널리 보편화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혼인을 축하하거나 어른이 된 것을 기념하여 장도를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받는 이를 온갖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바람이 담겨 있었지요. 장도는 일상생활에 쓰기도 하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치레(장식)의 구실도 하는데, 부녀자가 정절을 잃을 위험이 닥쳤을 때는 장도로 자결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장도는 패도(佩刀), 운검(雲劍), 패검(佩劍)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가운데 보통 허리 따위에 차는 것을 패도(佩刀)라 하고, 특별히 주머니 속에 넣는 것은 낭도(囊刀)라 했지요. 또 모양으로 볼 때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칼의 모양이 반달처럼 굽어있는 모양의 패도와 칼이 일직선인 운도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 몸에 지니는 자그마한 칼 장도(粧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도는 칼자루, 칼날, 칼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때 칼날의 길이는 3~5치(1치 약 3.03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