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반재원 소장]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숭늉 맛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쌀이 보편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던 삼국시대 이전에는 지금은 벼논의 잡초쯤으로 알고 있는 피를 재배하였으며 대부분의 백성이 피로 지은 피밥이나 피죽을 먹고 살았다. 서민들은 쌀밥을 한 그릇 대접받으면 대단한 영광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손님으로 초대 받아가서 쌀밥과 끓인 숭늉 한 그릇 마시면 그 이상의 대접이 없을 정도였다. 벼의 재배역사를 보면 김포 가현리 유적에서 4,000~5,000년전의 볍씨가 발견되었다. 또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의 구석기 유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3,000년~14,800년 전의 벼가 보고되었다 그것은 현재의 볍씨와 가장 비슷한 것으로 세계학회에 보고 된 사례 중 가장 오래된 볍씨라고 한다. 중국 양자강 유역의 하모도(河姆島) 유적에서는 기원전 5,000년부터 벼농사를 지었으며 우리나라 한강 유역에서는 기원전 2,000년에 벼가 재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확량이 높아지는 이모작이 시작되는 모심기는 조선시대 중엽에 와서야 시작되었던 점으로 보아 일반 백성에게는 여전히 귀한 곡식이었다. 이렇듯 쌀이 매우 귀한 음식이었기
[그린경제=반재원 소장] 집이라는 개념이 없던 원시 시대에는 인간들이 주로 천연 동굴에서 기거하였다. 한 동굴(洞窟)에서 같이 생활하는 무리가 서로 단합하여 자신들의 주거지를 확보했으며 다른 동굴에 사는 무리와는 자연히 구분되었다. 지금의 동(洞)은 그때의 생활 주거지인 옛 동굴(洞窟)의 개념에 따라 동(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동(洞)은 자연 동굴이므로 지붕이 따로 필요 없었으나 가家는 땅을 파고 지붕을 덮은 모양이다. 지금도 중국 광서성에 있는 복파산의 환주동굴, 첩채산의 태극동굴과 바람동굴, 호남성에 있는 천자산(天子山)의 황룡동굴이나 관암산(冠岩山)의 관암동굴의 입구 현판에는 모두 동(洞)으로 새겨져 있다. 그 옛날로 말하자면 지금의 숭인동은 숭인동굴, 구라동은 구라동굴, 칠곡동은 칠곡동굴, 삼성동은 삼성동굴이 되는 셈이다. 또 동굴 중에서 특히 좋은 곳을 동천(洞天)이라고 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기거하기 좋은 터를 동천이라고 하였다. 인산동천, 백운동천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중국은 행정 지명의 최소 단위를 동(洞)이 아닌 촌(村)을 사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동(洞)을 그대로 쓰고 있다. 동구밖이라는 말도 동굴
[그린경제=반재원 소장] 도련님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도련님 - 도령의 높임말. 형수가 장가가지 않은 시동생을 일컽는 말. *도령 - 총각을 대접하여 일컽는 말. *도령귀신 - 장가를 들지 못하고 도령으로 죽은 귀신, 몽달귀신. *도령당혜( -唐鞋) - 나이가 좀 많은 사내아이들이 신던 가죽신. *도령차( -車) - 장기의 졸을 농조로 이르는 말. (이기문 감수. 동아 출판사. 동아 새 국어사전) *데렌님 - 도련님의 방언.(경상도) *데리다 - 데리고 다니다. 어린아이를 데려와 기르다. *데려오다 - 함꼐 거느리고 오다. *데릴사위 - 처가에서 데리고 사는 사위. *데림추 - 주견이 없이 남에게 딸려 다니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신기철, 신용철. 삼성 출판사. 새 우리말 큰 사전) 도련님은 도령의 높임말, 또는 형수가 미혼의 시동생을 일컫는 말로 나와 있다. 또 도령은 일반적으로 총각을 대접하여 일컫는 말로 되어있다. 도련님은 흔히 글방도령이라 하여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처럼 도령님으로도 쓰이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도련님의 원래는 뜻을 장가 안든 시동생 항렬의 사내를 이르는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