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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대문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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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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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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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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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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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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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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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을 찍는 사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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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탑에 소원을 빌며...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마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가고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이 오면 땅속에 뿌리를 두고 있던 꽃무릇에서 새싹이 나온다. 그런데 그 싹은 잎이 아닌 연녹색의 꽃대로 딱딱한 땅을 뜷고 올라와 정렬적인 빨간색으로 화려한 꽃을 피운다.
보통 식물들은 잎을 먼저 싹틔운 뒤에 꽃봉우리가 맺히고 꽃을 피우지만, 꽃무릇은 맨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꽃대에서 꽃을 피우고, 속절없이 그 꽃이 시들고 나면, 그 뒤에 땅속에서 또다시 잎이 나온다. 그래서 잎과 꽃이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서로가 그리워만 할 뿐 절대 만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여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는 뜻으로 상사화라고 한다.
한국에서 꽃무릇으로 유명한 절들은 전라남도 용천사, 불갑사가 있고, 전라북도에는 선운사가 있다. 이 절들은 절의 주변에 수천 수만평에 달하는 사찰주변이 온통 꽃무릇 천지가 되어 지금쯤 많은 사진가들이 주말이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번 주말이면 아마도 3개 사찰은 발디딜틈이 없을 것 같다.
비교적 북쪽인 이곳 길상사는 한 남자를 사랑한 길상화(법명) 김영한이 평생 시인 백석을 그리면서 고급요정으로 가꾸었던 곳으로, 그녀는 자신이 이룩한 모든 재산을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무소유를 실천하고 살던 법정스님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보시함으로써 요정이 절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백석과 길상화의 사연을 살펴보면 이렇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학했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은 자신의 스승 신윤국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의 감옥에 갇히게되자 그를 뒷바라지 하고, 면회하기 위하여 함흥에 갔다가 돈을 벌기 위하여 기생이 되었다.
그러나 일경의 불허로 스승의 면회도 뒷바라지도 못하고, 손님으로 왔던 백석을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두사람은 서로 열렬히 사랑하였으나, 백석의 집안에서 기생인 길상화를 도저히 용납하지 않아 두사람은 결혼하지 못하고 말았다.
백석은 이후 집안에서 반 강제결혼으로 가정을 이루었으나, 길상화를 잊지 못하여 집을 나와, 길상화에게 두사람이 만주로 도망치자고 하였으나, 길상화가 따라가지 않아 혼자서 백석만이 만주로 떠났다. 그렇게 헤어졌지만 길상화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백석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길상화의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의 앞길을 자신이 막을 수 없다고 하여 스스로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이후 일제로부터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백석은 북한에 남아 교수로 지냈다. 한편 길상화는 휴전선 이남인 서울에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일구어 큰 재산도 모으게 되었다.
이후로도 그녀는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사랑한 백석을 잊지 않고, 살았으며, 타계하기 전에 자신의 재산 중 일부인 2억은 젊은 시인들을 발굴하기 위하여 백석문학상의 자금으로 남기고, 나머지 전 재산은 자신이 존경한 스님인 법정스님에게 모두 기증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성북동에 길상사이다. 그런데 이곳에 언제부터인지 꽃무릇을 심어서 서울에서도 꽃무릇을 볼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 마치 백석과 길상화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살고 간 듯......9월 성북동 길상사에 피어난 꽃무릇을 보는 것은 백석과 길상화의 사랑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아름답지만 너무도 안타깝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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