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반가사유상)은 2기가 있다. 2기의 반가사유상 중 먼저 국보 제78호가 된 것이 오늘 소개하는 반가사유상이고 뒤이어 국보 제83호가 된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세상에는 국보 제83호가 더 많이 알려져있다. 이 2기의 반가사유상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실에서 함께 볼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불상만큼 조형감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러한 반사사유상의 조성시기는 주로 6∼7세기로 보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무릎 위에 걸치고, 왼손으로 오른쪽 발목을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발 무릎 위에 받치고 손가락 2개를 펴 얼굴 볼에 대고 있는데, 얼굴은 부드럽고 둥글며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으며 눈은 가늘게 뜬채 발 아래를 응시하고 있다. 그 모습으로 반가사유상을 만든 까닭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하여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용광로에 청동을 녹여서 미리 만든 조형틀에 부어 만들었는데, 머리부분과 몸통부분은 별도로 주조하여 만든 뒤, 두부분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끝나가는 날 잔설이 남아있는 용인시 한 야산에 고려시대 마지막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를 찾았다. 선생은 1337년 태어나 1392년 정적에 의하여 생을 마친 고려시대 최후의 학자로 자신의 부귀영화 보다는 당대의 의인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구걸하듯 살지 않고 자신이 살았던 나라를 위하여 당당히 죽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또 협조하면 부귀영화가 보장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정의로운 삶을 살다간 것이다. 혼란의 고려말 덕망있는 학자로 조선에 참여하지 않은 3인의 유학자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호(號)에 은(隱)을 썼기에 고려3은으로 볼리운다. 이들은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가 있다. 정몽주선생은 고려후기 몽골간섭기에 태어나 고려 공민왕 9년(1360), 과거시험에 3회에 걸쳐 연속으로 장원급제하여 두루 관직을 역임하며 대사성문호찬성사,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호시중 등 당시 최고위 관료가 되었으며 그 공이 커 안사공신의 휘호도 받았다. 선생은 후진양성을 위하여 오부학당을 세우고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교의 믿음에 있어서 관세음보살은 부처님보다도 더 많이 불리우고 있으며, 그만큼 많고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조각되어 불전에 모셔져 왔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친 분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목표라면, 보살은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존재들을 부처님처럼 깨달음으로 인도하거나, 세상살이에 힘들고 고달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로 부처와 사람의 중간자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불교의 수많은 보살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불리우는 대표적 보살로 대승불교를 따르는 한국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오로지 관세음보살만을 모시고 기도하는 절들도 많이 있다. 관세음보살의 기도처로 유명한 한국의 절들은 다음과 같다. 양양 낙산사, 양양 휴휴암, 남해 보리암, 강화도 보문사, 여수 향일암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전국에는 수많은 관음사들이 있고, 대부분의 한국절에는 관세음보살이 별도의 전각에 모셔져 있다. 그만큼 친숙한 대상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불교적 의미는 어떤 어려움 어떤 소원도 한량없이 넓은 마음으로 받아준다고 하여 대자대비의 상징이다. 이와 같이 친숙한 관세음보살은 소승불교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인년(壬寅年) 검은호랑이 해를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한국인의 삶속에 함께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호랑이들을 선보이고 있다. 지금은 한반도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백수의 왕 무서운 호랑이이지만, 옛 선조들은 호랑이가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우리의 삶속에 함께해 왔다는 것을 그림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의 삶속에 나타난 호랑이는 실제의 모습 보다는 해학적으로 재미나게 표현한 게 많다. 실제는 무섭기 그지없는 호랑이를 어리숙하고 친숙한 모습으로 변형하여 마치 친구처럼 여기며 살아왔음을 느끼게 한다. 호랑이는 고양이과 동물 가운데 가장 큰 동물로, 그 길이가 1.8m 꼬리길이는 90cm 에 이르며, 걸을 때에는 뒷발이 앞발을 되밟는 습성이 있다. 호랑이는 뛰어오르는 힘이 좋아서 4m에 이르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때에는 10m도 뛰어내린다. 몸은 황갈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 털이 온 몸에 두른 모습으로, 그 수명은 15~20년을 살아간다. 호랑이의 임신기간은 비교적 짧은 100~110일 정도로 보통 2~4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겨울에 임신하여 봄에 새끼를 낳아서 기르며, 새끼의 크기는 고양이만 하지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리에는 요선정(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과, 그 옆에 무릉리마애여래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74호)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차츰차츰 낮아지는 산지이지만 평야지역까지는 매우 멀고 먼 굽은 산길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백두대간에서 가까운 동쪽지역은 첩첩산중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많다. 첩첩산중, 사람이 살것 같지 않고 신선들이 살것 같은 곳인지라 마애불이 있는 이곳은 예부터 무릉도원으로 불려왔고 근래 이곳은 아예 행정구역명을 무릉도원면(2016.11.14, 수주면'水周面'에서 무릉도원면으로 변경) 으로 바꾸었다. 마애불이 있는 곳은 영월의 천년고찰 법흥사에서 가까운 곳이다. 1400여년 전부터 불국토를 이루고자 평생을 바쳐온 자장율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법흥사는 한국 불교의 계율의 수행정신과 부처님 진신사리를 간직한 성지로 이름 나있는 절이다. 마애불은 강가 언덕 위에 크고 평탄한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자연석이 마치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올라 앉아 있는데 여기에 마애미륵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의 형상은 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가보물 제87호와 제84호로 지정된 강릉시 범일로 신복사터 삼층석탑과 석조공양보살좌상이다. 강릉 신복사는 고려시대 신복사 절터다. 신복사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불교관련 문헌에는 전혀 기록이 없어, 창건역사 및 폐사에 대하여는 그 내력을 알수가 없다. 다만 1933년 발간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따르면 신라 문성왕 때 명주 사굴산문을 개창한 범일국사(810~889)가 굴산사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신라시대 후기에는 선종이 유행하였는데, 이때 신라땅에는 9개의 선종가문이 있었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당시 구산선문을 열었던 절 중에 하나가 바로 이곳 강릉 굴산사에 본거지를 두어 굴산산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개창한 스님은 범일국사였다. 불교사를 돌아보면 경전위주로 성장하던 시대를 교종불교라하며, 이때는 화엄경을 위주로 공부하고 수행하였다. 한편 선종은 방대한 경전보다는 마음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종파인데, 이때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 주로 선수행을 위주로 하였다. 따라서 선수행을 위주로 한 종파라 하여 선종이라고 한다. 신복사는 1936년 일제강점기에 절터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편에 쓰여진 글자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에 있는 보물 2107호로 지정된 건물 이지당(二止堂)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1544∼159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당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성공하여 육지에서 첫 승리를 이룩한 의병장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이지당(二止堂)은 처음에는 각신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이라고 하였다. 그 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의 끝자인 지(止)를 따서 ‘이지당’이라 서당의 이름을 고치고 현판을 써서 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광무 5년(1901)에 옥천의 금씨·이씨·조씨·안씨 네 문중에서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집은 뒤로는 낮은 구릉이 뒤를 받쳐주고 있으며, 건물은 바위를 펑퍼짐하게 다듬은 곳에 세운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앞으로는 금강상류인 서화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서화천 건너편에는 기름진 논밭이 있어, 배산임수로 전형적인 풍수의 명당터에 지어진 서당이다. 이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의 남쪽, 전북의 북쪽을 나누는 산으로 대둔산이 있다. 오랫동안 금산은 전라도였으나, 1970년 초 대둔산의 북쪽에 있으며 충남의 중심인 대전과 가깝다고 하여, 충청도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이렇게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지역인 대둔산의 북쪽에 금산의 오래된 고찰로 태고사가 있다. 태고사의 창건은 신라의 삼국통일기 민중들의 삶을 보듬고, 당시 주류를 이루던 화엄사상에 의한 불교학을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스스로 신라땅에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태고사의 창건에 대하여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효는 이곳을 발견하고 기쁜 나머지 3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창건이 맞다면 태고사는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나, 현재의 건물과 불상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그런데 절의 이름이 원효사가 아니고 태고사인 이유는 고려말 선승으로 한국불교계를 이끌던 태고 보우국사의 호에서 연유한다. 태고 보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하여 태고사가 되었는데, 태고사 역사에 따르면, 많은 이적을 보인 진묵대사가 머물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조선 후기에는 효종때 유학자로 유명한 우암 송시열도 이곳에 올라 '석문'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한계령 대관령의 서쪽은 매서운 겨울바람으로 꽁꽁 얼었으나, 동쪽은 동해안 바닷바람에 그리 추운줄도 몰랐다. 그런 가운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눈이 내린다는 소식에 눈에 흠뻑 젖어든 양양 낙산사를 담고자, 새벽 버스를 타고 양양으로 달려갔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동해안에 많은 눈이 내린다 하여 출발은 하였으나, 홍천을 지나고 인제를 지나서 한계령에 이르기 까지 눈쌓인 모습은 별로 없어서 과연 양양에는 눈이 왔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한계령 고갯마루에 이르고 보니, 약간의 눈이 보였다. 그러나, 그뿐으로 고갯마루에서 쌓인눈 때문에 버스가 달릴수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였으며, 오히려 양양에 눈이 이정도 뿐이라면 낙산사의 풍경도 별로 볼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계령을 내려와 양양읍내로 들어서니 온통 하얀세상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새벽잠을 설치고 달려온 것이 몇번째였으나, 이번에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동해안 눈소식이었다. 낙산사 앞에서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길가에도 온통 눈이 쌓여서 자동차길만 겨우 다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곳곳마다 많은 해돋이 절경들이 있지만, 바닷가가 아닌 육지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는 명소는 손꼽을 정도다. 육지에서 볼 수 있는 일출명소로는 양평 두물머리, 서산 간월암, 태안 안면암, 창녕 우포늪, 임실 옥정호 그리고 옥천 용암사 등이 있다. 다른 명소들은 낮은 평지에서 볼 수 있는데 옥천 용암사는 해발 654m 장령산 봉우리에서 동쪽에 펼쳐진 옥천의 구릉지와 야산들이 안개에 휩싸이는 풍광에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는 것이 일품인 명소로, 미국의 CNN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아름다운 경관 50장면의 하나로 소개될 만큼 평가받은 명소다. 그러나, 오늘 용암사 사진은 일출이 아니라서 유감이다. 일출 시각을 맞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옥천에도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렸다. 옥천 용암사는 충청북도 산간지역인 장령산에 깊이 자리한 사찰로, 절이 산의 8부능선 위에 있는 까닭에 걸어서 오르기는 쉽지 않다. 산길이 포장도로로 잘 닦인 상태에서도 굽이굽이 산길을 꺾어 돌아 귀가 멍멍함을 느끼며, 약 2.0km정도를 올라 용암사 앞에 오르면, 2층으로 만들어진 축대 위에 10여대 주차공간이 나타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사진 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