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용은 12지신 가운데 5번째 동물로 예부터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왔다. 또한 용기와 비상, 희망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써 사찰의 절 대웅전에 좌정한 부처님의 수호신으로 닷집, 천장에 조각되기도 한다. 신라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겠다"라며 감포 앞바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지금도 수중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사적 158호)으로 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만인지상인 황제의 곤룡포에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용(龍)’이다. 그런 용을 상징하는 ‘태황 용선경도’라는 그림이 있다. 이는 태황 스님이 기도 중에 현몽을 받아 그리게 된 것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40년 불상을 그린 태황 스님이 아니면 그리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평가다. 스님의 용선경도는 세계 164여 개국의 저작권 협회에 등록된 세계 유일의 작품이다. 인사동에서 평생 그림을 취급한 한 화상(畫商)은 ”용그림의 대가들을 알고 있지만, 태황 스님의 용그림은 그에 견줄 바가 아니다. 이런 용그림은 평생 처음 본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전율을 느꼈다고 말한다. 특히 태황 스님의 작품들은 자연 친화적인 재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양 귀 비 - 김태영 하늘 아래 으뜸이라는 너도 비 맞고 쓰러져 있으니 눈부신 시간도 한순간이었구나 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26일 ~ 756년 7월 15일)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다. 춘추전국 시대의 서시(西施), 전한 시대의 왕소군(王昭君), 삼국 시대의 초선(貂嬋) 함께 고대 중국 4대 미녀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당 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지나쳐 끝끝내 안녹산과 사사명이라는 두 호족 세력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고 따라서 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중국의 미인 ‘양귀비’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꽃 양귀비가 있다. 양귀비는 모르핀이라는 마약 성분의 주원료지만, 의료시설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는 가정상비약으로 양귀비만 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배앓이에는 특효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어르신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 양귀비와 비슷한 것으로 마약 성분이 없이 꽃으로만 즐기는 꽃양귀비(개양귀비)도 있다. 이 꽃양귀비는 감탄을 자아낼 만큼 예쁜 꽃이지만, 문제는 하루만 지나면 꽃이 지는 ‘일화즉사’의 꽃이라는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충남 공주시 계룡면 신원사에 가면 보물 제1293호 ‘공주 계룡산 중악단(中嶽壇)’이 있는데 중악단은 나라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입니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 5 큰산(오악-五嶽)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는데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上嶽)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下嶽)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中嶽)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지요. 그 뒤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습니다. 언덕에 동북ㆍ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지요.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합니다.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지요. 1.5m의 높은 돌기단 위에 앞면 3칸ㆍ옆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찹쌀로 밥을 짓고 미역으로 국을 끓였다 / 질그릇에 나물반찬을 담았으니 / 비록 박하지만 정성이 어려 있다 / 늙으신 어머니는 신(神)에게 절을 올려 기원하기를 / 아들의 수(壽)가 7~80살을 살게 해달라고 하였다(줄임) / 옛날 작은 몸으로 땅에 떨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 빙설(氷雪)보다 맑고 구슬보다 밝았었다 / 잡으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하시며 / 보자기 속에 아이 키우던 그 정이 가련도 하다 / 해마다 운명(運命)과 관상(觀相)을 들먹이며 / 평탄하게 살다가 공명(功名)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는 한말의 학자이자 사상가인 해학 이기(李沂, 1848~1909)의 문집인 《해학유서(海鶴遺書)》에 나오는 시입니다. 여기서 해학 선생은 어머니가 자신을 보자기에 싸서 길렀다고 말하는데 오늘날의 흔해 빠진 나일론 보자기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보자기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여 혼례 때의 청홍 보자기를 비롯하여 오대산 사고(史庫)의 책궤를 싸던 보자기까지 참으로 다양합니다. 세종 11년(1429)에는 내섬시(內贍寺, 여러 궁(宮)에 올리는 음식물, 포목(布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한째인 ‘소서(小暑)’입니다. 소서라는 말은 작은 더위를 뜻하지만 실은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인데다 장마철과 겹쳐서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때입니다. 소서 무렵에는 논의 모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로, 김을 매거나 피사리를 해 주고 논둑과 밭두렁의 풀을 베어 퇴비를 장만하기도 하지요. 이때에는 호박과 각종 푸성귀가 나오기에 다양한 음식이 입맛을 돋우는데, 특히 국수나 수제비 등 밀가루 음식이 구미를 당깁니다. 또 민어는 한창 기름이 오를 때여서 민어고추장국은 매운맛과 함께 달콤한 맛이 나 첫 여름의 입맛을 상큼하게 돋우어줍니다. 그 밖에 민어로 요리한 조림ㆍ구이ㆍ찜ㆍ회를 비롯해 민어포 등의 먹거리도 인기 있지요. 요즈음은 농약을 치면서 농사를 지어 예전처럼 피사리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김매기를 하는 농부들은 허리가 휘고 땀범벅으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기도 합니다. 이때 솔개그늘은 농부들에게 참 고마운 존재이지요. 솔개그늘이란 날아가는 솔개가 드리운 그늘만큼 작은 그늘을 말합니다. 뙤약볕에서 논바닥을 헤매며 김을 매는 농부들에겐 비록 작은 솔개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07년 고종황제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호소한 직후인 그해 7월 6일 매국노 가운데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은 고종에게 양위를 종용합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그 책임이 폐하에게 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친히 도쿄에 가서 일본의 천황에게 사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세가와 주둔군 사령관을 대한문 앞에 맞아 면박(面縛, 양손을 등 뒤로 돌려 묶고 얼굴을 쳐들게 하여 사람에게 보임)의 예를 하십시오.”라고 협박했습니다. 고종은 송병준에게 “경은 누구의 신하이냐”라고 책망했지만 이후 이완용과 송병준이 날마다 고종에게 독촉했고, 송병준이 만든 친일단체 일진회가 나서서 온 나라에서 유세한 것은 물론 궁 밖에선 ‘촛불시위’까지 벌였지요. 고종황제는 일본과 대한제국 대신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7월 19일 새벽 3시에 “이제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라는 조칙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대한매일신문>은 그해 7월 23일 논설에서 ”한국의 내각대신이 일제히 궁에 들어가 황제의 뜻에 반하여 (폐위를) 강박”했다면서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여기 단원 김홍도의 그림 ‘씨름도’가 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오른쪽 사람은 입을 꽉 깨물었으며,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고 두 다리를 떠억 버티고 선 모양새를 보면 이번엔 이기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왼쪽에 번쩍 들린 사람의 표정을 보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양미간 사이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으며, 눈빛은 쩔쩔매는 듯 너무나 처절합니다. 더구나 한쪽 다리는 번쩍 들려있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질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왼쪽 사람이 넘어진다면 과연 어느 쪽으로 넘어질까요? 자세히 보면 왼쪽 사람들은 느긋하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 아래 구경꾼들은 몸을 뒤로 젖힌 것은 물론 뒤로 손을 짚은 채 당황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요. 그래서 왼쪽 씨름꾼은 당연히 이쪽으로 넘어질 것이란 짐작을 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잘못 그려진 부분이 한 군데 있는데 뒤로 몸을 젖힌 구경꾼의 손을 반대로 그려놓았는데 참 어색합니다. 천하의 단원이 이런 실수를 했을까요? 아니면 재미있으라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린 것일까요? 타임머신 타고 옛날로 돌아가서 단원에게 물어볼 수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색 소 폰 - 김 태 영 우린 무엇으로 통했을까 어찌 나를 그리도 잘 읽었을까 날 대신해 울어도 주고 손잡고 노래해주는 동반자 오늘같이 우울한 날은 소낙비처럼 쏟아내고 싶다. 얼마 전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색소폰 연주를 들었다. 지긋한 노년은 눈을 감고 스스로 색소폰 소리에 빠져들었다. 정년퇴직한 뒤 그대로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아서 잡았다는 색소폰은 이제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1846년 앙투안 조제프 삭스가 개발하여 파리에서 특허를 얻었다는 색소폰. 색소폰은 군악대 연주뿐 아니라 대중음악이나 재즈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널리 쓰이고 있다. 원래 삭스가 색소폰을 개발한 뜻은 목관악기의 작동원리를 금관악기에 옮겨 두 악기의 장점을 모두 갖는 악기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아예 색소폰만의 오케스트라를 꾸밀 수 있게 다양한 악기를 만들었는데 가장 높은 키의 소프라니노부터 가장 낮은 키의 콘트라베이스까지 모두 일곱 종류에 더해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세 종류의 색소폰까지 개발했는데, 이 가운데 최근 일반적으로 쓰이는 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색소폰만 살아남았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국악기 가운데 ‘거문고’는 이제 그 아름다움을 느낄 기회가 많지 않다. 하지만, ‘백악지장(百樂之丈)’, 곧 ‘백 가지 악기 가운데 으뜸’이라는 찬사를 받는 만큼 그 소리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가 없다. 어제 7월 1일 서울 강남씨어터에서는 지난 2015년부터 거문고로 합주단을 꾸려오고 있는 '라미 앙상블 더 거문고'의 공연이 펼쳐졌다. '라미 앙상블 더 거문고'는 “거문고는 4세기부터 이어진 한국의 대표적 현악기이며, 전 세계에서 볼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악기다. <라미 앙상블 더 거문고>는 정통성과 동시대성을 바탕으로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거문고 음악을 소개하여 관객과 함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하고자 한다.”라고 이번 공연을 펼치는 뜻을 밝혔다. 이번 공연에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뉴욕을 기반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시아여성작곡가뉴욕시티협회’ 한진희 예술감독의 작품 ‘Bostonian Lab – 1’이었다. 고지영ㆍ장은경ㆍ김희영ㆍ이선희 연주자는 같은 거문고였지만 각기 다른 연주법과 음색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손가락으로 누르고, 술대로 뜯고, 튕기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6월 29일 문화재청은 서울 종로구 공평동 유적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에 만든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발굴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공개되는 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입니다. 이번에 출토된 금속활자들은 조선 전기 다종다양한 활자가 한 곳에서 출토된 첫 발굴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는 평가지요. 특히, 이 활자는 지금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 ‘을해자(1455년)’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종 ‘갑인자’는 세종 당시 천문기계를 제작하는 기술자들이 만든 활자라서 품질이 뛰어나다는 게 국내 서지학계의 평가지요. 조판 기술이 대폭 개선된 이 활자들은 흔들리지 않게 찍혔고 인쇄 속도도 두 배로 빨라졌음은 물론 서체의 세련된 아름다움이 더 큰 특징이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이번 금속활자의 발굴은 훈민정음은 물론 세종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질 전망이라고 합니다. 한글이 소리와 꼴, 뜻이 하나의 이치로 이어진 글자이자 인류의 역사에 없던 새로운 형식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