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답장을 올립니다. 소생은 시문을 지어, 남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세상에 전해지기도 바라지 않으며, 소생 혼자 즐길 뿐입니다. 시문 한 구절을 억지로 귀인에게 빼앗겨서, 그것이 다른 이에게 읽히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져 땀이 솟는 것을 그치지 못합니다. 그간 지은 여러 시들은 지금 모두 한바탕 불길에 태워버려, 한 편의 종이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소생이 귀인에게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깊게 가지고 있지만, 소생의 시문을 남에게 보이기 원치 않는 것은 곧 평소의 저의 뜻이므로, 비록 기쁨을 얻는다 하더라도 소생의 뜻에 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해량하소서." ― <답상서答上書> ▲ 〈이언진 시〉, 『근묵』, 행서, 22×9.6㎝,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이 편지는 역관 이언진(李彦, 1740~1766)이 서얼시인 성대중(成大中)에게서 받은 자신의 시문을 보고 싶다고 한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이언진은 평소 자신의 시문이 남에게 인정받거나 심지어 읽히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이언진은 자신이 쓴 글을 ‘유희고(游戱稿)’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누구에게 보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어제는 얼레빗이 드디어 3,000회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저 겨레문화가 좋고 글쓰기가 좋아서 시작한 것이 10년이 넘고 3,000회에 다다른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그만 두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발송시각은 다가오는데 뭘 쓸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을 때와 웹호스팅의 문제로 이미지가 뜨지 않을 때의 초조함은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자초하나 자책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레빗을 기다리는 수많은 독자들을 생각하자니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 키 쓰고 소금받던 어린 시절(뉴스툰, 왼쪽), 오줌싸개 치료법(1932년. 9. 28. 동아일보) 그동안 쓴 글들을 보면 “새해 첫 토끼날 누가 먼저 대문을 열까?”, “오줌싸개 시간표와 재미난 치료법”, “수박을 훔친 주방장, 곤장 10대 맞고 귀양 가다”, “마누라 치마까지 벗겨가던 투전” 따위 민속과 관련된 얘기들이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신 차리고 빚어야 하는 궁중 떡 혼돈병”, “머리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살쩍밀이”, “출장 가는 소반 공고상을 아십니까?” 따위의 의식주 관련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또 “도공의 익살, 백자철화끈무늬병”, “주인공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쓰지 않고 발행한 백지 임명장 “공명첩(空名帖)”이 있었습니다. 공명첩에는 먼저 관직·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 양역(良役)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空名免役帖), 천인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空名免賤帖), 향리에게 향리의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空名免鄕帖) 따위가 있었지요. 이 제도는 임진왜란 중에 나타난 것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 또는 납속(納粟)이라 하여 흉년이나 전란 때에 나라에 곡식을 바친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나라에 돈이 없거나 군량이 부족할 때, 또는 흉년으로 굶어 죽는 백성을 도와주기 위해 수시로 발행했으며, 심지어는 절의 중수 비용을 위한 것으로도 남발하였지요. 그런 과정에서 관리들의 횡포가 심해 백성은 더욱 고통스러워했습니다. ▲ 나중에 써서 이름이 다른 글씨보다 작은 최춘건의 공명첩(전북대 박물관) 면역·면천·면향을 위한 공명첩은 신분의 오르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실제 관직을 주지 않고 발행하는 이름뿐인 고신공명첩(告身空名帖)도 많았지요. 특히 공명첩은 요호부민 곧 부자들에게 돈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전통혼례에서 신랑 일행이 혼례를 올리러 신부집으로 향할 때, 목기러기를 들고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기럭아비 또는 안부(雁夫)라고 합니다. 신랑이 신부집 안마당에 준비한 초례청(醮禮廳)에 사모관대로 정장을 하고 들어서면 신부집에서는 전안청(奠雁廳)이라 하여 낮은 상 위에 붉은 보를 깔고 뒤에 병풍을 쳐두지요. 신랑이 이곳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으면 기럭아비가 기러기를 신랑에게 넘겨줍니다. ▲ 전통혼례의 "전안례"에 쓰이는 목기러기(한국문화대백과) 신랑은 이것을 받아 상 위에 놓고 목기러기를 향해 두 번 절을 합니다. 이런 예식을 기러기에게 제사 지낸다는 뜻으로 “전안지례(奠雁之禮)”라 하지요. 이것은 남자가 부인을 맞아 기러기와 같이 백년해로를 하고 살기를 맹서하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암컷과 수컷이 한번 배우자로 택하면 평생 동안 다른 기러기를 돌아보지 않으며, 한 쪽이 죽으면 다른 쪽이 따라 죽는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전안지례는 혼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남자가 하늘에 부부되기를 맹세하는 의례인 것이지요. ▲ 김홍도 《풍속화첩 》가운데 <신행>, 보물 제527호, 총사초롱 뒤 기럭아비가 목기러기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지게는 우리 겨레가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 지게를 가지고 노는 민속놀이가 충남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데 바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7호 “공주선학리지게놀이”가 그것입니다. 이 놀이는 산골이어서 농업의 이동수단으로서 지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마을 사람들이 힘들게 지게를 지고 이동할 때 이를 좀 더 즐겁게 해보기 위해 놀이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 우리 겨레가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 "지게" 지게 놀이는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흰색 한복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지게와 농기구 등을 든 채 길게 줄지어서 하게 됩니다. 순서는 지게작대기 걸음마와 작대기 고누기, 지게 힘자랑, 지게지네발걷기, 지게작대기장단, 지게풍장, 지게상여, 지게호미끌기, 지게꽃나비로 구성됩니다. 이 가운데 지게작대기 걸음마와 작대기 고누기는 지게와 작대기에 각각 올라 걸음마를 하고 작대기 위에 오래 버티기를 하는 놀이지요. ▲ <공주선학리지게놀이> 가운데 "지게꽃나비" 모습 (문화재청 제공) 또 지게지네발걷기는 지게를 연결하여 그 위를 걷는 것이고, 지게호미끌기는 두레를 마치고 호미를 지게고리에 걸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다섯째 청명(淸明)인데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생겼다. 이날 성묘를 간다. 옛날에는 한 해에 네 번, 곧 봄에는 청명, 여름에는 중원(中元, 음력 7월 15일), 가을에는 한가위, 겨울에는 동지에 성묘를 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청명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 판서, 문무백관 3백60 고을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했다. 수령들은 한식(寒食)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로서 국가 의식을 다졌다. 꺼지기 쉬운 불이어서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藏火筒)에 담아 팔도로 불을 보냈는데 그 불씨통은 뱀이나 닭껍질로 만든 주머니로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씨앗 태운 재에 묻어 운반했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세상이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어 어떤 때는 완전히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병 아닌 마음의 병을 앓고 있으니, 누가 다시 이런 제 심정을 알아주기나 하겠습니까? 소문을 들으면, 북쪽에 큰 소요가 있고 또 청성의 변이 있다고 합니다만, 각 신문들은 검열을 받고 구속을 당하는 상황이라 사실을 보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온 세상이 귀가 멀고 눈마저 멀어 마치 개벽이 되는 와중의 혼돈 상태와 같으니, 가슴을 치며 미친 듯이 울부짖을 뿐입니다.” ― 여이난곡건방與李蘭谷建芳 ― ▲ 우국지사 매천 황현 위는 1910년 7월 28일에 심교(心交, 마음을 터놓고 사귀는 벗)를 나누었던 이건방(李建芳, 1861~1939)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황현은 갈수록 세상이 혼란스러워져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말하며 차마 망국의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쓴지 얼마 되지 않아 황현의 예견대로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맙니다. 황현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1910년 음력 8월 6일 새벽녘 자결했습니다. 그는 절
[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맹골도 앞 바다 물을 다 마셔서 우리에 자식들을 건질 수만 있다면은 엄마인 이 에미는 저 거친 바다를 다 마시겠다. 눈물과 바다를 서로서로 바꾸어서 자식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은 엄마인 나는 삼백 예순 날 통곡을 하겠노라 ▲ 삭발을 하는 416 희생자 가족들 도종환 시인이 시를 쓰고 정철호 명인이 작창하여 김수연 명창이 부른 창작판소리 맹골도 앞 바다의 깊은 슬픔이다. 이제 진도 앞바다에서 생떼 같은 젊은 300여 명의 학생들이 세월호 안에 갇혀 죽은 지 벌써 1주기가 돌아온다. 그러나 아직도 진상규명위원회는 꾸려지지 못했고, 진실은 저 깊은 바다 속에 아직 잠겨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세월호 관련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했고 이에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는 2일 늦은 1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희생자와 피해가족들을 돈으로 능욕한 정부 규탄 및 배보상 절차 전면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삭발을 했다. 그러면서 416가족협의회는 정부 시행령안을 즉시 폐기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시행령안을 수용공포할 것, 정부는 참사 1주기 전에 세월호 인양을 공식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만고절창] 외부에서 일전에 유성기를 사서 각항 노래 곡조를 불러 유성기 속에다 넣고, 해부(該部, 예조) 대신 이하 제 관인이 춘경을 구경하랴고 삼청동 감은정에다 잔치를 배설하고, 서양 사람이 모든 기계를 운전하야 쓰는데, 먼저 명창 광대의 춘향가를 넣고, 그 다음에 기생 화용과 및 금랑 가사를 넣고, 말경에 진고개패 계집 산홍과 및 사나이 학봉 등의 잡가를 넣었는데, 기관(器管) 되는 작은 기계를 바꾸어 꾸미면 먼저 넣었던 각항 곡조와 같이 그 속에서 완연히 나오는지라. 보고 듣는 이들이 구름같이 모여 모두 기이하다고 칭찬하며 종일토록 놀았다더라.” ▲ "말하는 기계"라고 광고한 에디슨식 유성기의 <만세보> 1907년 광고 위는 <독립신문> 1899년 4월 20일 기사 내용인데 레코드 음반 초기 형태인 실린더 레코드를 들려주고 돈을 받았던 “감상소”의 정경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감상소가 봉상시(현 서울역사박물관) 건너편 북물골, 증청방(현재 수송동, 청진동 부근), 광통교(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큰 길을 잇는 청계천 위에 걸려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 같은 곳에서 성업했다고 하지요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희뿌연 매화꽃은 더욱 빛나고 새파란 대나무는 한결 고와라 난간에서 차마 내려가지 못하나니 둥근 달 떠오르기 기다리려 함이네“ 위는 선조 때 여류 시인 이옥봉의 ‘난간에 기대어’에 속에 나오는 “매화꽃”입니다. 매화는 예부터 우리 겨레가 사랑해 오던 꽃으로 요즈음 온 나라가 매화꽃 잔치로 한창입니다. 매화를 사랑한 여성으로는 신사임당의 달인 이매창도 있는데 그녀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뛰어난 매화 그림을 그렸지요. ▲ 신사임당 딸 이매창 매화그림 강릉 오죽헌 신사임당기념관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1971.12.16 지정) 신사임당 딸 이매창의 매화도가 한 장 전해옵니다. 매창매화도(梅窓梅花圖)로 전하는 이 그림은 가로 26.5㎝, 세로 30㎝의 종이에 그린 묵화로, 굵은 가지와 잔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은은한 달빛아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는 매화를 실제로 보는 듯 하며, 깔끔한 분위기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오누이 관계인 이옥산이 그린 국화도도 전해옵니다. (국화도는 가로 25㎝, 세로 35㎝ 크기의 종이에 그린 묵화) 요즈음 피는 매화는 예쁜 꽃을 보기 위해 여러 품종을 접붙여 만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