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1 왕관-2 왕관-3 왕관-4 왕관상세-1 왕관상세-2 왕관상세-3 왕관상세-4 왕실의 홀과 보주를 그린 그림 왕관에 새겨진 인물들-1 왕관에 새겨진 인물들-2 왕관과 왕실의 상징물들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헝가리 민족은 기원전 500년경 동쪽의 유목민족이 이동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지역적으로 유럽의 동쪽에 위치하여 1000년경에 들어온 기독교로 개종하여유럽의 방파제가 되었으며, 1450~1490년 경에는마치시1세가 통치할 때 강성하여 영토도 가장 넓었다. 이후 오스만제국이 팽창하면서 16세기에는 수도가 함락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오스만제국이 물러간 뒤에는 300년 간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가 헝가리를 통치하였으며 1740년~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통치시기에 오스트리아의 귀족문화를 받아들여 문화도 발전하였고 독립운동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의 결실로 188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이 건설되었다.이시기 헝가리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를 아우르는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고 이후 공산화가 되어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1956년 스탈린에 저항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홍주읍성 성문(홍주성 내부) 홍주읍성 홍화문(윗사진의 외부) 홍주읍성의 외벽 홍주성내 정자 정자와 수양버드나무 홍주성 관아건물 홍주성 홍주아문 홍주성 동문 홍주성 지도 서해안으로 펼처진 홍주는 내포평야의 중심지였다. 곡창지역으로 풍부한 농산물이 나고, 한양에서그리 멀지 않아 한양의 양반들은 홍주근처에 전답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서해안으로 침범한 왜구들의 노략질에 대비하여 평야지역에 읍성을 짓고 위급시에는 성내로 모든 백성이 피신하였다. 홍주는 이제 홍성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많은 근세 인물들이 배출되어 다시보게 하는 충절의 고장이다. 백야 김좌진장군 만해 한용운스님 고암 이응노화백 남당 한원진 등으로 대표되는 충절의 고장 홍주를 찾아보았다. 일제 강점기에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하였으나 아직 본보습을 찾으려면 많은 세월과 자금이 필요할 것 같다. 옛날 관아가 차지하던 곳에는 군청과 학교가 들어서 훼손의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영원의 전경 홍살문에서 본 영원과 비각 영원의 정자각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남양주시 영원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친왕)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의 무덤이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지 않았다면 황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기울어간 나라를 어찌할 수 없었기에 그는 황태자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 위상에 따라 무덤도 건립되었다. 의민황태자는 고종과 엄비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고종의 3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로 교육을 떠나 일본황실의 방자여사와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손을 두지는 못하였다. 영왕은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귀국하였다가 1970년 별세하였고 그의 부인인황태자비는 귀국하여창덕궁 낙선재에 살다가1989년 4월 30일 별세하여 이곳 영원에 합장,모셔져 있다. 나라의 황태자라는영광스런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기울어가는 나라의 황태자는 영광의 삶이 아니라 어쩌면 평민보다도 더욱 고달픈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자신의 아버지인 고종과 자신의 형이었던 순종의 능역을 옆에 두고 영원히 묻혀서 지난 세월의 아쉬움을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후손들이여!!! 다시는 나라를 빼았기는 서러움을 겪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충남 서산군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간월암!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태조)와 깊은 관계가 있는 유서깊은 암자였다. 하지만조선왕조가 배불정책을 펴는 통에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라져 그 이름만 전해오던 시절도 길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쇠망한 뒤 일제 식민지 후반기에야 수덕사의 만공스님이 다시금 중창하였다고 한다. 간월암은 무학대사가파도를 벗삼아 수도정진하다가 두둥실 떠오른 달을 보고 불도를 얻었다고 하여 그 이름도 간월암이다. 간월암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밀물과 썰물에 섬이 되었다가 육지가 되었다가를무한 세월 반복하며, 바다를 숙명처럼 이고 사는 사람들의 해원의 암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다를주관하는 용왕을 모신 작은전각이 바다를 향하여 건립되었다. 인간사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을 것인가?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바다를 외면할 수 없으니 배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도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용왕이시어 부디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합니다. 또 불의의 객이된 이들의 영혼은 극락왕생하게 살피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 밀물이 들기전에 왕래가 자유로운 간월암 ▲ 밀불이 들어오자 부지런히 섬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 신발대신 장화를 신고 섬을 나오는 스님. ▲ 완전히 섬이 된 간월암 간월도 간월암을 담는 사진가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충남 서산군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간월암은 조선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태어났던 곳이면서 또한깨침을 얻은 곳으로 유명하다.무학대사의 어머니는 무학대사를 낳기 전에 이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를 느껴 간월암의 양지바른 곳에 그를 낳았지만 어찌할 바를몰라 옷가지만 덮어둔채 고을로 들어가 원님을 뵈었는데 고을원님이 너무도 수척한 여인에게 그 연유를 묻고 답을 얻어 그녀가 아이를 낳은 곳에 이르러 보니 학이 날개를 펴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이는 무학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차후 출가하여 나옹화상으로부터 법을 전수받고 이곳 간월암에서 달을 보고 깨침을 얻었다고 하여 간월암이라 명하였다. 하지만 간월암도 조선조의 배불정책에 폐사가 되어 섬으로만 되었던 것을 1941년 한국 근세의 선승인 만공스님이 간월암을 다시 중창하고 1000일 기도를 드리면서 조국의 광복을 빌었다고 한다. 하루 2차례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 꽃지해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섬 !! 밀물에는 섬이었다가 썰물이면 육지가 되는 곳, 섬과 육지를 매일 2 차례 무한정 반복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의 흔적보다 더 오랫적 존재였을것 같은 섬아닌 섬. 변함없이 늘 저리도 아름답게 서있네요!! 일몰이 더욱 아름다와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꼭 가보아야할 명소 중 열 손까락 안에 드는 명승입니다!!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에서 해삼 한 접시에 소주도 한 잔!!! 캬!!!!
▲ 푸른 잎과 봉우리만 있는 코끼리 국화꽃 ▲ 활짝 핀 국화꽃 코끼리 ▲ 국화 코끼리 가족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코끼리 모양으로 단장한 조계사 경내 국화꽃 전시회 처음에는 푸른 잎만 보이다가 하얀 코끼리로 활짝 피어났습니다. 코끼리는 한 번 세운 원력은 그 원력을 이룰때까지 묵묵히 수행한다하여 행원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코끼리와 함께 있는 보살은 보현보살로 믿음도 중요하지만 행하지 못한다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조선중기 권문해가 관직을 사직한 뒤 고향땅에 내려와 당쟁과 권력의 싸움에서 떠나 자연을 벗삼아 살고자 지은 원림으로 권문해가 세상을 떠난 뒤 임진란때 불탔던 것을 그의 후손이 중건하였다. 권문해는 예천이 본관으로 학문적으로는 퇴계이황의 문하이며 선조시절 젊은 유학자였던 유성룡, 김성일과도 친분이 깊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 조선의 설화를 집대성한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책을써서 우리나라 설화를 집대성하였다고 한다. 초간정은 그의 호에서 유래한 정자의 이름이며 심산계곡과 소나무가 우거진 풍광이 아름다워 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었다. 초간정은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 근처에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
우이암 바위 꼭대기에 힘겹게 오른 암벽등반가가 올라 있다.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국의 수도 서울 시민의 정신적 쉼터인 북한산과 도봉산을 끼고 자리한 우이동은 말 그대로 소의 귀와 관련된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소의 귀와 관계되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 짐작 되지만, 그 소의 귀가 무엇이며어디에 있는지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버스를 타고 우이동 입구에 내려보면, 장흥으로 넘어가는 긴고개가 있으며 이를우이령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고개가 소귀처럼 생겨서 우이동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름있는 산이 있으면 그 산에 의지하여 많은 절이있듯, 서울의 진산인 도봉산 북한산 주위에도많은 절과 암자들이 있다. 그래서 둘러보니 도선사 석굴암 천축사 회룡사 망월사, 광륜사, 봉국사, 원효사, 호암사등등 많은 절들이 보이고, 그 중에 문득 눈에 드는 우이암이 눈에 들어온다. 올커니 우이동과 우이암이 무슨 관계가 있는 절인가 싶어 도봉산 마루쯤에 있는 우이암을 찾아가 2시간 가량땀을 흘리며 올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한소끔 땀을 내고 산마루에 쉬는데 천축사가 보인다. 지도상으로 볼 때 천축사 윗쪽에 우이령이라 했으니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안암동 보타사 관세음보살상 자연적으로 형성된화강암 바위 암벽에 선각으로 보살상을 조각하였다.오른손은 시무외인(중생의 근심과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뜻의 손모습)과 왼손은 선정인(보살이나 부처가 선정에 들었을 때를 나타낸 손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 제작된 보살상으로 본래는 채색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흔적이 입술 주변에 약간 붉은 색으로 나타나 있다. 상호(부처나 보살의 얼굴모습)도 원만하게 보이며 머리에는 관세음보살임을 나타내는 보관을 쓰고 있어서 관세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보타사에는 근세 승가교육의 중심이었던중앙승가대학이 오랫동안 있었기에 승가교육의 중심이었으나, 중앙승가대학이 김포로 확장이전하여 이제는 무척 한적한 도심속의 암자가 되었다. 보타사 마애관음보살은 오랜세월을 견디면서도 큰 손상이 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있어 보물급이나 현재는 서울시유형문화재89호로 지정되었다. 보타사는 고려대학교 근처 개운사 안쪽에 있으며 절 자체가 고려대학교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