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각, 카메라를 조준하고 있는사람들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에는 물 속에 물고기를 사냥하는 민물가마우지가 살고있는 섬을 배경으로 황홀한일출을 기대하며 나온 사람들로 주말이면 붐빈다. 여름철이면 해가 뜨는 시간도 빨라 서울근처에서는 새벽 4시면 눈비비고 집에서 나와야 한다. 이날 모두들 대어(걸출한 사진)를 낚았을까?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 수확을 기다리는 보리밭 ▲ 익어가는 보리들 ▲ 토실토실 잘 익은 보리 ▲ 아직 며칠은 더 익어야할 보리 ▲ 깜부기 병에 걸린 보리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지난해 가을에 뿌린 보리가 초봄에 싹이 터서 이제는 다 익었다. 대부분의 보리밭은 이미 추수가 끝이 나고, 보리를 심었던 들녘에는 벼로 모내기를 한 곳도 많다. 그러나 예전처럼 땅을 쉬지 않고 놀리던 시대는 지나고, 이제는 보리를 심었던 곳에 벼를 심어 쌀을 한톨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투쟁하듯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땅도 좀 쉬어가면서 작물을 길러내고, 사람도 쉬어가면서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리를 심었던 밭에 수확이 끝나면 벼대신 야채를 심는 경우가 더 많게 되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보리밭에도 부분적으로는 익어가는 시기는 다르다, 같은 날 심었지만 싹이 트는 시기가 하루이틀 다르고, 또 같은 밭이지만 물공급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어떤 보리는 이미 다 익어 노랗기 그지 없고, 어떤 보리는 아직 며칠은 더 익어야할 처지이다. 또 같은 밭에서 자라고 있지만, 어떤 보리는 깜부기 병에 걸려서 수확도 못하고, 병원체만 다른 보리에 전해줄 처지이기도 하다. 똑같은 세상을
▲ 국회의원회관 제2회의실 반도사관으로 사라진 고대사를 되찾겠다는 뜻으로 모인 사람들,비록 성대하지는 못했지만 국회의원회관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 국회의원(임내현)의 축사,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뜻을 받들겠다며 이번 모임을 기점으로 전폭적인 협조를 하겠다고 했다. ▲ 회의장에 모인 청중들 ▲ 발제자의 의견에 열중하고 있는 청중들 ▲ 포럼에 참석한 발제자들, 좌로부터 김정권 박정진 김기옥 성헌식 ▲ 동북아역사포럼 김기옥 회장과 문화인류학자 박정진 박사 ▲ 중국 역사책을 뒤져서 찾아낸 요하의 변천을 설명하는 성헌식 고구려역사보전회 학술위원장 [한국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지난 6월8일 월요일 국회의원회관 회의실에서는아주 뜻깊은 발표회가있었다. 황주홍의원 주최로열린 이날의 주제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반도사관'에 대한 열띤 토론과 연구 발표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흔히 한민족의 역사는 유구하여 그 역사가 반만년이 된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에 서술된 역사는 불과 2000년도 안된다. 그리고 그 이상은 모두 신화라고 가르치고 있다. 조금 생각있는 사
▲ 소악루 전경-1 ▲ 소악루 전경-2 ▲ 소악루 전경-3 ▲ 소악루 전경-4 ▲ 소악루에서 본 강변 ▲ 난지도가 보이는 풍경 제2성산대로도 보인다. ▲ 북쪽의 안산 ▲ 방화대교 ▲ 가양대교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영조 때 동북현감을 역임했던 이유 (1645-1721)가양천관아의 뒷산인 현재 강서구 궁산공원 북측에 지었던 정자로 중국 동정호를 연상하며 동정호에 우뚝선 악양루를 재현하여 지었던 악양루가 사라진 뒤 또다시 재현한것이 오늘의 소악루다. 처음에 악양루를 지었을 당시에도 누각에 오르면 넓은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한강의 북쪽에는안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등이 보였고, 한강줄기로 유유히 오르내리는 각종 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들도 잘 볼 수있는 곳으로, 해발고도는 높지 않지만 전망은 무척 좋았던 곳으로 작지만 200여 미터둘레의 성곽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대 진경산수화를 그렸던 겸재 정선도 잠시나마이곳의 현감으로 있을 때 자주 올랐고,그가 직접 보았던 한강풍경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남겼다. 그 그림을 경교명승첩이라 하여 지금도 전하고 있다. 현재의 소악루는 본래 있던 궁산 악양루의 위치는 아니지만궁산에 있었
현충사 정문, 이 문을 들어서면 충무공 기념관과 현충사 그리고 충무공의 옛집 등이 있다. 현충사로 오르는 진입로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1 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2 본전 앞 솟을 삼문(충의문) 현충사 본전과 앞 마당 솟을 삼문에서 본 현충사 본전 충무공 영정 ▲ 현충사 본전에서 본 아산뜰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어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신 영령들을 추모하는 현충일이었다. 해마다 6월 6일이면 국립묘지를 찾아 헌화와 향을 사르며 가신님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국립묘지에 모셔진 이들은 주로 1950년 한국전쟁과 독립운동에 희생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400여년 전 임진왜란을 맞아탁월한 지도력과 전술로 일본해군을 꼼짝못하게 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은공 또한잊을 수는 없는 날이다. 살아 생전에는선조임금으로 부터 제대로된 대접도 받지 못하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그의 공이 빛나고 있지만,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조국을 위해산화한 선열들의 넋과 함께 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도 잊지 않고추모의 예를 잊지 갖추는 우리들이었으면 한다.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영웅으로 길이 빛날 성웅 충무공을 모
▲ 충무공 아산옛집 전경 ▲ 집 밖에서 본 충무공 옛집모습 ▲ 대문간에서 본 집안 ▲ 본채 입구에서 본 안채, 대청마루가 넓게 열려있고, 뒷뜰에는 화초가 활짝폈다. ▲ 터진 ㅁ자집의 터진쪽에서 본 본채 ▲ 대청과 안방의 앞에 아궁이가 있는 모습, 아궁이는 퇴칸마루의 아래를 이용하였다. 안채 대청마루에서 본 후원의 화초류들. 꽃이 활짝 피었다. ▲ 서측면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다. ▲ 뒷뜰과 장독대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이 일본에 완전히 먹히는 것을 막아낸 불세출의 민족영웅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사시던 옛집이다. 장군이 언제부터 이곳에 사셨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지금은 이 옛집바로 옆에 현충사를 지어 충무공을 모신 사당으로 그를 기리는 한민족의 후손들이 그의 초상화 앞에 향을 사르며추모의 예를 드리고 있다. 공의 옛집은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고 하며, 집 바로 앞에는 우물이 있어 당시 마을의 공동우물로 쓰였다고 한다. 공의 집은 앞쪽이 길게 8칸이 '一'자로 펼쳐진사랑채가있고, 서남측으로 사랑방으로쓰이던 방들이있고, 그 사랑채 중간쯤에 1칸 대문간이 있다. 그리고 동남측으로는 4칸의 마루가 있어 개방적인 사랑채
감로탱화 전체 상단의 7여래. 여러 세계에 있는 부처님들이 중생을 고통속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애쓴다는 뜻. 상단 우측의 부처님과 보살, 아미타불이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지켜본다. 중간의 제단에 공양물들, 촛대, 꽃, 과일, 음식물(밥)을 차린 제단 늘 배고픔에 목말라 하는 아귀 상단의 좌측에 있는 지장보살, 인로왕보살, 도명존자, 무독귀대왕 등 인간세상의 삶 -1 제단 앞에서 스님들이 천도재를 지내는 모습 인간세상의 삶 -2 주막에서 술도 마시고 인간세상의 삶 -3 제단을 차려두고 제를 지내는 모습 인간세상의 삶 -4 광대의 줄타기 공연과 여러가지 놀이를 감상하며 사는 모습 인간세상의 삶 -5 춤추며 노는 모습과 병자를 치료하는 모습 인간세상의 삶 -6 전쟁으로 피난가고 싸우는 모습 인간세상의 삶-7바둑도 두고 싸움도 하고 민중들의살던 모습 인간세상의 삶 -8, 왕과 신하들이 외유하는 모습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사찰벽화 가운데 예불전(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명부전등)의 안쪽에 그려진 벽화를 탱화라고 한다. 탱화에는 불단 바로 뒤에 있는 탱화가 있고, 불단 좌우에 그려진 탱화가 있
▲ 차창에 비친 연등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곳곳에 연등이 내 걸려있다. 시내 한 작은 절 마당에 내걸린 연등이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 유리에 아름답게 비춰지는 모습이 색다르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한국문화신문 = 양양 낙산사 최우성 기자]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 가운데 하나인 양양 낙산사에서는 불기 2559년을 맞아 오전 11시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을 갖는다. 낙산사 대웅전 앞에서 거행되는 이날 법요식은 삼귀의례와 찬불가에 이어 반야심경, 헌화 및 관불의 예를 갖춘 뒤 내빈들의 봉축사가 이어질 예정이다. 낙산사는 서기 671년(문무왕 11) 의상대사가 세운 천년고찰로 의상대사가 홍련암에서 관세음보살을 직접 만났다고 전해지며 관세음보살의 성지로 많은 불자들이 꼭 한번은 오고 싶어하는 절이다. 낙산사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여러곳에 모셔져 있는데, 바닷가 절벽의 홍련암과, 오방산 꼭대기의 원통전, 그리고 바다가 내려보이는 언덕 위의 해수관세음보살이 유명하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온 나라에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햇살처럼 내려쪼이길 기원해 본다. ▲ 낙산사 법요식 모습 ▲ 부처님오신날 아침 관불을 위해 기다리는 아기부처 모습 1 ▲ 아기부처에게 관불시키는 모습 2 ▲ 아기부처에게 관불시키는 모습 3 ▲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상 .(부처님오신날 전야 모습 3) ▲ 낙산사 연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부처님오신날 전야 모습 1)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난 번에 이어 팔상도의 2번째 기사로 석가모니가 궁궐의 호화로운 생활을 스스로 버리고 구도를 위하여 궁을 벗어나는 장면부터 전개된다. ▲ 유성출가상 팔상도의 다섯번째 그림으로 유성출가상이다.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숫도다나(정반)왕은 아들이 어려서부터사색에 잠기고 인생에 대한 깊은 생각에잠기는 때가 많아지자,언제 궁을 떠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게 하고자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갖추어주고 늘 연회를 베풀어 세상이 즐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아무리 즐겁고 행복하다 할지라도, 사람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만은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북문을 통해 나가서 보았던 수행자의 모습에 자신도 생사의 근원을 깨닫고자 다짐하고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자신의 애마를 타고 길을 나섰다. ▲ 설산수도상 6번째 그림은 설산수도상이다. 6년동안 히말라야 설산에서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수도를 하면서 고행하는 장면이다. 먹은게 없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고행 중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그 때 깨달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