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삼현육각은 일반적으로 피리 2인, 대금 1인, 해금 1인, 북 1인, 장고 1인 등 6인의 연주자가 5종의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형태로 알려져 있다. 맞는 답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의 무동(舞童)이라는 그림을 보면 무동은 한삼을 뿌리며 춤을 추는데 그 옆에는 6인의 연주자가 앉아서 반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악기 편성이 삼현육각이다. 한국전통음악학회장 서한범 명예교수는 삼현육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삼현육각을 전승하기 위한 최경만 명인(회장)의 삼현육각피리보존회가 어제(3월 31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서한범 교수의 해설로 제1회 발표회를 가졌다. 피리, 대금, 해금, 등 선율악기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의 형태로 멜로디를 주고받으며, 장고와 북이 한배를 짚어나가는 진행이어서 최소한의 편성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편성임이 분명하다는 삼현육각. 공연의 시작은 대영산 곧 민간관악영산회상이었다. 대영산은 조선후기에 궁중이나 지방관아의 잔치에서 무용 반주음악으로 쓰던 음악인 관악영산회상이 민간에서 굿음악, 무용반주, 탈춤반주 따위에 쓰이며, 전승된 곡이다. ▲ 대영산(민간관악영산회상)을 연주하는 최경만 명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추운 겨울이 있어 꽃은 더 아름답게 피고 줄기가 솔잎처럼 가늘어도 꽃을 피울 수 있다며 작은 꽃을 나지막하게라도 피우면 많다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높다고 귀한 것은 더욱 아닐 것이라며 나로 인하여 누군가 한 사람이 봄을 화사하게 맞을 수 있다면 어디에고 사는 보람이 아니겠느냐고 귀여운 꽃으로 말하는 봄맞이꽃“ <봄맞이꽃> - 김윤현 ▲ 봄맞이꽃, 사진작가 이명호 제공 눈 속에서 핀다는 설중매(매화), 눈을 뚫고 핀다는 얼음새꽃은 봄이 오기도 전에 꽃을 피워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매화나 얼음새꽃보다 오히려 봄을 제대로 맞이하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앵초과의 봄맞이꽃(Androsace umbellata)이 그 녀석인데 볕이 잘 드는 산기슭의 풀밭이나, 밭둑, 길가, 언덕에서 봄맞이를 하지요. 다른 이름으로는 보춘화(報春花), 점지매(点地梅), 동전초(銅錢草), 후선초(喉癬草), 후롱초, 봄마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봄맞이꽃은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풀로 높이 10cm안팎이이어서 사람이 키를 낮추고 보지 않으면 잘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잎이 뿌리에서 나와 지면으로 퍼져 마치 방석 모양으로 촘촘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본래 이덕무는 독서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서얼의 처지기에 벼슬을 할 수도 없었고, 오로지 책을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지요. 이덕무는 《간서치전(看書痴傳)》에서 목멱산 아래 바보가 있다고 하여 자신을 독서에 미친 매니아 곧 “독서광(讀書狂)”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의 벗 이서구(李書九, 1754~1825)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내 집에서 가장 좋은 물건은 단지 《맹자(孟子)》 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잎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冷齋) 유득공(柳得恭)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소. 이는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러고는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칭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겠소?” ▲ 청장관 이덕무가 쓴 편지 이덕무처럼 유득공도 서얼 신분으로 가난에 굶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나는 생각건대, 세자를 세워 적통을 수립하는 것은 종조를 계승하기 위함이요, 지위를 정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기대를 묶어 놓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대대로 중하게 여겼던 일이니 어찌 어리다고 해서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옛 법을 따라 삼가 아름다운 식전을 펼친다. (중간 줄임) 이미 훌륭한 소문이 일찍이 전파되었으니 마땅히 책호를 하루속히 정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의 뜻에 따라 이에 세자를 정하고 이제 너를 왕세자로 명한다.” 위는 현종이 1667년(현종 8) 현종과 명성왕후 김 씨 사이에 태어난 원자(뒤에 숙종 : 1661~1720)를 7살이 되던 해 관례를 행한 뒤 1월 2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세자로 책봉하는 의식을 치르기 전 발표한 책례교문(冊禮敎文)의 일부입니다. 어린 원자가 자라나서 나이가 차면 선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책봉됩니다.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冊封)되는 의례를 책례(冊禮)라고 하였으며, 왕세자 책봉을 준비하는 임시 기구인 책례도감(冊禮都監)이 만들어졌습니다. 책례도감에서는 책봉에 필요한 의장(儀仗)과 물품을 준비하고, 행사가 끝나면 《세자책례도감의궤世子冊禮都監儀軌》를 펴냈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 선생이 안중근 의사 의거에 대해 쓴 시입니다. 오늘은 우리 겨레의 원수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한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지요.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아침 9시 무렵 하얼삔역 이등박문이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걸어가자, 안 의사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습니다. ▲ 안중근 의사와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의 시화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을 쓰러뜨리고 이어 뒤를 따르는 일본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전중청태랑(田中淸太郞)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리고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지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겨레는 물론론 청·일전쟁 이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떨고 있던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견마꾼은 사람이 탄 말이나 당나귀를 끄는 마부를 말합니다. 조선시대의 사복시(司僕寺)에 소속되어 임금이나 세자·군의 경마를 잡던 견마배(牽馬陪)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견마배는 중종 때에 잡직 종7품을 받았고, 거달(巨達)이라고도 하였지요. 견마는 원칙적으로 문무관에게만 허용되었으나, 민간에서도 성행하였습니다. 조선 말기까지도 양반이 출입을 할 때에는 반드시 과하마(果下馬, 키가 3척-약 90cm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고서도 능히 과실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작은 토종말)라도 타고 다녀야 체면치레가 되었기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견마꾼이어서 편발의 동자 곧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은 어린 아이까지도 견마를 잡히었다고 합니다. ▲ 김홍도의 "안릉신영도"에는 말을 견마꾼들이 끌고 있다. 그러나 멀리 나들이를 해야 할 때에는 마방(馬房, 마굿간 있는 주막집)에서 말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도 말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 견마꾼이었습니다. 이들 견마꾼들은 나그네가 가야 할 곳의 지리까지도 훤하게 꿰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편리했지요. 또 여울을 건너야 할 때도 견마꾼이 있으면 별도의 월천꾼(업어서 여울을 건네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나라는 가면극이 여러 곳에 있는데 북쪽에는 함경도에 북청사자놀음이 있고 황해도에는 해서가면극 곧 강령, 은율, 봉산탈춤이 있습니다. 중부지역에는 양주별산대와 송파산대놀이가 있으며, 동해안쪽에는 강릉 관노가면극과 구룡포의 호탈굿놀이가, 또 안동에는 하회별신굿 탈놀이도 있지요. 남부지역에는 통영, 고성에 오광대 탈놀이가 있고, 부산 쪽에는 동래야류와 수영야류가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는 그 역사가 200년이 훨씬 넘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부산 동래에 전승된 이 가면극에 “야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놀이가 주로 들판에서 놀아졌다고 하여 “야유(野遊)”가 되었고, 이 야유가 부르기 쉽도록 “야류”로 바뀐 것으로 봅니다. 그밖에도 이 놀이를 밤에 놀았다고 하여 야유(夜遊)라 불렀으며, 또 극의 내용이 말뚝이가 양반을 조롱한다고 하여 야유(揶揄)라 하기도 했고, 양반들이 백성들을 괴롭혔으므로 이를 응징하기 위해 쇠를 두드리듯 두들겨 주고 싶은 심정에서 야유(冶遊)라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 동래야류 가운데 말뚝이탈, 원양반탈, 큰문둥이탈(왼쪽부터) ▲ 동래야류에서 말뚝이가 등장한다(문화재청) 동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1908년 3월 23일 이른 9시30분 무렵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정거장 앞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한국민족운동사상 첫 의열투쟁이 만천하에 울려 퍼진 것입니다. 장인환(張仁煥, 1876.3.10~1930.5.22)과 전명운((田明雲, 1884.6.25∼1947.11.19) 두 의사가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제 한국침략의 앞잡이로 광분하던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 Steve ns)를 총살 응징한 것이지요. ▲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왼쪽), 전명운 의사 육혈포라 불리던 권총을 들고 대기 중이던 전명운 선생이 먼저 앞으로 다가서며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불발되자 그는 총대를 잡고 총두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맹타했고, 스티븐스는 그를 잡으려 했지요. 이 순간 스티븐스의 뒤에서 역시 권총을 품고 기다리던 장인환이 세 번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첫발은 아쉽게도 전명운의 어깨에 관통상을 입혔지만, 제2발과 3발은 스티븐스를 명중시켜 그 자리에 쓰러뜨렸지요.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이틀 뒤 25일에 죽었고, 다행히 전명운 의사는 치명상은 아니어서 치료 후 퇴원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야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 감옥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야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야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안중근의사는 우리 겨레의 원수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05년 전 3월 26일은 위와 같은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평화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는 공동으로 21일 늦은 2시 효창원 안중근의사 묘역에서 안중근의사 순국 105주년 추모식을 거행했다. ▲ 추모식장 위편에는 추모식장임을 알리는 커다란 펼침막이 있다. ▲ 추모식 전경 이날 행사는 특별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치러졌다. 먼저 안중근 의사 유언은 고려대학교 사학과 최대영 학생이 낭독했고, 추모사도 어른들보다 먼저 초등학교 학생과 고등학교 학생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매원초등학교 김민규, 김민지 양은 저희는 오늘을 시작으로 미래의 안중근이 될 것입니다. 안중근의사님께서 돌아가신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올제(내일)는 24절기의 네 번째 절기로 춘분(春分)입니다. 이날은 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 곧 춘분점(春分點)에 이르렀을 때지요. 이날은 음양이 서로 반인만큼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다고 보며, 이 절기를 전후하여 농가에서는 봄보리를 갈고 논갈이를 하며 담도 고치고 들나물을 캐어먹습니다. 이날 날씨를 보아 그 해 농사의 풍년이 들 것인지 물난리가 날 것인지를 점치기도 하였지요.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권15 증보사시찬요(增補四時纂要)에 따르면, 춘분에 비가 오면 병자가 드물다고 하고, 이날은 어두워 해가 보이지 않는 것이 좋으며, 해가 뜰 때 정동(正東)쪽에 푸른 구름 기운이 있으면 보리에 적당하여 보리 풍년이 들고, 만약 청명하고 구름이 없으면 만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열병이 많다고 믿었습니다. 또 한편으론 이날 구름 기운을 보아, 푸르면 병충해, 붉으면 가뭄, 검으면 물난리, 누런 빛깔이면 풍년이 된다고 점치기도 했지요. ▲ 김홍도 "점심" <풍속도화첩(보물 제527호)> 특히 춘분은 농사가 시작되는 때로 "하루 밭 갈지 않으면 한해 내내 배고프다"라고 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