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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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덕사 앞 호수에서 본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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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덕사 들머리 안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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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 선생이 사시던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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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 선생을 모신 전각(현판=성충대의),후학들이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방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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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앞에서 분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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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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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 선생의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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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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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선생 가족 사당과 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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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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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 선생 생전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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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쓰시던 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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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갓과 망건 |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 경주 최씨 문중의 자손으로 포천에서 태어나 21살인 185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인 대원군의 시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유배를 당하였고, 그뒤 정부 관료가 되어 관직생활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생은 일본이 침략의 근거로 삼기 위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자 1875년에는 병자수호조약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조약의 상사를 반대하여 도끼를 짊어지고 상소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했다. 1895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렸으며 그 뒤 1905년 소위 을사 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을사 5적(五賊)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疏) 등 코고 작은 정부시책을 비판하여 여러차례 구금 되었다.
국운이 기우는 것을 바로 세우고자 뜻을 품었으나 기울어가는 나라를 선비 한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못함을 알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1900년 이곳 청양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6년 가묘에 하직을 고하고 애제자 고석진의 지인인 임병찬이 낙안군수를 역임한 후 의병규합에 나섬에 선생을 맹주로 모실 것을 지극히 소원하여 그에 응하여 전북 순창 태인에서 의병을 모아 투쟁의 일선에 나섰다. 그뒤 모은 의병의 수가 800에 이르러 남원진입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의병을 자진 해산하고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선생과 의병대 지휘자들은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하여 재판을 받다 대마도로 압송되어 결국 단식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선생은 일제에서 해방된 후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모덕사는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위치하며 최익현 선생이 거처하던 고택과 가내 사당 있는 곳에 정부에서 선생의 나라사랑의 충성심과 학덕을 길이 후손들이 이어 받을 수 있도록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건립한 영당이다.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사당은 이후 전국 각지에 세워져 선생의 덕을 길이 전하고 있다. 전국의 최익현 선생 사우로는 포천의 채산사, 군산 현충단, 가평 삼충단, 진안 이산묘, 진안 영곡사, 순창 지산사, 정읍 시산사, 정읍 무성서원, 고창 도동사, 광주 대산사. 함평 월악사, 곡성 오강사, 구례 봉산사, 보성 모충사, 무안 평산사, 화순 춘산사, 신안 적려유허비 울진 아산영당, 하동 운암영당, 서귀포 면암 유허비, 대마도에 순국비 등 전국은 물론 나라밖에까지도 많이 있다. 찬바람 스치는 사당 모덕사를 둘러보며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본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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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