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순절묘가 있는 묘역의 아래에는 영령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찾는이 드물어 대문이 닫혀있어 향도 사르지 못하고 산 등성이에 흩어져 있는 무덤들만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순절묘역의 사당(왼쪽이 사당이고 오른쪽은 출입문이다.) 사당의 왼쪽언덕에 풀숲이 우거지고 무덤들이 흩어져 있다. 사당 앞에는 자동차 10여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묘역의 왼쪽으로 오르는 비탈길 옆에는 측백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군데 군데 자손이 있는 무덤에는 비석들이 있고, 대부분 묘역에는 작은 봉분만 있지 표지석도 없는 무명용사의 무덤이다. 무덤들이 있는 언덕. 햇살이 비치니 무덤의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주인이 밝혀지고 자손이 있는 묘역에는 옛날 비석과 새로 만든 비석이 나란히 있다. 무덤의 위에서 내려다본 무덤들과 아래동네. 묘역의위에서 보니 햇빛에 봉분의 그림자가 져 무덤들이 보인다. 땀흘리며 무덤을 오르는 답사 회원 무덤 아래 펼쳐진 진도의 논과 밭. 섬이면서도 논밭이 꽤 있어 살기에는 참 좋은 땅이다. 그나마 이름이라도 밝혀진 무덤은 당시의 관직이나 재력이 있던 사람들의 무덤으로보인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벽파진 전첩비가 세워진 언덕에서 본 벽파진 벽파진에서 본 진도타워. 바다에는 전복양식장이 있다. 언덕진 펑퍼짐한 바위 끝에 전첩비가 우뚝 솟아있다. 전첩비 주변에는 잡다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거북돌 등 위에 비석이 세워지고 그 옥개석에도 두마리의 거북이 머리가 좌우로 굽어보고 있다. 충무공벽파진전첩비라 새겨진 아래에는 한글과 한문이 섞여서 비문을 이루고 있다. 전첩비의 뒷면 언뜻 용머리 같기도 하고 거북머리 같기도 한 동물머리가 옥개석 위에 있다. 측면에서 본 거북머리 전첩비 바로 옆에는 현직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김대중 전대통령이 다녀가면서 기념나무를 심었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가장 심하다는 8월 초 이순신장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남도땅 진도로 역사기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500여 km, 옛날 같으면 괴나리 봇짐을 둘러메고 보통 한달을 걸려야 닿을 수 있는 머나먼 거리이지만 지금은 고속도로가 사통팔달로 잘 뚫려서 새벽에 나서고 보니 휴가철이라도 막힘이 없이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멀지만 시간상으로는 그리 멀지가 않았다. 진도로 오기전 서해안 고속도로의 끝인 목포에서 국도로
해남 우수영에서 진도대교를 건너면 진도섬이 펼쳐진다. 진도는 보배섬으로 많은 보물들이 있지만, 그 보다는 임진 정유왜란의 격전지로 한국인에게 각인되었다. 그 격전지는 바로 진도 대교가 설치된 그 아래 좁은 해협으로 명량대첩의 역사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진도대교를 넘어서면 언덕위에 세워진 진도타워가 있다. 이 탑형식의 건물 맨 위에 오르면 주변이 다 보이고, 명량해전이 펼쳐진 바다가 자세히 보인다. 진도 타워 앞에는 광장이 있고, 그 앞에는 배형상을 한 조각상에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청동조각상이 있다. 배형상의 조형물과 장수와 수병들이 싸우는 모습의 조각상 진도 타워 광장에서 본 진도대교.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그 울돌목으로 기관선이 힘차게 오르고 있다. 울돌목의 왼쪽 바다. 작은 섬들과 멀리 육지가 보인다. 울돌목 오른쪽 바다. 거센 조류를 이용하여 조력발전시험중 진도타워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명량해전이 벌어진 날을 세겨놓았다. 당시 명량해전의 재현설명도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당시 진법도. 앞에는 장군선이 있고, 뒤로는 12척의 판옥선이 1자로 서있다. 그림에는 없지만 그 뒤로 멀리 어선들이 100여척이 병선처
전라우수영의 본진이 있던 곳에 우수영 관광지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우수영과 진도사이 거세게 흐르는 물결을 거슬러 힘겹게 기관선이 오르고 있다. 왜선의 밑바닥에 쇠사슬을 걸 수 있게 만들었다는 기구. 사실성을 느끼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과연 저런 사슬로 수백척이 지나가는 배밑바닥을 걸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성을 느낄 수 있도록 다시 제작해야 할 듯.. 명량대첩탑이 세워진 우수영 관광지 공원 임진왜란 당시를 재현하여 만든 조각상들 대첩탑의 뒤에서 본 수군의 모습 왜적을 맞아 최후의 결전을 위하여 이순신 장군 앞에서 맹세하는 수군장수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다는 글귀로 이는 이순신장군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진도대교 밑에 설치된 조각상. 멀리 보이는 맞은편 진도에는 이순신장군상이 세워져있다. 파도는 없지만 물살이 거세흐르는 물길이 회오리치고 있다. 우수영 해송사이로 본 진도대교 노젓는 수군과 북치는 수군 전쟁당시를 재현한 작품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남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길게 내려간 육지의 끝 땅끝마을이 떠오른다. 그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고 가면 아름답게 펼쳐진 다도해 해
▲ 해남 충무사 전경 사당 앞에 넓은 마당이 있다. ▲ 충무사 삼문. 솟을 삼문에 공포장식을 하였다. ▲ 충무사 사당 ▲ 우수사들의 공덕비 ▲ 공덕비 상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가장 심한 8월 초 해남과 진도로 역사여행을 떠났다. 해남하면 육지의 끝이라는 땅끝마을이 있고, 그 땅끝마을에 이르기 전에 진도와 해남의 사이는 가깝지만 물길이 사나운 위험한 바다협곡이 있어 그 물길을 울돌목이라 이름하였다. 예전에는 반드시 배를 띄워 그 험한 바닷길을 건널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해남과 진도를 잇는 길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서 이제는 험한 바닷길에 작고 나약한 나룻배를 타지 않고도 진도와 해남은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가까운 곳이 되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오직 그길 뿐이었으니, 그 천혜의 자연을 헤쳐나가는 것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숙명이었고, 그 바다에 삶의 터전을 두고 살자니 바다의 심성이 어찌 변하는지 잘 관찰하면서 이를 잘 활용하면서 살아왔다. 울돌목은 말로만 들어오다 처음 가보았는데, 과연 울돌목은 그 변화가 무쌍하였다. 섬과 섬사이에 흐르는 물길은 293m 남짓한 가까운 거리였고, 바다는 마치 강물처럼 파도도 없었지만, 물길을 살펴보니 가운
해남에서 진도로 이어지는 우수영에는 우수영선착장이 있다. 우수영 선착장에는 거북선유람선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를 상상하면서 다도해를 유람할 수 있다. 울돌목 거북배 유람선을 가까이 본 뱃머리 거북선 설계 입면(추정 모형도) 전투선인 판옥선의 설계도(추정 모형도) 판옥선의 재현 판옥선의 깃발 한 사진작가가 우수영 선착장 주변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 모습. 무더위 속에 역사의 숨결을 찾아 그 현장에서 치열했던 옛날을 회상하는 듯 진지한 모습이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한국인의 삶에 거의 재생이 불가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끝이 났다. 그 길고긴 7년동안의 삶이란 그 처참한 형상을아무리 그럴듯한말과 글로 표현한다할 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우리는 처참한 지경을 당하면서도 그 전란을 견디어냈고, 그렇게나마피폐한 상처를 입고서도 우리는 그 전쟁의 패자가 아닌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장군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로 돌아간다면 그리 쉽게 수긍할수도 없는 때였다. 그 이유는 장군의 공이 큰 만큼 그
해남군 이충무공명량대첩비와 비각 명량대첩비 대첩비의 옥개석 명량대첩비 탁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423년 전 조선의 전국토가 유린되던 임진왜란을 당하여, 정규 조선군은 전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연전 연패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은 압록강만 넘으면 중국으로 망명할 처지였고, 백성들은 왜군에 유린당하여도 어디에 기댈 곳없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참혹한 시대를 살았다. 그런 시대에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조선에는 이순신장군이 계셨고, 그가 있었기에 조선은 나라가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았고, 지금의 우리가 이어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충무공의 전공은 모두가 인정했지만, 그 공이 너무도 컸기에조선의 왕은 오히려 그게 두려웠다. 이순신장군이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 공이 모두가 허물이 되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간지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의 혁혁한 공을 알아주는 이들이 많아지자그의 공을 잊지않고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명량대첩비를 세우고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혼을 위로하는 글을지어 바쳤다.기자는 오늘 후학으로 해남땅을 지나다가이충무공의 행적을 더듬고 그의 행장을 살펴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종묘 안에 있는 공민왕 사당 사당 안 모습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차를 마시는 장면, 앞에는 기러기가 놓여있다. 기러기는 죽을 때까지 다시 짝을 찾지 않는다고하여 끝까지 금슬을 지키는 새라고하여 공민왕이 그린 발그림-1 힘차게 달리는 말-2 말그림-3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의 왕들의 신주를 모신 가장 성스럽다는 종묘에는 뜻하지 않게도 고려의 부흥을 꾀하다 비명횡사한 공민왕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일 같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기에 그리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사연은 찾을 수 없고, 공민왕과 그의 둘도없는 부인 원나라 황제의 딸이었던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영정을 대신하고 있다. 공민왕의 사당은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을 들어서면 제례를 주관하는 신관들이 향, 축문, 폐백등을 보관하는 향대청이 바로 있는데, 그 향대청의 뒷켠에 작은 건축물로 들어서있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측면이 한칸짜리로간소한 민도리집이지만 사당의 주변에별도로 담장을 두르고, 앞에는 대문을 설치하여 최소한의 격을 차려주고 있다. 공민왕은 원나라 말기 고려왕자로 태어나
종묘의 정문=외대문 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으로 이어지는 3단 돌길이 있다. 왕 세자 제관의 길 외대문을 들어서면 있는 연못 제사를 지내기 위해 행차한 임금이 머무는 건물 제사에 참석하는 임금의 복장,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있다. 정전을 둘러싼 담장과 정전의 지붕 정전의 동측대문 정전으로 가는 보도길 정전의 좌우에는 익랑(날개건물)이 있다. 단순하면서도 엄격함이 느껴지는 종묘의 정전 정전의 각 한칸마다 왕들의 신위가 모셔져있고, 그 앞에는 판문으로 굳게 닫혀있다. 정전의 장식은 전혀 느낄 수 없으며, 붉은 석간주칠로 단순하게 단청이 되었다. 동익랑에서 본 정전과 서익랑 정전 앞의 퇴칸이 회랑처럼 보인다. 동익랑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구름문양이 새겨져있다. 구름은 곧 하늘로 오른다는 의미를 뜻하며, 바로 신들의 영역임을 암시한다. 밖에서 본 정전과 남문 정전의 3칸으로 된 남문. 옛날 같으면 감히 얼신도 못할 곳이지만,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구경하고 쉬어가는 곳이 되었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500년의 임금이 한곳에 모여 있는 곳이 종묘다. 왕조시대에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 수만평 넓은 저수지에 수백만송이 연꽃이 피어나 장관을 이루는 관곡지. ▲ 하루가 너무도 소중한 연꽃들..피고 나면 어느 덧 시들기 시작하나니.. ▲ 연꽃 밭의 연꽃들 이미 피고 진 연밥도 있고, 이제 피어나는 연꽃도 있다. ▲ 연꽃을 향하여 ▲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한때 ▲ 꽃이 피면 다시 시드나니.. ▲ 하늘을 향해 피어난 연꽃 ▲ 연꽃에 몰려든 손님(?)들 ▲ 연밭에서 연꽃을 향하여..한컷 ▲ 연꽃을 사진으로 열심히 담는 진사님 ▲ 남미에서 온 홍수련 연잎은 피어나면서 사랑을 말해요. ▲ 연꽃을 보러온 사람들. [한국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여름이면 피어나는 진흙밭에 뿌리를 둔 연꽃들.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2주정도가 절정을 이룬다. 연꽃은크기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하지만, 모두가 진흙으로 이루어진 연못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어쩌면 가장 지저분해서 그 물도 흐리지만, 연꽃은 다른 곳이 아닌 지저분한 진흙밭 그곳에 터전을 삼으니, 특이하기도 하다. 그런 연꽃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꽃을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의 상징으로 여기며, 부처님이 계신곳을 연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