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사히신문에서는 지난 9월 6일부터 10일까지 모두 5회에 걸쳐 한국관련 기사를 연재했다. 그 주제는 '이웃나라의 언어' 였다. 글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1회: 조선어인가 한국어인가 요동쳤던 강좌명 (2021.9.6.) 제2회:현장에서, 50년전 결심하고 배운 시민 (2021.9.7.) 제3회:현장에서, 일본과 한국을 연결한 두명의 시인(2021.9.8.) 제4회:현장에서, 괴롭고 씁쓸한 모국어의 추억 (2021.9.9.) 제5회:현장에서, K pop에 빠진 젊은이들 (2021.9.10) '이웃나라의 언어'라는 것은 곧 한국어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한국어'라고 맘대로 부르기가 어렵다. '한국'이라는 이미지는 대한민국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국어'에는 북한이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북한어는 어디까지나 '조선어'다. 남과북으로 갈리다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아사히신문에서는 5회나 걸쳐 지면을 할애하여 '한국어(조선어)'를 다뤘다. 그것은 단순한 언어만이 아닌 것으로 언어를 매개로한 '인물, 문화,역사'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깊다. 오늘은 제5회 연재분을 소개하겠다. 그런데 오늘 소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2021년 경북 출신 독립운동가와 그 집안이 독립운동을 위해 이국땅인 만주로 망명길에 나선지 110주년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총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1편은 석주 이상룡의 아내로 독립에 대한 진취적 의식을 드러낸 김우락(金宇洛, 1854 -1933) 을 조명하였다. 조선에 그대로 남아 일제에 협력했다면 자신들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하고 어쩌면 자손들까지 혜택을 누릴 수 있었겠지만 나라를 잃고 몸을 편히 쉴 수 없다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갔다. 척박한 만주 벌판에서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들은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데 일조하고 함께 건너간 동포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경북 지역에서는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자 솔선하여 의병활동과 척사상소운동, 애국계몽운동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내앞마을의 백하 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교보문고라든지 영풍문고 같은 오프라인 서점엘 가면 외국어 코너가 있어서 다양한 학습 교재를 고를 수 있다. 가장 큰 시장이라고 하면 당연히 영어일 것이다. 그 다음은? 글쎄다. 일본어나 중국어? 아무래도 이웃나라인 이 두 나라 언어가 2,3위 자리를 다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떠할까? 9월 6일치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서점에서 1위는 영어이고 그 다음이 ‘한국 · 조선어’ 코너라고 한다. 중국어가 아니라 ‘한국 · 조선어’ 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한국어면 한국어지 ‘한국 · 조선어’는 뭐야? 라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부연 설명을 하겠다. 안타깝게도 남과 북이 분단되어 남쪽은 국호가 대한민국이고, 북한은 국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이러한 이름을 각기 갖고 있지만 남한(대한민국) 사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북한’이라고 흔히 부른다. 분단 이전에는 원래 한겨레요, 언어도 같은 언어 공동체였다. 그러나 분단이 길어지면서 언어의 이질화도 생겨 ‘북한말’, ‘남한말’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인데 그 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 함께 쓰는 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황족(皇族)으로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지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황족 출신의 마코(眞子, 30) 공주 결혼을 앞두고 연일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결혼 상대자는 고무로 케이(小室圭. 30) 씨로 이들은 10월 26일 결혼을 앞두고 있다. 마코 공주는 나루히토 일왕의 조카로 이들의 결혼에 대해 일본 국민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다. 마코 공주는 지난 2017년 9월, 대학 동창인 고무로 케이 씨와 약혼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약혼 발표 이후 주간지 등에서 약혼자인 고무로 케이 씨의 어머니가 돈 문제로 시끄럽다고 보도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몰아갔다. 일부 언론에서는 약혼자인 고무로 케이 씨가 마코 공주의 일시금(여성 황족에게 주는 왕실 세금)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마코 공주는 일시금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9월 27일, 약혼자 고무로 케이 씨가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올해 7월, 미국 뉴욕주에서 사법시험을 치렀고 합격이 예상되어 뉴욕주의 법률 사무소에서 취직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제 마코 공주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구니 큰 스님, 종수 스님<1922.12.20.~2020.12.19(음력)>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우연이라고는 했지만 ‘사찰순례’를 하다보니 언젠가는 만날 법한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마다 한가위를 앞두고 부모님 묘소(전북 전주)에 성묘하러 간 김에 주변 지역의 사찰순례를 하곤 하는데 올해는 전남 무안에 있는 용덕사(龍德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덕사는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에 있는 절이다. 길찾개(네비게이션)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에 따라 절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끝에서 시작되는 절 입구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공덕비 하나가 근사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고 종수당(宗秀堂)이라는 작고 아담한 부도탑도 곁에 있었다. 찬찬히 공덕비문을 읽고 절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나중에 볼 요량으로 먼저 절 경내로 들어섰다. 대개 지역에서 이름난 절이 아닌 경우, 절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수수한 모습이 대부분인데 용덕사는 아담한 규모의 절이었지만 꽤 짜임새 있는 가람을 갖춘 절이었다. 용덕사가 비구니 스님 절이라는 것을 안 것은 경내를 분주히 오가던 비구니 스님을 보고서였다. 절을 찾은 날은(9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아가는 곳에 광명이 있나니 젊은 그대여 나아가자! 오직 앞으로 앞으로 또 앞으로 가시덤불을 뚫고 비록 모든 사람이 주저할지라도 젊은 그대여 나아가자! 용기는 젊은이만의 자랑스런 보배 어찌 욕되게 뒤로 숨어들랴 진실로 나아가는 곳에 광명이 있나니 비록 나아가다가 거꾸러질지라도 명예로운 그대, 젊은 선구자여 물러섬 없이 오직 나아가자! 이는 박팔양 시인이 《중앙》(1936년 2월호)에 발표한 ‘선구자’라는 시다. 박팔양 시인은 190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이때 정지용 시인 등과 <요람>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18살 되던 해인 19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신의 주(神의 酒)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박팔양 시인의 필명은 김려수(金麗水)인데 여기서 여수(麗水, 如水)는 호다. 그의 대표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1940)는 말하자면 박팔양 시인의 호를 딴 시집인 셈이다. 박팔양 시인의 《여수시초(麗水詩抄》가 일본의 중견 시인 우에노 미야코(上野 都, 74) 씨에 의해 지난 8월 15일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우에노 미야코 시인은 윤동주 시인의 시집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대중 대통령의 출신지가 신안군 하의도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서울살이 속에서 ‘하의도’는 머나먼 땅으로만 여겨왔다. 막연히 언젠가는 가봐야지 하면서 말이다. 지난 9월 12일, 한가위 연휴를 맞이하여 마침내 그 땅에 발을 디뎠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승용차로 간 뒤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신의도행에 배에 승용차를 싣고 2시간 달려 도착한 곳은 신의도(신의여객선터미널)였다. 이곳에서 다시 승용차를 30여분 달려 하의도에 도착했다. 신안을 흔히 천사섬이라고 해서 솔직히 ‘신안에 왠 천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1004개의 섬이 있어서 이를 한글로 천사(1004) = 천사(天使)가 된 것이란다. 오호라! 하의도는 어촌이라기보다는 농촌에 가까운 섬이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판이 이를 말해준다. 맨 먼저 찾아 간 곳이 ‘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이하 농민운동기념관)’이다. 농민운동기념관 입구에서부터 천사상이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농민운동기념관에는 조선후기부터 광복까지 무려 360년 동안 하의 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주민들의 빼앗긴 토지를 탈환하기 위해 흘린 ‘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360년 동안 토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안녕하세요. 열사님! 제가 이렇게 오늘 서대문형무소에 와서 열사님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알 수 있게 된 데에는 열사님의 노력과 희생 덕분입니다. 저는 열사님의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조차 없지만 열사님을 포함해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의 업적과 희생과 노력을 잊지 않으며 항상 열사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저의 오늘은 열사님 덕분입니다. 2021.8.27. 지연 올림” 이는 지난 8월 10일부터 29일까지, 광복 76주년 기념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관장 박경목)에서 열린 ‘생존애국지사 초상화 및 정밀모형(피규어) 특별전시회’를 보고 난 뒤 관람객이 생존 여성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에게 쓴 손편지다. 8월 현재 생존 애국지사는 모두 16분으로 이 가운데 여성은 오희옥(95세) 지사가 유일하다. 어제(18일), 오희옥 지사의 아들인 김흥태 선생으로부터 어머니(오희옥 지사)의 근황과 함께 지난 전시회 때 사용한 오희옥 지사 초상화와 손편지 엽서 사진을 받았다. 초상화는 이 기간에 전시된 16점 가운데 한 작품으로 초상화를 그린 화백은, 삼균주의를 제창한 조소앙 선생의 조카인 조범제 화백이 그렸고 전시를 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깊은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윤재환 선생의 정부포상 받게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윤재환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2021.8.5.- 이는 8월 15일 광복절을 열흘 앞둔 8월 5일,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글 속에 들어 있는 독립운동가 윤재환(尹載煥, 1918~1938, 20세로 순국) 의사(義士)에 관한 ‘포상안내문’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 포상안내문을 받아든 팔순의 장조카 윤용택 (82)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피어보지도 못한 약관의 나이에 저승으로 떠나버린 비련의 독립운동가 백부(큰아버지) 윤재환 의사의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기 위해 뛰어온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에는 “윤재환 의사는 1934년 3∼4월 경기 개성에서 송도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학생조직인 AM회 내지 서남회(일명 소나무회) 학생 반원으로 회원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음.”이라고 간략히 나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소장 원성규)와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은 <덕수궁 프로젝트: 상상의 정원>전을 덕수궁에서 오는 10일부터 11월 28일까지 연다. ‘덕수궁 프로젝트‘는 궁궐 안에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흥미로운 기획으로 2012년, 2017년, 2019년에 걸쳐 3차례 열리며 국민의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올해로 4번째 열리는 ’덕수궁 프로젝트‘의 부제는 ‘상상의 정원’이다. 이는 조선 후기 ‘의원(意園)’ 문화에서 빌렸다. 18~19세기 조선의 문인들은 글과 그림을 통해 경제적 형편에 제한받지 않고 마음껏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상상 속 정원’인 의원을 누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분야와 세대의 작가들이 덕수궁의 정원과 건축물을 무대로 우리 시대의 ‘상상의 정원’을 선보인다. 이번 ‘덕수궁 프로젝트’에는 현대미술가(권혜원, 김명범, 윤석남, 이예승, 지니서), 조경가(김아연, 성종상), 만화가(이용배), 식물학자이자 식물세밀화가(신혜우), 국가무형문화재 채화장(황수로)이 참여하였다. 이들이 수개월간 덕수궁을 드나들며 오랜 세월 동안 덕수궁과 함께해 온 식물과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