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추암 해수욕장 겨울 바닷가를 찾아서 추암과 형제섬 그리고 화물선 추암 형제섬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쓸쓸한 바닷가. 그러나 아름다운 바닷가. 본래 아름답기 그지 없는 삼척의 추암이지만, 10여년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한국인들에게도 다시금 그 아름다움을 새롭게알리게 된 추암해수욕장. 이제는 세계인들이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 많이도 온다고 한다. 지금은 여름의 해수욕객들이 없어 쓸쓸한 백사장에 갈매기들만 날아다니는 한가한 추암해수욕장이지만 그 풍광만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한국인의 삶속에 수천년 이어져 왔던 성황당과 장승! 마을이 있으면 마을을 지켜주는 성황신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어디든 마을이 있는 곳에는 마을의 입구에는 성황당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마을에 들어가려면 그 마을의성황신을 모신 사당이나 당목 앞에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금 추스르고 반드시 예를 갖추고서야 마을안으로 들어왔던 것이 선조들의 당연한 일상이었습니다. 특히나 외지인들이 남의 마을을 지날 때에는 더욱 조신해야 했었고, 외지인의 출입은 원칙적으로 금기시 하였습니다. 그런 조신이 있었기에 많은 전염병도 쉽게 돌지 않았던 우리의 생활철학이었는데... 그런 신앙의 대상이던 성황당과 장승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게 과학적이지 않다는 교육을 받은 덕분에... 인간도 자연의 한 작은 존재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선조들의 철학과 생활이 정말로틀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은 경복궁 옆 국립민속박물관 앞에서...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 바다에서 본 안면암 ▲ 안면암에서 본 부교와 선상팬션 ▲ 안면암 부상탑 ▲ 안면도 선상팬션 ▲ 안면암 7층3쌍탑 ▲ 안면암 7층탑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태안군 안면도 안면암은최근에 지어진 절이다. 안면암은 참회 천도 발원 수행도량으로 자처하며 바다를 동쪽으로 둔 서해안에 위치하여특이한 경관을 보여준다. 특히 서해에 있으면서 동쪽에서 떠오르는해돋이를 볼 수 있어 더욱 신비감이 들기도 한다. 5년전 유조선 침몰사건으로 인하여 수많은 지역민들이 파탄지경에 삶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국민의 열정으로 갯벌과 방파제의 작은 돌맹이 하나하나를 닦아내어 되살린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안면도에 안면암이 있어 특이한 경관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기도처가 되고 있다. 안면암의 바닷가에 떠있는 듯 보이는 2개의 섬사이에 놓여진 부상교를 타고 걸어가면 두섬 사이에는 부상탑이 있는데 부상탑은 기름우출사고로 인하여 바닷속에 살던 수많은 생명들의 천도를 발원하고, 또 이 바다에 의지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만든 한국 유일의 떠있는 탑이다. 그리하여 그 이름도 부상탑이다. 새로 지어진 안면암이기에 그모습이 옛 절과는의
금강산 그림 소나무와 학 평양 대동강 연광정 압구정도 기우 관출도. 노자가 함곡관을 빠져나가는 그림 함흥 본궁 소나무 그림 고산 관학도 노인이 학을 보는 그림 북공대 유학자 정이가 귀양가는 그림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독일인 선교사에 의해 수집되어 1925년무렵 독일 상트오틸렌 수도원에 간직되어있던 겸재 정선의 화첩이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는 조선 후기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조선만의 회화문화를이끌어온 화가였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의 회화는 우리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고, 그런 그의 그림은 외국인의 안목으로도 정말 훌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 나오는 그림들은 조선의 산수화도 있지만 중국의 고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다시 돌아와 우리땅의 고궁박물관에서 보게된 정선의 화첩 그림들은 2014년 2월 2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 앞서남쪽 코너)에서 전시되고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창덕궁의 후원으로 작지만 멋진 정자다. 평면이 +자 형인데 연못으로 한 발 내민 모습이 더욱 기품을 느끼게 한다. 여름이면 모든 문을 다 들어올려 처마에 매달 수 있도록 설계되어 더위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시원하리라 짐작된다. 연못에는 향기로운 연들이 피어나고 물속에는 잉어들이 노니는 아름다운 연꽃밭의 부용정은 경복궁 후원의 향원정과 함께 궁궐내 아름다운 정자로 서로 앞을 다툰다. 유학자들이 보는 연꽃은 군자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며 부용정의 부용은 연꽃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추경의 부용정에서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왕관-1 왕관-2 왕관-3 왕관-4 왕관상세-1 왕관상세-2 왕관상세-3 왕관상세-4 왕실의 홀과 보주를 그린 그림 왕관에 새겨진 인물들-1 왕관에 새겨진 인물들-2 왕관과 왕실의 상징물들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헝가리 민족은 기원전 500년경 동쪽의 유목민족이 이동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지역적으로 유럽의 동쪽에 위치하여 1000년경에 들어온 기독교로 개종하여유럽의 방파제가 되었으며, 1450~1490년 경에는마치시1세가 통치할 때 강성하여 영토도 가장 넓었다. 이후 오스만제국이 팽창하면서 16세기에는 수도가 함락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오스만제국이 물러간 뒤에는 300년 간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가 헝가리를 통치하였으며 1740년~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통치시기에 오스트리아의 귀족문화를 받아들여 문화도 발전하였고 독립운동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의 결실로 188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이 건설되었다.이시기 헝가리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를 아우르는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고 이후 공산화가 되어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1956년 스탈린에 저항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홍주읍성 성문(홍주성 내부) 홍주읍성 홍화문(윗사진의 외부) 홍주읍성의 외벽 홍주성내 정자 정자와 수양버드나무 홍주성 관아건물 홍주성 홍주아문 홍주성 동문 홍주성 지도 서해안으로 펼처진 홍주는 내포평야의 중심지였다. 곡창지역으로 풍부한 농산물이 나고, 한양에서그리 멀지 않아 한양의 양반들은 홍주근처에 전답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서해안으로 침범한 왜구들의 노략질에 대비하여 평야지역에 읍성을 짓고 위급시에는 성내로 모든 백성이 피신하였다. 홍주는 이제 홍성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많은 근세 인물들이 배출되어 다시보게 하는 충절의 고장이다. 백야 김좌진장군 만해 한용운스님 고암 이응노화백 남당 한원진 등으로 대표되는 충절의 고장 홍주를 찾아보았다. 일제 강점기에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하였으나 아직 본보습을 찾으려면 많은 세월과 자금이 필요할 것 같다. 옛날 관아가 차지하던 곳에는 군청과 학교가 들어서 훼손의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영원의 전경 홍살문에서 본 영원과 비각 영원의 정자각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남양주시 영원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친왕)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의 무덤이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지 않았다면 황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기울어간 나라를 어찌할 수 없었기에 그는 황태자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 위상에 따라 무덤도 건립되었다. 의민황태자는 고종과 엄비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고종의 3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로 교육을 떠나 일본황실의 방자여사와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손을 두지는 못하였다. 영왕은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귀국하였다가 1970년 별세하였고 그의 부인인황태자비는 귀국하여창덕궁 낙선재에 살다가1989년 4월 30일 별세하여 이곳 영원에 합장,모셔져 있다. 나라의 황태자라는영광스런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기울어가는 나라의 황태자는 영광의 삶이 아니라 어쩌면 평민보다도 더욱 고달픈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자신의 아버지인 고종과 자신의 형이었던 순종의 능역을 옆에 두고 영원히 묻혀서 지난 세월의 아쉬움을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후손들이여!!! 다시는 나라를 빼았기는 서러움을 겪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충남 서산군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간월암!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태조)와 깊은 관계가 있는 유서깊은 암자였다. 하지만조선왕조가 배불정책을 펴는 통에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라져 그 이름만 전해오던 시절도 길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쇠망한 뒤 일제 식민지 후반기에야 수덕사의 만공스님이 다시금 중창하였다고 한다. 간월암은 무학대사가파도를 벗삼아 수도정진하다가 두둥실 떠오른 달을 보고 불도를 얻었다고 하여 그 이름도 간월암이다. 간월암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밀물과 썰물에 섬이 되었다가 육지가 되었다가를무한 세월 반복하며, 바다를 숙명처럼 이고 사는 사람들의 해원의 암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다를주관하는 용왕을 모신 작은전각이 바다를 향하여 건립되었다. 인간사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을 것인가?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바다를 외면할 수 없으니 배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도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용왕이시어 부디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합니다. 또 불의의 객이된 이들의 영혼은 극락왕생하게 살피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 밀물이 들기전에 왕래가 자유로운 간월암 ▲ 밀불이 들어오자 부지런히 섬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 신발대신 장화를 신고 섬을 나오는 스님. ▲ 완전히 섬이 된 간월암 간월도 간월암을 담는 사진가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충남 서산군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간월암은 조선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태어났던 곳이면서 또한깨침을 얻은 곳으로 유명하다.무학대사의 어머니는 무학대사를 낳기 전에 이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를 느껴 간월암의 양지바른 곳에 그를 낳았지만 어찌할 바를몰라 옷가지만 덮어둔채 고을로 들어가 원님을 뵈었는데 고을원님이 너무도 수척한 여인에게 그 연유를 묻고 답을 얻어 그녀가 아이를 낳은 곳에 이르러 보니 학이 날개를 펴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이는 무학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차후 출가하여 나옹화상으로부터 법을 전수받고 이곳 간월암에서 달을 보고 깨침을 얻었다고 하여 간월암이라 명하였다. 하지만 간월암도 조선조의 배불정책에 폐사가 되어 섬으로만 되었던 것을 1941년 한국 근세의 선승인 만공스님이 간월암을 다시 중창하고 1000일 기도를 드리면서 조국의 광복을 빌었다고 한다. 하루 2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