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우수영의 본진이 있던 곳에 우수영 관광지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우수영과 진도사이 거세게 흐르는 물결을 거슬러 힘겹게 기관선이 오르고 있다. 왜선의 밑바닥에 쇠사슬을 걸 수 있게 만들었다는 기구. 사실성을 느끼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과연 저런 사슬로 수백척이 지나가는 배밑바닥을 걸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성을 느낄 수 있도록 다시 제작해야 할 듯.. 명량대첩탑이 세워진 우수영 관광지 공원 임진왜란 당시를 재현하여 만든 조각상들 대첩탑의 뒤에서 본 수군의 모습 왜적을 맞아 최후의 결전을 위하여 이순신 장군 앞에서 맹세하는 수군장수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다는 글귀로 이는 이순신장군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진도대교 밑에 설치된 조각상. 멀리 보이는 맞은편 진도에는 이순신장군상이 세워져있다. 파도는 없지만 물살이 거세흐르는 물길이 회오리치고 있다. 우수영 해송사이로 본 진도대교 노젓는 수군과 북치는 수군 전쟁당시를 재현한 작품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남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길게 내려간 육지의 끝 땅끝마을이 떠오른다. 그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고 가면 아름답게 펼쳐진 다도해 해
								▲ 해남 충무사 전경 사당 앞에 넓은 마당이 있다. ▲ 충무사 삼문. 솟을 삼문에 공포장식을 하였다. ▲ 충무사 사당 ▲ 우수사들의 공덕비 ▲ 공덕비 상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가장 심한 8월 초 해남과 진도로 역사여행을 떠났다. 해남하면 육지의 끝이라는 땅끝마을이 있고, 그 땅끝마을에 이르기 전에 진도와 해남의 사이는 가깝지만 물길이 사나운 위험한 바다협곡이 있어 그 물길을 울돌목이라 이름하였다. 예전에는 반드시 배를 띄워 그 험한 바닷길을 건널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해남과 진도를 잇는 길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서 이제는 험한 바닷길에 작고 나약한 나룻배를 타지 않고도 진도와 해남은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가까운 곳이 되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오직 그길 뿐이었으니, 그 천혜의 자연을 헤쳐나가는 것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숙명이었고, 그 바다에 삶의 터전을 두고 살자니 바다의 심성이 어찌 변하는지 잘 관찰하면서 이를 잘 활용하면서 살아왔다. 울돌목은 말로만 들어오다 처음 가보았는데, 과연 울돌목은 그 변화가 무쌍하였다. 섬과 섬사이에 흐르는 물길은 293m 남짓한 가까운 거리였고, 바다는 마치 강물처럼 파도도 없었지만, 물길을 살펴보니 가운
								해남에서 진도로 이어지는 우수영에는 우수영선착장이 있다. 우수영 선착장에는 거북선유람선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를 상상하면서 다도해를 유람할 수 있다. 울돌목 거북배 유람선을 가까이 본 뱃머리 거북선 설계 입면(추정 모형도) 전투선인 판옥선의 설계도(추정 모형도) 판옥선의 재현 판옥선의 깃발 한 사진작가가 우수영 선착장 주변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 모습. 무더위 속에 역사의 숨결을 찾아 그 현장에서 치열했던 옛날을 회상하는 듯 진지한 모습이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한국인의 삶에 거의 재생이 불가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끝이 났다. 그 길고긴 7년동안의 삶이란 그 처참한 형상을아무리 그럴듯한말과 글로 표현한다할 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우리는 처참한 지경을 당하면서도 그 전란을 견디어냈고, 그렇게나마피폐한 상처를 입고서도 우리는 그 전쟁의 패자가 아닌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장군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로 돌아간다면 그리 쉽게 수긍할수도 없는 때였다. 그 이유는 장군의 공이 큰 만큼 그
								해남군 이충무공명량대첩비와 비각 명량대첩비 대첩비의 옥개석 명량대첩비 탁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423년 전 조선의 전국토가 유린되던 임진왜란을 당하여, 정규 조선군은 전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연전 연패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은 압록강만 넘으면 중국으로 망명할 처지였고, 백성들은 왜군에 유린당하여도 어디에 기댈 곳없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참혹한 시대를 살았다. 그런 시대에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조선에는 이순신장군이 계셨고, 그가 있었기에 조선은 나라가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았고, 지금의 우리가 이어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충무공의 전공은 모두가 인정했지만, 그 공이 너무도 컸기에조선의 왕은 오히려 그게 두려웠다. 이순신장군이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 공이 모두가 허물이 되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간지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의 혁혁한 공을 알아주는 이들이 많아지자그의 공을 잊지않고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명량대첩비를 세우고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혼을 위로하는 글을지어 바쳤다.기자는 오늘 후학으로 해남땅을 지나다가이충무공의 행적을 더듬고 그의 행장을 살펴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종묘 안에 있는 공민왕 사당 사당 안 모습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차를 마시는 장면, 앞에는 기러기가 놓여있다. 기러기는 죽을 때까지 다시 짝을 찾지 않는다고하여 끝까지 금슬을 지키는 새라고하여 공민왕이 그린 발그림-1 힘차게 달리는 말-2 말그림-3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의 왕들의 신주를 모신 가장 성스럽다는 종묘에는 뜻하지 않게도 고려의 부흥을 꾀하다 비명횡사한 공민왕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일 같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기에 그리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사연은 찾을 수 없고, 공민왕과 그의 둘도없는 부인 원나라 황제의 딸이었던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영정을 대신하고 있다. 공민왕의 사당은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을 들어서면 제례를 주관하는 신관들이 향, 축문, 폐백등을 보관하는 향대청이 바로 있는데, 그 향대청의 뒷켠에 작은 건축물로 들어서있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측면이 한칸짜리로간소한 민도리집이지만 사당의 주변에별도로 담장을 두르고, 앞에는 대문을 설치하여 최소한의 격을 차려주고 있다. 공민왕은 원나라 말기 고려왕자로 태어나
								종묘의 정문=외대문 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으로 이어지는 3단 돌길이 있다. 왕 세자 제관의 길 외대문을 들어서면 있는 연못 제사를 지내기 위해 행차한 임금이 머무는 건물 제사에 참석하는 임금의 복장,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있다. 정전을 둘러싼 담장과 정전의 지붕 정전의 동측대문 정전으로 가는 보도길 정전의 좌우에는 익랑(날개건물)이 있다. 단순하면서도 엄격함이 느껴지는 종묘의 정전 정전의 각 한칸마다 왕들의 신위가 모셔져있고, 그 앞에는 판문으로 굳게 닫혀있다. 정전의 장식은 전혀 느낄 수 없으며, 붉은 석간주칠로 단순하게 단청이 되었다. 동익랑에서 본 정전과 서익랑 정전 앞의 퇴칸이 회랑처럼 보인다. 동익랑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구름문양이 새겨져있다. 구름은 곧 하늘로 오른다는 의미를 뜻하며, 바로 신들의 영역임을 암시한다. 밖에서 본 정전과 남문 정전의 3칸으로 된 남문. 옛날 같으면 감히 얼신도 못할 곳이지만,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구경하고 쉬어가는 곳이 되었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500년의 임금이 한곳에 모여 있는 곳이 종묘다. 왕조시대에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 수만평 넓은 저수지에 수백만송이 연꽃이 피어나 장관을 이루는 관곡지. ▲ 하루가 너무도 소중한 연꽃들..피고 나면 어느 덧 시들기 시작하나니.. ▲ 연꽃 밭의 연꽃들 이미 피고 진 연밥도 있고, 이제 피어나는 연꽃도 있다. ▲ 연꽃을 향하여 ▲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한때 ▲ 꽃이 피면 다시 시드나니.. ▲ 하늘을 향해 피어난 연꽃 ▲ 연꽃에 몰려든 손님(?)들 ▲ 연밭에서 연꽃을 향하여..한컷 ▲ 연꽃을 사진으로 열심히 담는 진사님 ▲ 남미에서 온 홍수련 연잎은 피어나면서 사랑을 말해요. ▲ 연꽃을 보러온 사람들. [한국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여름이면 피어나는 진흙밭에 뿌리를 둔 연꽃들.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2주정도가 절정을 이룬다. 연꽃은크기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하지만, 모두가 진흙으로 이루어진 연못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어쩌면 가장 지저분해서 그 물도 흐리지만, 연꽃은 다른 곳이 아닌 지저분한 진흙밭 그곳에 터전을 삼으니, 특이하기도 하다. 그런 연꽃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꽃을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의 상징으로 여기며, 부처님이 계신곳을 연화장
								▲ 장대비가 내린 뒤 불암산 꼭대기는구름에 휘감기고, ▲ 내린 비는 다시 구름이 되어 ▲ 안개비에 촉촉히 젖어든 석천암 암자 ▲ 그 암자에 오르는 조붓한 산길은 폭포수되어 흐르네.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장마철이 끝날 때까지 고대하던 단비가 안내려 폭염에 시들어가던 산천초목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단비가 내렸다. 오랫만에 내리는 단비를 맞고 숲의 나무와 풀들은 생기를 되찾았다.갑자기 내린 비에 계곡 산책로는 폭포수가 되어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하였다. 단비를 맞아 들판의 곡식들도 이제 알곡을 튼실히 맺고, 바닥을 보이던 전국의 저수지와 강물도 평소처럼 찰랑찰랑 물이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흐르지 않아 썩어가던 강물에서녹조와 싸우던 물고기들도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
								사양제에서 본 마이산, 커다란 말의 귀가 쫑긋한 모습 뽀족한 숫마이산 아래 은수사 왼쪽에는 펑퍼짐한 암마이산, 오른쪽에는 뽀족한 숫마이산 숫마이산 아래 은수사 대웅보전이 있다. 마이산을 이루는 역암들. 강가의 돌맹이들로 물에 닳고 닳아서 동글동글한 모양인데, 이 돌들이 수백미터가 쌓였으니 그 세월이 얼마인지.... 또 그 쌓인 돌들이 위에 쌓인 흙과 돌들에 압력을 받아서 콘크리트가 굳듯이 굳어서 된 것이 마이산이다. 돌맹이들 사이에 흙이 채워져 쌓인 역암. 콘크리트가 굳은 듯 보인다. 솟아오른 암마이산의 절벽 위에는 군데 군데 바윗돌이 흘러내려 감실(부처나 보살을 모시기 위해 파서 만든 굴)을 이루고 있고, 그 감실 안에는 돌탑들을 쌓았다. 깎아지른 암마이산의 절벽과 그 아래 탑사 경내. 탐방객이 보인다. 암마이산 절벽 위 중간에 턱진 곳에는 부처님을 모셨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덕유산이 위치한 진안고원에는 그 형상도 특이한 마이산이 있다. 마이산은 멀리서 보면 말의 두귀처럼 쫑긋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거친 돌맹이들이 가득한 역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지형으로 보인다
								성안 산책로 국청사 출입문 천불전 측면 대웅전 천불전 삼성각 대웅전과 천불전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계유산이 된 남한산성에는 여러 사찰이 있다. 남한산성의 사찰은 조선 중기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가 임진왜란 같은 병란을 당할 경우 지방군들이 한양으로 올 때까지 머물 수 있는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한양 도성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이다. 그런데 남한산성에 사찰이 여럿 있는 이유는 유교를 국시로 하던 조선조 조정에서 불교를 용인해서가 아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관청의승인을 받지 않고 승려가 된다는 것 자체가 범법자가 되던 시대이기에 산성을 축조하고 그 안에 절을 지을 수 있게 했다는 것도매우 이색적으로 느껴지지만, 이는 조선조정이 이탈한 백성들이승려가 되는 것을 막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잡아다가 옥살이를 시키는 대신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절과 사찰의 승려를 이용하여조정에서는 별도의 돈과 인력을 들이지 않고 산성을 축조하고보수하고지킬수 있는 자원으로 사찰의 승려들을 활용하였고, 승려들은 조정의 정식승인은 받지 않았지만 묵인하에 스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정식으로 승려가 되려면 국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