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전시(戰時) 상황에서 물자 특히 무기 생산에 필요한 금속자원이 부족하여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민관이 소유하고 있던 금속류의 회수가 시작되었습니다. 1941(소화16)년 8월 30일 공포하여 같은 해 9월 1일 시행된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한 ‘금속회수령’이 그것입니다. 금속회수는 관공서, 직장, 가정을 불문하고 어린이들의 완구를 포함한 모든 금속류를 회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이치현(愛知縣)에 있는 “이누야마고등학교(犬山高等學校)의 역사”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금속류 곧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전쟁 물자로 쓰기에 바쁘다 보니 이누아먀고등학교는 철제 교문까지 뜯겨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때 상황은 듣기 좋은 말로 ‘금속류 회수’이지 이건 숫제 공출을 넘어 ‘갈취’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에 일본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부인들은 “목숨을 다 바쳐 나라를 위해 몸에 지닌 것을 모두 내놓자”는 구호로 제국주의 정부의 ‘금속류 회수’ 작업에 동참했다. 1943년(소화18) 4월에는 ‘비상회수’ 조치가 내려졌고 11월에는 ‘강제회수’로 까지 진전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강제 회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이 한가위에는 여러 가지 세시풍속이 전해 오는데 그 세시풍속 가운데 민속놀이는 강강술래, 줄다리기, 가마싸움, 소놀이, 거북놀이, 밭고랑기기, 원놀이, 올게심니, 소싸움, 닭싸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밭고랑기기”는 전남 진도에서 전해지는 것인데 한가위 전날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대로 밭고랑을 깁니다. 이렇게 하면 그 아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고 믿었습니다. 더 재미난 것은 “거북놀이”입니다. 거북놀이는 수수 잎을 따 거북이 등판 마냥 엮어 이것을 등에 메고, 엉금엉금 기어 거북이 흉내를 내는 놀이지요. 이 거북이를 앞세우고 “동해 용왕의 아드님 거북이 행차시오!”라고 소리치며, 풍물패와 함께 집집이 방문하는데, 대문에서 문굿으로 시작하여 마당, 조왕(부엌), 장독대, 곳간, 마굿간, 뒷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들보 밑에서 성주풀이를 합니다. 이때 조왕에 가면 “빈 솥에다 맹물 붓고 불만 때도 밥이 가득, 밥이 가득!” 마구간에 가면 “새끼를 낳으면 열에 열 마리가 쑥쑥 빠지네!” 하면서 비나리(걸립패가 마당굿에서 잘 되기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속풀이에서는 9월 8일 장충체육관에서 있었던 황용주 명인의 예악생활 60주년 기념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평생 선소리 산타령을 부르면서 살아온 황용주(黃龍周) 명인이 인생 80을 맞아 제자들과 더불어 장충체육관 특설무대에서 산타령 외 경기소리 전 분야를 공연하면서 핫 에이지(Hot Age)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는 이야기, 여럿이 대형을 갖추며 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자진산타령 등을 연이어 부르는 입창(立唱)형식의 산타령은 답교(踏橋)놀이의 단골 메뉴였다는 이야기, 그 대표적인 예가 ‘살고지다리’의 정월 대보름 축제라는 이야기,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화의 물결은 전문 선소리패들의 연창(演唱)을 단절시켜 유명 소리패들의 공연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행이 1960대 후반, 《산타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그 명맥이 오늘에 이어졌다는 이야기, 그러나 산타령의 전문가는 확산되지 못하고 있어서 자생력이 약한 종목으로 남아 있으므로 전승을 위한 특별배려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이야기, 관리 감독하는 문화재청도 비인기 종목에 대한 특별 육성책을 강구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열다섯째로 흰 이슬이 내린다 하는 백로(白露)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때만 되면 편지 앞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옵시고”라는 인사를 꼭 넣었습니다. 그것은 포도가 제철인 때 곧 백로부터 추분까지의 절기에 어른에게 안녕하신지 묻는 것입니다. 포도는 예부터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생각해서 맨 처음 따는 포도는 사당에 고사를 지낸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통째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포도를 먹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들었지요. 또 이때쯤 되면 ‘포도지정(葡萄之精)’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포도를 먹일 때 한 알 한 알 입에 넣고 씨와 껍질을 발라낸 뒤 아이의 입에 넣어주던 정을 일컫습니다. 누구나 어렸을 땐 어머니의 지극 정성한 공으로 자라건만 다 자라면 저 홀로 자란 듯 부모의 은공을 잊고 때론 부모를 죽이기까지 하는 세상이어서 참으로 씁쓸합니다. 백로 때는 밤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집니다. 원래 이때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데 더없이 좋은 때입니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쬐는 하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태풍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해마다 여름이면 초비상이다. 글쓴이가 8월 20일 무렵 일본에 가 있을 때도 태풍 제9호와 10호의 상륙으로 일본열도가 긴장을 늦추지 않더니 9월 6일 기상청 일기예보에는 어느새 발달한 제13호 태풍이 오키나와 남쪽 나하시(那覇市) 180km 부근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보도다. “태풍 제13호는 6일 18시 북동쪽으로 매시간 35km 진행하고 있으며 중심기압 1000hPa、중심부근의 최대 풍속은 20m/s이다. 이 태풍은 7일 18시에는 무로토미사키(室岬) 남쪽110km에 도달할 예정이니 태풍주변 해역 및 태풍의 진로로 예상되는 부근에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일기예보가 하루 종일 TV와 라디오, 신문 따위에서 반복해서 일본 국민에게 알려주고 있다. 같은 시각 한국의 일기예보는 태풍 이야기가 없다. 예부터 일본에서 “210일 날 큰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데 210일이란 새해 1월 1일부터 세어서 210일째 되는 날로 9월 1일이나 2일이 이에 해당하는 날이다. 약간 210일설은 벗어나지만 1954년 9월 26일은 일본 태풍 관측사상 가장 큰 태풍이 몰아쳐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흔히, 은퇴 후 30년의 시기를 핫 에이지(Hot Age)라고 한다. 열정을 갖고 일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보통 60살 안팎에 은퇴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30년 뒤인 90살 전후가 이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실제로 90, 또는 100살을 넘긴 노인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을 쓰고, 자기가 평소 하고 싶어 하던 일을 마음껏 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된다. 하기 좋은 말이 아니라, 70, 80살의 노인에게도 열정이 있다면 마음은 청춘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평생 선소리 산타령을 부르면서 살아온 황용주(黃龍周) 명인이 인생 80을 맞아 제자들과 더불어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 특설무대에서 오후 2시부터 기념공연을 갖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열정을 지니고 핫 에이지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어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사람이 외길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은 법인데, 그것도 10년이나 20~30년도 아니고 60년을《산타령》을 부르며 살아왔으니 그가 후학들로부터 존경과 축하를 듬뿍 받는다는 일이 얼마나 보람차고 자랑스러운 일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라에는 오래된 절들이 많다. 도다이지(東大寺), 다이안지(大安寺) , 호류지(法隆寺), 고후쿠지(興福寺)등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만큼 고찰들이 있다. 이러한 고찰이 메이지(明治)정부의 훼불로 수난을 받은 이야기는 익히 들어온 바와 같다.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의 훼불을 보는 듯 한데 안타까운 것은 절의 문화재가 한순간에 날아갈 뻔 한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때는 1871년(메이지4년) 11월의 일이다. 원래는 절과 신사가 한 경내에 나란히 있었지만 불교를 폐한다는 정책이 발표되고 곧 시행에 들어가자 천년고찰 고후쿠지(興福寺) 승려들은 승직을 박탈당하고 신사(神社)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고후쿠지(興福寺) 경내에 있던 오중탑의 운명이다. 승려들이 사라진 절 경내는 이내 황폐해지기 시작했는데 이곳에 있는 오중탑과 삼중탑 역시 임자를 찾아 판매에 부쳐졌다. 오중탑은 당시 돈으로 250엔, 삼중탑은 30엔에 미사브로(彌三郞)라는 사람이 사게 되었는데 미사브로는 이 탑을 불태워 없애고 그 대신 탑에 사용된 금붙이를 거둘 요량이었다. 그러나 주민의 반대로 무산되어 다행히도 아름다운 오중탑을 오늘날 보게 된 것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궁중의 나례(儺禮)의식, 곧 잡귀를 몰아내는 의식에 쓰였던 처용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처용무는 궁중정재의 하나로 신라 때 처용설화와 관계가 깊다는 이야기, 처음엔 한 사람이 검은 천으로 만든 사모, 흑포사모(黑布紗帽)를 쓰고 추다가, 후에 청(靑), 홍(紅), 황(黃), 흑(黑), 백(白) 등 오방(五方)의 화려한 옷을 입은 5명의 춤꾼이 추는 춤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주로 연산군 이후에는 잔치의 끝맺음을 하는 파연(罷宴)의 악무(樂舞)로 채택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순조 때의 《진찬의괘》나 《진작의괘》의 그림에는 5방의 원무 외에 4명의 협무(協舞)도 들어 있다는 이야기, 1800년대 이후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는 점차 처용무의 등장이 줄어들고 대신 새로 창작된 춘앵전이나 선유락, 무고, 검무 등이 많아졌다는 이야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원기로도에 포구락과 처용무가 함께 들어 있다는 점은 곧 이 그림이 1600~1800년대의 잔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처용설화나 처용가(處容歌)에 대한 국문학적인 연구는 정병욱의 문학으로 본 처용가」를 비롯하여 여럿 논문이 발표되어 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소학관에서 나온 《일본사세시기366일(日本史歲時記366日)》의 8월 24일 이야기를 보면 좀 섬뜩한 이야기가 나온다. 풍신수길 시대인 1594년 8월 24일 강도 두목인 이시카와고에몬(石川五右衛門)이 잡혀 그 가족과 함께 산채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 죽은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허구로 여겨졌으나 예수회 선교사인 페트로모레몬의 일기 속에 “이 일은 분로쿠 3년 여름일이다. 기름에 튀겨진 인물은 다름 아닌 이시카와고에몬과 그 가족 9명이었다.”라는 기록이 나와 실제 사건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기록한 또 한사람은 에도초기의 학자인 하야시라잔(林羅山)이다. 하야시라잔이 편찬한 《풍신수길보(豊臣秀吉譜)》에 따르면 “분로쿠 시절 이시카와고에몬이라는 도적이 강도 등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로 풍신수길이 체포하게 하여 어머니 이하 28명의 관련된 사람들을 산죠가와라에서 삶아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후 날강도 이시카와고에몬은 의적(義賊)으로 변신, 가부키(歌舞伎)등에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뜨거운 가마솥에 빠트려 죽었다고도 하고 펄펄 끊는 기름에 튀겨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넷째인 “처서(處暑)”입니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만큼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 잡는 때입니다. “處暑”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 되지요. 하지만 아직 찌는 듯한 더위는 처서를 무색하게 합니다. 처서 무렵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고 하는데 모기 입이 삐뚤어지기는커녕 아직 매미만 신이 난 듯합니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 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ㆍ낭군의 애(창자) 끊으려 가져가네.’라고 말한다.” 남도지방에서 처서와 관련해서 전해 오는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처서 때의 세시풍속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포쇄(曝曬)라고 해서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