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제 남한산성은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한민족의 국가였던 가야 부여를 합하여 오국시대라고도 한다.)부터 한강을 낀 요충지로 성곽과 한강을 지키는 군사주둔지였으나. 옛 성곽의 자취는 많지 않고 주로 조선시대의 성곽이 많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 내에는 전쟁 등유사시 왕이 대피하여 기거할 수 있는 행궁을 지었고, 실제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기마병을 피하여 인조가 피신하여 한동안 농성도 하고, 피신한 동안 온나라에서지방군대까지 다 동원하여 남한산성으로 집결하였으나 불과 수백명의 청나라 기마병을 당해내지 못하여 결국 송파 삼전동으로 내려와 청나라 심양을 향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고 말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이때 남한산성 행궁에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머물렀던 역사적 장소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성곽과 행궁들은 돌보지 못하여무너져 내리고 훼손된 채 거의 버려지다 싶이 방치되었다가, 근래 역사유적 발굴자료조사를 거쳐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마무리하여남한산성 행궁이 지금처럼복원되었다. 이제 가을이 되면 산천이 아름답게 물들고, 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운 산책길로 나들이를 하지만, 역사를 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 내려다 보이는 운길산 중턱에 있는 수종사. 조선 전기 세조는 단종을 내치고 임금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부도덕한 왕위 찬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꿈속에 나타나 더러운 놈이라 힐란하며 침을 뱉었는데, 그 침이 묻은 자리부터 종기가 나고 피부병이 온몸으로 퍼져 무척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세조는 피부병을 낫게하기 위해 온갖 영약을 처방하여 먹고 발랐지만 낳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전국의 유명한 기도처를 찾아다니며 기도하고 시주를 하던 중,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문수동자가 씻어준 뒤 그 피부병이 낫게 되었고, 상원사에서 돌아오는 도중 이곳 수종사 근처에서 머물다 밤중에 바위 굴속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들려와 그곳을 찾아 절을 짓고 수종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수종사는 운길산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있어 걸어서 오르자면 꽤 힘든 곳이지만, 요 근래에는 절 일주문까지 가파른 산길에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 있다. 그러나, 운전하기는 무척 당혹스럽다. S자로 굽이 굽이 돌고 돌뿐 아니라 그 가파르기가 눈앞이 아찔하기도 하며, 중간에서 차량이 서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가평의 운악산에는 깊은 골짜기에 유서 깊은 고찰 현등사가 있다. 현등사는천오백년된절로 그 창건 연대는 신라의 불교 공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연대는 서기 528년 으로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불교를 공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가 150여년 전 불교를 받아들여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신라는 토착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그 때 신라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은 주변국으로부터 불교를 알게된 후 불교신자가 되어있었다. 이차돈은 신라가 발전하기 위하여는 보다 더 크고 넓은 세계와 접해야하고 국가의 부흥과 백성들의 교화를 위하여 좋은 종교인 불교를 신라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이차돈은 불교를 공인받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기로 마음 먹고 왕에게 건의하였다.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자신이 죽을 때 분명 이적이 일어날 것이니, 그 이적을 본 뒤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왕은 많은 대신들 없에서 이차돈의 목을 쳤다.그런데 그의 목을 치고 나서 이차돈이 예언한 대로 기이하게도 이차돈의 목에서흰 피가 솟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 22대 정조의 첫아들로 문효세자의 '묘'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정조의 왕자로 1781년에 태어나 1786년 5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홍역이나 급한 전염병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어린 왕자가 죽자 정조는 크게음이 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마음을 전했는데 처음에는 시호를 온효(溫孝)라 했다가다시 문효(文孝)로 바꾸었다. 처음에 묘를 쓸 때에는 '효창묘'라 하였다가 1870년 고종이 묘를원으로 승격되면서 '효창원'이 되었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너무도 일찍 죽어서 왕권승계를 무척 걱정하였고, 그 애잔한 마음을 담아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의 신도비를 직접 써서 세웠고 그 신도비가 '효창원'의 묘역 입구에 서있다. 그런데 효창원은 본래 마포구 효창동 현재 효창운동장 근처에 있었다. 그러던 효창원은1944년 일제 말기에근방을 개발하는 과정에 지장이 있게 되자, 이곳 고양시 원흥동서삼릉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효창원 앞에는 왕자의 묘로서 석물들이 서 있으며, 왕아니 왕비의 능에 비해 훨씬 간소하다. 석물은 원 앞에 장명등과 혼유석이 1기씩 서있고원의 앞에는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어느덧 가을이 깊어 간다.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농부들이 부지런히 일하며 퇴비도 주고 잡초도 뽑아주는 노동의 나날이 있은뒤 그정성으로곡식이 익어가듯 불교를 공부하는 스님들은 무더위fmf 피하지 않고 마음 공부를 한다. 그 여름공부를 하안거라고 하여 장마철이 낀 무더운 여름100일 동안 참선 정진한다. 그 참선 기간동안 많은 스님들은 깨달음을 향하여 화두를 꿰뚫고자 정진 또 정진한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지금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기간이다. 이제 또 얼마 후면 다시 동안거를 시작한다.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치기 위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에 접근하고자하안거와 동안거를 통한 깨달음의 마음공부를 하는 곳이 서울 근교에 몇몇 참선 도량이 있다. 그 중에도봉산에 있는 원효사는 신라 원효스님이 창건한 절인데 이곳에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참선공부를 하는 곳으로 꽤 유명한 송라선원이 있다. 세상이 늘 혼돈 속에 하루하루가 힘들다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또한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린다. 무덥다고 여름을게을리 보냈다면 이가을에 아무런 소득을 얻기 어렵다. 힘들어도 부지런히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진리에 가까울 수 있고, 그 깨달은 진리를 중생들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파란 하늘에 뭉개구름도 두둥실 떠있는 낙산사에 올라본다. 보살은 대승불교에 도입된 수행자로서 최고의 위치에 이른 분으로, 소승불교에는 없는 존재이다. 소승불교가 자신의 깨달음을 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수행의 마지막에 아라한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대승불교는 자신의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세상살이 고통속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그냥 두고 혼자 깨달은들 그것은 궁극적인 수행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없는 현세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금강장보살 허공장보살 인로왕보살 등이 각각의 위치에서 중생들의 고통도 덜어주고 지혜도 갖게하며 지옥에까지 찾아가서 구해준다고 믿는 것이다. 많은 보살 중에서도 특히 관세음보살은 현세에 살아가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책임지고 구해준다고 믿는 보살중의 보살이기에 전국의 모든 절에는 관세음보살이 대부분 모셔져 있다. 특히나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고 믿는 관세음보살의 성지이기에 많은 참배객들이 연중 무휴로 붐비는 곳이다. 낙산사에는 의상대사가 기도하던 자취도 있고 또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직접 만났다는 전설같은 곳이기에 특히 기도효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배달겨레)이근세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독립황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 독립하기 위함이 아니고, 일제가 한국땅을 집어삼키기 위한 술책에 놀아난 것이었다. 조선이 청나라에 상국으로 모시는 사대를 지속한다면 조선을 식민지속국으로 삼고자 할 때 마다 상국인 청나라가 기득권{?}을 주장하며 간섭하겠기에, 이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일본은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에게 청나라 제후에서 벗어나독립된 황제국이 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조선이란 국호를 버리고 한(韓)이라는 우리민족의 옛날 국가인 만주지역에 있었던마한 번한 진한 명칭을 찾아내 그 공통점인 한(韓)을국호로 정하여 황제국으로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이름만 바꾼다고 당장 황제국이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 선포했으나, 그동안의 구태와 악습을 타파하는 자체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기득권층 안에서 세력을 잃지 않으려는내분에 세월을 허송하다가 결국 외세를 끌어들여 스스로 패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지도자들은 스스로 개혁 대신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함께 살기를 외치다 먼저 가버린 백남기 할아버지 ! 그러나 이승을 떠난 영혼은 고이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할 때이고,그 때는공기가 콧구멍을 통해폐를 통하여 들어가 그 신선한 공기 속의 산소를 심장이온 몸 구석 구석까지 보내주고, 구석 구석에 쌓여있던 노폐물과 탁한 공기를모아서 다시 폐를 통해 콧구멍으로 내 보낼 수 있을 때사람은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숨쉬기가 안되고 외부의 깨끗한 공기가 몸속으로 전해지지 못하면 구석 구석에 노폐물이 쌓이고, 세포는 죽어가고, 결국심장도 멎어 버린다. 그런 상태가 되면 육체 속에 깃들어 있던 영혼은 이제 더이상 머물지 못하고몸밖으로 나와 한동안 평생 깃들어 있던 육체의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한다. 평생을 머물렀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영혼은 그 아쉬움이 얼마나 클까? 살아있는 보통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영혼을 감지하는 능력이 특별한사람들은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육체가 있는 이승을 떠도는 영혼에게 이제 그만 세상 일을 잊고 고이 저세상으로 잘 가길 바라며 천도제를 지낸다. 그런데 백남기 할아버지는 쉽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불우한 시절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서양식 그림을 그리며 살았던 천재화가 이중섭. 하지만 천재화가로서의 대접은 커녕 늘 먹고살 양식이 없어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여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중섭. 그는 자신의 뛰어난 그림에 대한 능력을 끊임없이 발휘하고자 부단히 애썼으나, 식민지 지배하에 태어나고 광복뒤에는 다시 한국전쟁으로 마음껏 그림을 그릴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주가 그림 그리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의 그림은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릴 돈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수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그림 그릴 종이조차 없어서 담배갑속에 들어있던 은박지를 얻어서 그린 은박지화는 오직 그만이 그렸던 화판이었고, 이제는 그의 그림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는 늘 함께하고 싶은 가족을 전쟁통에일본으로 보내고, 초청장을 기다리며 혼자 쓸쓸히 가족을 그리며 살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그의 그림속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등장하고, 늘 해맑은 미소는 있을지언정 슬픈 자신의 모습은 없었다.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을 그리도 그렸지만 그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살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화도령 철종(조선 25대왕)의 예릉이다. 철종은 1831년 태어나 1863년 33세에 승하하였다. 그는 1844년 14세 되던 해그의 형인 회평군이 옥사함에 따라 온 가족이 강화로 유배되어 몰락한 왕가의 자손으로 평범한 농촌의 총각으로살았다. 그러다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 의 명으로 궁궐로 들어와 덕완군으로 책봉되었다가 제24대 헌종의 뒤를 이어 제25대왕이 되었다. 그를 궁궐로 불러들인 순원왕후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이끌던 안동김씨 가문에서 김조순의 큰딸로 태어나 순조의 왕비가 되었다가 헌종과 철종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가의 규수를 왕비로 책봉하였고, 그 안동김씨의권력독식으로 조선의 온갖 부패가 만연하여 안동김씨에 줄을 서지 않으면 아무리뛰어난 선비요 학자라도 쓸모가 없었고, 안동김씨에 줄만 대면 지방의 관리부터 중앙의 요직까지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런 조선후기의국정을 문란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때 조선에는 김삿갓이 나타나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쉬운 시로 풀어내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였다. 안동김씨는 이씨 왕손중 훌륭한 사람을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