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지난 2011년에는 “조선 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란 영화가 상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인기에 이어 지금은 그 2편인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이 상영되고 있지요. 두 편 모두 조선시대의 탐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이들은 “조선시대에 웬 탄정”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조선시대에는 과학수사가 이루어졌다고 하지요. 그 예를 들면 정조 31년(1796), 황해도 평산 서봉방의 장옹암 마을에서 양반 양성한이라는 젊은 남자가 자살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 등 특수한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의 사또가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가 검시를 해야 했기에 평산부사 유광천은 곧바로 사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때 작성한 유광천의 검시보고서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적혀있었습니다. ▲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의 주검 부위 표시 “두 눈은 감고 입은 약간 벌리고 코피가 흘렀는데 온몸의 살빛이 누렇고 배는 부풀지지 않았으며, 구타 등의 상처도 없었으므로 약물사고로 추측되었다. 독을 먹었는지 확인하려고 은비녀를 항문에 집어넣었더니 금방 검은빛으로 변하였다. 똥을 채취하여 가열했더니 흰색의 소금 결정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지난 3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청 대회의실에서는 (사)정암학회와 (사)한국미디어컨텐츠학술연합 공동주최로 병자호란 수지전투 378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은 특히 1637년 수지 광교산 자락에서 호항골 대첩을 이끈 김준룡 장군(원주김씨대종회)과 머흐내 고개에서 순절한 최진립 장군(경주최씨중앙종회)의 후손들도 대거 참여하여 대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 병자호란 수지전투 378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모습 ▲ 개회사를 하는 최창섭 (사)미디어컴텐츠학술연합 공동의장,영상 격려사르 하는 남경필 경기도지사, 축사를 하는 경주최씨 중앙종회 최염 회장(왼쪽부터) 심포지엄의 시작은 먼저 국기에 대한 절,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에 이어 특별히 병자호란 때 수지전투에서 순국한 분들에 대한 읍례 4배와 정음경(세종어제 훈민정음) 낭송을 했다. 이어서 최창섭 (사)미디어컴텐츠학술연합 공동의장의 개회사와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영상 격려사 그리고 경주최씨 중앙종회 최염 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이후 진용옥 경희대 명예교수의 병자호란 수지전투 ; 호항골 대첩과 험천현 전투 조선 무신 선비들의 청부정신과 사생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뒤웅박”이란 쪼개지 않고, 꼭지 가까이에 주먹만 한 구멍을 뚫고 속을 파내어 만든 바가지를 말합니다. 사투리로 두뱅이ㆍ주룸박ㆍ두룸박이라고도 부르지요. 보통은 바가지처럼 둥글지만, 호리병처럼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박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뒤웅박이 터지거나 깨질 수 있기 때문에 대오리로 그물처럼 만들어 덧싸기도 했지요. 뒤웅박은 습기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여름철에 밥을 담아두면 잘 쉬지 않습니다. 또 뒤웅박에는 씨앗을 갈무리하거나 달걀 따위도 담아 두며, 흔히 처마 밑이나 보꾹(지붕의 안쪽) 밑 또는 방문 밖에 매달아둡니다. 한편, 함경도지방에서는 뒤웅박에 구멍을 뚫고 속이 빈 작대기를 꿰어 씨를 뿌릴 때 사용하는데, 옛말 그대로 드베 또는 두베라고 부르지요. ▲ 뒤웅박 뒤웅박과 관련하여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뒤웅박에 부잣집에서는 쌀을 담고 가난한 집에서는 여물을 담기 때문에, 여자가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느냐, 아니면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 그 여자의 팔자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쓰였지요. 한편으로는, 뒤웅박에 끈이 달려 있는 것처럼 여자는 남자에게 매인 팔자임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예전 마을에서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간통하거나 하는 등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지금이야 공권력에 의지하여 해결하고 당시도 큰일이라면 관아를 통해서 벌을 받았던 것이지만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라면 마을어른들이 발의한 뒤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벌을 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조리돌림과 덕석말이가 있지요. 먼저 조리돌림은 주로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서 있었는데, 전라남도 지방의 ‘화지게’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벌을 주기로 정해지면 마을사람들을 모은 뒤에 죄를 지은 사람의 등에 북을 달아매고 죄상을 적어 붙인 다음, 풍물꾼을 앞세우고 마을을 몇 바퀴 돌아서 그 죄를 마을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이것은 죄지은 사람을 마을에서 쫓아내거나 하지는 않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창피를 주어 심리적 압박을 줌으로써 다시는 이와 같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지키도록 했던 풍속입니다. ▲ <북 지워 조리돌리다>, 김윤보, 형정도첩 그리고 덕석말이(멍석말이)는 역시 마을에서 못된 짓을 한 이에게 벌을 주는 방식인데 ‘덕석몰이’라고도 합니다. 벌을 주는 방식은 죄지은 사람을 마을사람들이 모인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무궁화를 조선의 명화라 하지만은 사실로는 진달네(杜鵑花)가 조선의 대표명화와 가튼 감이 잇다. 진달네는 색깔이 아름답고 향취가 조흘뿐 안이라 전조선 어느 곳이던지 업는 곳이 업서서 여러 사람이 가장 넓히 알고 가장 애착심을 가지게 되는 까닭에 조선에 잇서서 꼿이라 하면 누구나 먼저 진달네를 생각하게 된다. 조선의 봄에 만일 진달네가 업다면 달업는 어두운 밤이나 태양 없는 극지(極地)보다도 더 쓸쓸하고 적막하야 그야말로 ‘춘래불이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구나)’을 늣기게 될 것이다. 조선사람으로 외국에 가서 봄을 만날 때에는 먼저 진달네가 보고 십고 또 진달네를 본다면 몸은 비록 외국에 잇서도 맛치 고국에 도라온 것과 가티 반가운 생각이 난다.” 위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별건곤> 제20호(1929년 4월 1일)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머지않아 산에는 진달래로 뒤덮일 것입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듯이 진달래 꽃잎이 휘날리면 보는 이의 맘을 싱숭생숭하게 만듭니다. 이 우리 겨레의 꽃 진달래는 다른 이름으로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도 하는데 이 꽃잎을 청주(淸酒)에 넣어 빚은 술을 두견주라고 부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나무로 서서 새소리 물소리 천둥번개 소리 다 들이켜더니 햇살 속 귀 밝은 소리, 결마다 쟁이며 박달나무로 자라더니 저를 버리려고 늪 속에서 오래도록 묵힌다 늪이 감겨들면 소리들을 삼켰다 뱉어냈다 되풀이하며 깨지지 않을 소리만 남겨두고 푹푹 찌고 말려 득음에 이를 때까지 제 속을 파내는 그, 동자승은 노승을 두드리고 아이들은 나를 두드려 경전을 읽는다. 이지담 님의 시 목탁이다. 수도승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뜻에서 밤이고 낮이고 눈을 감는 일이 없는 물고기를 본뜬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그 같은 연유에서 목어(木魚)라 부르기도 한다는 목탁. 그 목탁은 수도승만이 아닌 나도 깨워줄 것인가? ▲ 이창홍 명인이 개발한 뛰어난 공명의 목탁 ▲ 전시장엔 공명이 크고 아름답게 변신한 이창홍 명인의 목탁과 거문고, 가야금, 장구따위가전시되어 있다. 불교의 모든 행사에서 목탁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도구이다. 그런데 그 목탁이 단순한 종교적 쓰임새 곧 불구(佛具)만이 아닌 악기로 태어났다. 바로 거문고 연주자면서 거문고 등 국악기를 연구하고 있는 이창홍 명인(전 KBS국악관현악단 거문고 수석)이 기존의 목탁을 개량해 공명이 크고 아름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학생을 교실 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 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유리 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는 <독립신문>1920년 1월 1일 기사입니다. 1919년 3월 1일, 조국의 산하에서 일제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이 자주민임을 선포한 우리겨레의 함성은 중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포사회에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물론 고국의 3·1 만세 운동 이전부터 중국 각지에는 항일우국지사들이 모여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습니다만 특히 고국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3월 13일에 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우리 겨레의 뜨거운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습니다. 간도의 3.13 만세운동 1년 전인 1918년에는 간도의 대부(大父) 김약연 선생을 중심으로 여 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임금과 왕비가 온수현으로 가니, 왕세자와 종친과 신하 50여 명이 따랐다. 임영대군 이구, 한남대군 이어에게 궁을 지키게 하고, 이 뒤로부터는 종친들에게 차례로 왕래하게 했다. 임금이 가마골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 행차에 처음 기리고(記里鼓)를 쓰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나무인형이 스스로 북을 쳤다.” 위 내용은 《세종실록》 23년(1441년) 3월 17일 기록입니다. 여기서 온수현은 지금의 온양인데, 세종이 왕비, 왕세자와 더불어 온천에 가는 길이었고, 이때 처음 “기리고차”란 것을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리고차는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던 조선시대 반자동거리 측정 기구입니다. 장영실이 중국식 기리고차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개량하였는데, 각 도, 각 읍 간의 거리를 조사하여 지도를 작성하는 데 기리고차가 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문종 1년에는 제방공사를 하는 데 있어 기리고차를 이용하여 거리를 재었다는 기록이 있어 토목공사에서도 널리 쓰였을 것입니다. ▲ 국립과천과학관에 국내 최초로 복원 전시된 기리고차의 모습 ▲ 옛 문헌에 기록된 기리고차 모습(왼쪽), 기리고차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미국인 벨이 발명한 전화는 우리나라엔 1890년 무렵 궁궐 안에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고종은 당시 이 전화를 적극 이용했는데 특히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문안을 드릴 정도였지요. 또 고종은 신하들이 친러파와 친일파로 나뉘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임금이 내린 지시도 왜곡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을 극도로 불신하면서 칙령도 덕률풍(德律風. 텔레폰의 음역)으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고종이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는 신하는 임금을 직접 뵈었을 때처럼 극진한 예를 다했지요. 먼저 전화벨이 울리면 신하는 전화기가 있는 방향으로 절을 세 번하고 전화를 받아 임금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소리로만 들리지만 전화기를 임금으로 생각하고 삼배(三拜)의 예를 다했던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전화는 철선(鐵線)을 쓴 탓에 감도가 아주 나빠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전화기가 있는 방 안 사람들은 모두 일손도 멈추고 숨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 우리나라에 처음 놓은 전화, 임금에게서 전화가 오면 절을 하고 받았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고종의 전화 덕에 목숨을 구한 이도 있었는데 바로 김구 선생입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서울(도읍지 금성, 현재 경주) 밝은 밤에 밤늦게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 이 노래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 입니다. 이 처용가를 바탕으로 한 궁중무용 “처용무(處容舞)”가 있습니다. 처용무는 원래 궁중 잔치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비손하거나 음력 섣달그믐날 악귀를 쫓는 의식인 나례(儺禮)에서 복을 빌면서 춘 춤이었지요. ▲ 남자들이 오방색 옷을 입고 추는 처용무(문화재청 제공)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 조에 보면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 그리고 가운데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파랑·검정·빨강·노랑의 옷을 입은 5명의 남자들이 추지요. 처용무의 특징은 자신의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을 분노가 아닌 풍류와 해학으로 쫓아낸다는데 있습니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