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돌목의 잔잔한 물결 위로 진도대교와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비친다. 잠시 잔잔하던 울돌목이 밀물이 밀려오자 금새 요동치고 회오리가 치고 있다. 진도해안에 설치한 거북머리(용머리) 뱃전에 떠오르는 태양을 여의주로 물게 하였다. 급한 물결에 전투를 독려하는 듯한 이순신장군 모습 이른 아침 작은 어선은 너무도 한가롭게 보인다. 공원의 소나무 사이로 본 이순신장군 동상 울돌목 가운데 물길이 무척 거세게 흐르고 있어 진도대교의 반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최신 기관선인 저 배가 최대한의 동력으로 나가는데도울돌목을 지나가는데는 30분도 더 걸렸다. 진도타워 앞에 세워진 전투장면들 활과 창으로 적과 싸우는 장면 마치 뱃전에서 육박전을 하는 듯한 모습들. 전체 모습이 배모양인 진도타워의 모습 함께한 사진가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난 밤 늦게 까지 진도대교와 진도타워의 야경을 카메라에 담고,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다가, 또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있는 진도 울돌목해안공원으로 달려갔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언제 또 다시 찾는다는 기약을 할 수 없는 하루 하루이고 보니, 피곤을 핑게로 방바닥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던
울돌목 위에 놓여진 진도대교 서해로 넘어가는 해 노을에 물들어가는 진도대교 사장교의 교각. 그 아래는 울돌목의 거센물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해가 있으니 사장교에는 조명시설이 아직 켜지지 않았다. 진토타워가 세워진 언덕위에서 본 진도대교. 해가 넘어가자 교각은 야간조명으로 더욱 멋져보인다. 짙푸른 하늘색이 보이는 것은 장노출에 매직타임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진도타워의 야경. 진도타워 앞에 설치된 명량해전 격전의 모습 야경. 매직타임이 끝이나면 하늘을 푸른빛이 없고 검게만 보인다. 진도타워언덕을 내려와 강강술래터 앞에서 본 진도대교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금골산 해월사 5층석탑을 보고 부지런히 진도대교를 넘어서 다시우수영역사공원의 올돌목해안으로 내려갔다. 우수영역사공원은 해남땅으로진도대교의 동측에 있어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해넘이는 계절에 따라 춘분 추분의 정서방향에서 겨울철에는 서남쪽으로 내려가고 여름철에는서북쪽을 오고 가는데, 그 오르내리는 태양과 진도대교의 모습을 함께 담기 위해서는 적당한 촬영위치를 위치를 잡기위해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 금골산에서 해월사5층탑을 바로 찾지 못하고 시
금골산 전경: 산 위 바위에는 마애불도 있고, 그 아래는 새로 지은 해안사가 있다. 금골산5층석탑: 본래 절의 이름도 모르는 곳에 아담하고 잘 생긴 탑이 있다. 지금은 초등학교 교실 앞에 자리한 5층탑과 안내판이 있다. 1층 탑의 몸체는 체감비가 무척 높다. 오후 빛에 비추어보는 금골산5층석탑 책읽는 소녀상과 함께 본 금골산5층석탑 석탑의 뒷편으로 학교건물 지붕이 보이는 금골산5층석탑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진도대교와 진도 읍내의 중간쯤에 꽤 높고 험한 바위산이 떡 버티고 있었다. 용장산성과 용장사를 돌아. 진도대교와 진도전망탑에서 보는 노을과 야경을 담고자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진도대교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중에 계획에 없는 문화재 안내판이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큰길 옆에 안내판에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500m 쯤에 '금골산5층석탑'이 있다는 것이다.진도대교를 향해 달리던 우리는 잠시 차를 세우고가까이 있다는 그 석탑을 찾아 보고 진도대교로 가도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기에는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여, 안내판이 있는 좁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1km 이상 한참을 갔는데도 더이상 안내판을 발견하지 못하고석탑도 보
▲ 용장사 원경 ▲ 용장사 근경 ▲ 용장사 극락전 ▲ 극락전의 아미타3존불 ▲ 지옥의 중생까지 구제하겠다는 지장보살 탱화 ▲ 누군지 올려놓은 새로운 탑의 기단에 있는 보살상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용장산성 안내판에 따르면 본래 용장산성 내 행궁의 중심에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의 용장사는 용장산성 행궁터에서 바로 옆에 있는 경사진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의 규모는 극락전이 있고, 또 다른 전각이 있는데, 현판도 없어 무슨 전각인지는 잘 모르겠으며, 그 아래에는 스님이 계시는 요사채건물이 있고 또 최근에 지은 종루가 있었다. 용장사 극락전 내부에 부처님은 마치 새로 조성한 듯 하였으며, 보통 부처님처럼 곱슬머리의 나발이 보이지 않고,스님의 모습처럼 박박민 머리였다. 조각의 기법은 무척 단순하여 천진스럽게 보이기도 하였다. 중앙에 있는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부처님은 결가부좌로 앉은 모습이고 좌우의 협시보살은 서있는 보살로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보인다. 저 불보살상은 석조인데, 안내판의 설명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불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이 부처님과 보살상이 고려시대의 작품이라면 그 특이성과 희귀
진도 용장산성 삼별초항몽기념탑 용장산성 행궁터를 오르는 탐방객들 용장산성내 행궁터의 석축들 경사지를 이용하여 만든 건물지 석축들 행궁터의 위에서 내려다본 용장선성내 행궁터 새롭게 건립한 용장사 멀리 본 행궁터 재현해본 행궁터 건물들 가운데 큰 건물은 용장사 대웅전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정유재란 순절묘를 돌아서 용장산성 행궁터로 향하여 달렸다. 차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계곡을 낀 요새지역에 이르러 멈추었다. 산 가운데 그리 넓지는 않지만 그나마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곳. 그런 곳은 평시에는 궁터로 할 수 없을 것이나 가장 힘든 시기에는 적이 침입했을 때 방어하기는 좋은 곳이기에 행궁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용장산성은 육지에 바로 인접하면서도 울돌목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와야 닿을 수있는 요새지역이다. 진도고려 임시정부는벽파정을 주요 항구로 하여 방어하게 좋게 산성을 쌓았다. 그 산성은 주로 돌로 지은 석성이 길지만 흙을 돋우어 지은 토성이 혼합된 성으로 행궁터를 중심으로 전체 길이가 12.85km에 이른다. 고려는 1231년 처음몽골의 침공을 당하였고, 준비없는 침략에 당황한 고려는 일단 강화조약을 맺어
정유재란 순절묘가 있는 묘역의 아래에는 영령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찾는이 드물어 대문이 닫혀있어 향도 사르지 못하고 산 등성이에 흩어져 있는 무덤들만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순절묘역의 사당(왼쪽이 사당이고 오른쪽은 출입문이다.) 사당의 왼쪽언덕에 풀숲이 우거지고 무덤들이 흩어져 있다. 사당 앞에는 자동차 10여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묘역의 왼쪽으로 오르는 비탈길 옆에는 측백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군데 군데 자손이 있는 무덤에는 비석들이 있고, 대부분 묘역에는 작은 봉분만 있지 표지석도 없는 무명용사의 무덤이다. 무덤들이 있는 언덕. 햇살이 비치니 무덤의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주인이 밝혀지고 자손이 있는 묘역에는 옛날 비석과 새로 만든 비석이 나란히 있다. 무덤의 위에서 내려다본 무덤들과 아래동네. 묘역의위에서 보니 햇빛에 봉분의 그림자가 져 무덤들이 보인다. 땀흘리며 무덤을 오르는 답사 회원 무덤 아래 펼쳐진 진도의 논과 밭. 섬이면서도 논밭이 꽤 있어 살기에는 참 좋은 땅이다. 그나마 이름이라도 밝혀진 무덤은 당시의 관직이나 재력이 있던 사람들의 무덤으로보인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벽파진 전첩비가 세워진 언덕에서 본 벽파진 벽파진에서 본 진도타워. 바다에는 전복양식장이 있다. 언덕진 펑퍼짐한 바위 끝에 전첩비가 우뚝 솟아있다. 전첩비 주변에는 잡다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거북돌 등 위에 비석이 세워지고 그 옥개석에도 두마리의 거북이 머리가 좌우로 굽어보고 있다. 충무공벽파진전첩비라 새겨진 아래에는 한글과 한문이 섞여서 비문을 이루고 있다. 전첩비의 뒷면 언뜻 용머리 같기도 하고 거북머리 같기도 한 동물머리가 옥개석 위에 있다. 측면에서 본 거북머리 전첩비 바로 옆에는 현직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김대중 전대통령이 다녀가면서 기념나무를 심었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가장 심하다는 8월 초 이순신장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남도땅 진도로 역사기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500여 km, 옛날 같으면 괴나리 봇짐을 둘러메고 보통 한달을 걸려야 닿을 수 있는 머나먼 거리이지만 지금은 고속도로가 사통팔달로 잘 뚫려서 새벽에 나서고 보니 휴가철이라도 막힘이 없이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멀지만 시간상으로는 그리 멀지가 않았다. 진도로 오기전 서해안 고속도로의 끝인 목포에서 국도로
해남 우수영에서 진도대교를 건너면 진도섬이 펼쳐진다. 진도는 보배섬으로 많은 보물들이 있지만, 그 보다는 임진 정유왜란의 격전지로 한국인에게 각인되었다. 그 격전지는 바로 진도 대교가 설치된 그 아래 좁은 해협으로 명량대첩의 역사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진도대교를 넘어서면 언덕위에 세워진 진도타워가 있다. 이 탑형식의 건물 맨 위에 오르면 주변이 다 보이고, 명량해전이 펼쳐진 바다가 자세히 보인다. 진도 타워 앞에는 광장이 있고, 그 앞에는 배형상을 한 조각상에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청동조각상이 있다. 배형상의 조형물과 장수와 수병들이 싸우는 모습의 조각상 진도 타워 광장에서 본 진도대교.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그 울돌목으로 기관선이 힘차게 오르고 있다. 울돌목의 왼쪽 바다. 작은 섬들과 멀리 육지가 보인다. 울돌목 오른쪽 바다. 거센 조류를 이용하여 조력발전시험중 진도타워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명량해전이 벌어진 날을 세겨놓았다. 당시 명량해전의 재현설명도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당시 진법도. 앞에는 장군선이 있고, 뒤로는 12척의 판옥선이 1자로 서있다. 그림에는 없지만 그 뒤로 멀리 어선들이 100여척이 병선처
전라우수영의 본진이 있던 곳에 우수영 관광지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우수영과 진도사이 거세게 흐르는 물결을 거슬러 힘겹게 기관선이 오르고 있다. 왜선의 밑바닥에 쇠사슬을 걸 수 있게 만들었다는 기구. 사실성을 느끼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과연 저런 사슬로 수백척이 지나가는 배밑바닥을 걸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성을 느낄 수 있도록 다시 제작해야 할 듯.. 명량대첩탑이 세워진 우수영 관광지 공원 임진왜란 당시를 재현하여 만든 조각상들 대첩탑의 뒤에서 본 수군의 모습 왜적을 맞아 최후의 결전을 위하여 이순신 장군 앞에서 맹세하는 수군장수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다는 글귀로 이는 이순신장군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진도대교 밑에 설치된 조각상. 멀리 보이는 맞은편 진도에는 이순신장군상이 세워져있다. 파도는 없지만 물살이 거세흐르는 물길이 회오리치고 있다. 우수영 해송사이로 본 진도대교 노젓는 수군과 북치는 수군 전쟁당시를 재현한 작품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남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길게 내려간 육지의 끝 땅끝마을이 떠오른다. 그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고 가면 아름답게 펼쳐진 다도해 해
▲ 해남 충무사 전경 사당 앞에 넓은 마당이 있다. ▲ 충무사 삼문. 솟을 삼문에 공포장식을 하였다. ▲ 충무사 사당 ▲ 우수사들의 공덕비 ▲ 공덕비 상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가장 심한 8월 초 해남과 진도로 역사여행을 떠났다. 해남하면 육지의 끝이라는 땅끝마을이 있고, 그 땅끝마을에 이르기 전에 진도와 해남의 사이는 가깝지만 물길이 사나운 위험한 바다협곡이 있어 그 물길을 울돌목이라 이름하였다. 예전에는 반드시 배를 띄워 그 험한 바닷길을 건널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해남과 진도를 잇는 길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서 이제는 험한 바닷길에 작고 나약한 나룻배를 타지 않고도 진도와 해남은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가까운 곳이 되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오직 그길 뿐이었으니, 그 천혜의 자연을 헤쳐나가는 것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숙명이었고, 그 바다에 삶의 터전을 두고 살자니 바다의 심성이 어찌 변하는지 잘 관찰하면서 이를 잘 활용하면서 살아왔다. 울돌목은 말로만 들어오다 처음 가보았는데, 과연 울돌목은 그 변화가 무쌍하였다. 섬과 섬사이에 흐르는 물길은 293m 남짓한 가까운 거리였고, 바다는 마치 강물처럼 파도도 없었지만, 물길을 살펴보니 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