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영조 때 그림 《이원기로회계도》에 보이는 춤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 그림에는 2가지의 춤, 곧 포구락ㆍ처용무의 궁중무용과 함께 3종의 연주형태가 보이는데, 하나는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 둘은 현악기 연주자의 모습, 세 번째는 박(拍)을 들고 서 있는 집박 악사의 모습이란 점이다. 집박(執拍)이란 박을 잡고 있다는 의미로 지휘자를 뜻한다는 점, 포구락(抛毬樂)은 고려 문종 때 송에서 들여온 춤이어서 당악정재로 구분된다는 점, 향당정재의 구별은 죽간자의 유무와 한문으로 된 구호나 치어를 노래한다는 점도 이야기 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포구락은 무려 150여명이 추었다고 전하는데, 당시 고려 교방에 속해있던 초영(楚英) 등이 구장기별기와 함께 임금 앞에서 연희하였으며, 무희는 12명 짝수로 좌우 6명씩 두 대(隊)로 나누어 추었다는 점, 고려시대의 포구락에 관한 기록에는 반주 음악이 절화 영(折花令),수룡음영(水龍吟令), 소포구락 영 청평악 영(淸平樂令) 등이었다는 점, 포구락은 현재까지도 자주 무대에 오르는 거의 유일한 전통무용으로 무희들이 좌우로 편을 갈라 공놀이를 하는 춤이란 점들을 이야기 등을 하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당신은 큰 지진을 대비해서 (건물의 내진설계, 비상식품 준비 등) 얼만큼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야후제팬에서는 5월 18일부터 28일까지 지진대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 57,999명 가운데 4.3%인 2,518명만 충분히 하고 있다고 답 했을 뿐 필요성을 느끼지만 준비는 하고 있지 않다(45%), 다소 준비를 하고 있지만 충분치 않다(47%)를 합하면 무려 92%에 이른다. 지진과 화산이 빈번한 일본에서 뜻밖에 지진 대비를 철저히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긴 건물의 내진 설계야 건축가들이 해야 하는 것이라 일반 시민이 철저히 내진 설계를 하고 있다로 답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식료품 준비라는 것도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지진을 위해 구비해 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기는 한다. 하지만 한국보다 지진이 많은 일본임에 견주어 지진대비 자세가 약간 느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 야후재팬의 지진대비 설문조사 도표, 충분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람은 4.3%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설문을 한국에 적용한다면 거의 무방비 상태일 지도 모른다. 과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1730년, 조선조 영조 때 그린 《이원기로회계도》라는 그림에 보이는 궁중의 춤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 그림은 나이 많은 원로들의 모임 장면으로, 각각 독상을 받아놓고, 춤과 음악을 감상한다는 점, 춤의 형태는 포구락(抛毬樂)과 처용무(處容舞)이며 음악연주형태는 삼현육각(三絃六角)과 집박, 가야금과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 연주자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궁중의 춤은 정재(呈才)라고 부르는데, 재예를 바친다는 넓은 의미였으나, 점차 궁중의 춤으로 정착되었으며 당악(唐樂)정재와 향악(鄕樂)정재로 구분되고 있다는 점, 전자는 고려시대 중국에서 들어온 춤을 가리키는 말이고, 후자는 이전부터 전래되고 있는 우리의 고유한 춤을 지칭하는 이름이란 점, 양자의 차이나 특징의 기준은 모호해 졌으나 죽간자(竹竿子)의 유무와 춤을 추는 중간에 무희들이 직접 한문구호(口號)나 치어(致語,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말)를 부르면 당악정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말했다. 한반도에 당악이 유입되었다는 사실은 문헌이나 절의 탑, 석비, 종(鍾) 그림 속에서 발견되며 당악이 들어오면서 이전의 음악을 향악이라 부르는 향당(鄕唐
[우리문화신문=성제훈 기자] 지난 토요일 안타까운 지하철 사고가 있었습니다. 구의역에서 안전문을 고치던 분이 전동차에 치여 돌아가셨네요.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 대책을 마련했다는 데도 또 이런 사고가 나네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안전문은 지하철이나 경전철 승강장 위에 선로와 분리되는 고정 벽과 문을 달아 지하철 출입문과 함께 열고 닫히도록 하는 문입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지하철 선로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자 만든 겁니다. 예전에는 그 문을 '스크린 도어'라고 했는데, 2012년 9월 4일 한글문화연대 우리말 가꿈이 친구들이 '서울시 공공언어 시민돌봄이 한마당'에서 서울시장에게 '안전문'이라는 우리말로 바꿔달라는 건의를 해서 바뀌게 되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007650 ▲ 서울시가 2013년 10월 '스크린도어' 대신 '안전문'으로 한다고 발표했지만 아직도 일부는 '스크린도어'다. 지금 서울도시철도회사는 안전문이라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무더운 여름에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있지만 부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더위 쫓는 도구이다.일본의 부채에는 센스(扇子)와 우치와(團扇)의 두 종류가 있는데 형태상으로 보면 센스는 쥘부채 모습이고 우치와는 접이식이 아닌 둥근부채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런 모양새의 차이도 있지만 그 쓰임새에도 과거에 보면 구별이 있었다. 보통 우치와(團扇)는 승려나 문인, 은둔자들이 썼고 센스(扇子)는 귀족이나 고급 관리들을 중심으로 썼다. 센스가 의례용(儀禮用)으로 쓰였다면 우치와는 신분 구별이 없이 쓰던 부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요즈음 사람들은 거의 구분 없이 쓴다. 아무래도 센스(쥘부채)의 경우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부채라고 할 수 있다. 접이식이라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아 핸드백에 넣어 다니기도 편하고 비단이나 헝겊으로 멋을 부린 고급 부채도 제법 많이 나와 있어 여성들에게 선물용으로도 인기 만점이다. 관광객들도 센스(쥘부채)를 좋아해서인지 교토의 청수사(기요미즈데라) 앞 기념품 거리 등 관광지에는 거의 센스(쥘부채)만 눈에 띌 정도이다. ▲ 우치와(왼쪽), 센스(쥘부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백영춘의 절규,하늘이 내 눈은 가져가도 소리는 못 가져가요.라는 제목의 글, 즉 그가 지켜오고 있는 재담소리의 열정을 이야기 하였다. 장대장타령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흥청망청 즐기다가 몽땅 날려 버린 장대장이란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무당(巫堂)이었던 그의 아내와 점쟁이 허봉사의 이야기가 익살스럽다는 이야기, 일제강점기 때는 박춘재였으나 지금은 백영춘의 전매특허처럼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그러나 백영춘은 당뇨의 합병증으로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고, 수술을 한다면 약간의 시력 회복이 가능하나 6개월간은 일체의 소리나 공연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 후, 신부전증으로 주 3회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극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진짜 봉사가 그 역을 맡아서 해야 하는 법이라며 자신이 잃어가고 있는 시력을 크게 개의치 않고 있다는 이야기, 여류명창 최영숙이 백영춘을 모시기로 마음먹고 선생님의 눈이 되고 사지가 되어 평생토록 그분을 보필하며 살겠다는 결심 아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 어느 때이고 일어나면 그 때가 아침이고 그때부터 소리를 하게 되는데 그에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구니 법명(法明)은 백제 사람이다. 제명왕(齊明天皇) 2년(656)에 대신 가마타리(鎌子)가 병을 앓았는데 온갖 처방에도 낫지 않았다. 이에 법명이 아뢰길, 유마힐경은 아주 좋은 경전이니 이를 독송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자 왕이 허락하여 독송하였는데 채 독송이 끝나기도 전에 병이 나았다. 왕과 신하들이 아주 기뻐하였다. 찬하여 이르길, 중국에는 도형이라는 비구니가 있어서 유마경을 강설하면 듣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고 한다. 법명이 한 번 더 독송하자 다 읽기도 전에 고질병이 다 나았으니 그 효험이 어찌 도형보다 못하겠는가? 그로부터 담해공(淡海公)은 흥복사에서 유마회를 열었고 백제 비구니의 발자취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는 14세기 일본의 불교책인 《원형석서(元亨釋書)》에 나오는 백제 비구니 법명의 이야기다. 법명은 조정의 권력자인 가마타리의 병을 유마경으로 씻은 듯이 낫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백제의 법명에 버금가는 비구니가 있는데 그 이름은 이원(理願)이다. 이원은 714년 11월 11일 김원정(金元靜)등의 신라 사신 20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佛法)을 널리 전하다가 귀국하지 않은 채 일본에
[우리문화신문=서한범 교수] 지난주는 장대장타령을 복원, 재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던 것으로는 박춘재의 음반, 원로들의 증언이나 고증, 실기인들의 시범창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난주 이야기는 재담소리극 공연에서 허 봉사역을 맡은 백영춘의 소리나 춤, 연기력에 일반 청중들은 감탄했다는 이야기,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창극(唱劇)은 100여년 되지만, 재담소리나 배뱅이굿 등은 극(劇)과의 협업을 이루지 못하다가 1990년대 말에 시작되어 그 세가 너무도 미미한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백영춘은 장대장타령의 재현에 심혈을 쏟으면서 재담과 어우러진 연희극의 일종인 발탈을 배웠고 그 이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서울 재담소리의 전승을 위해 《서울재담소리보존회》를 만들고 경서도 창악회내에광무대라는 소공연장을 개장한 뒤, 강습회와 공연을 지속해 왔다는 이야기, 백영춘의 소리가 물먹은 소리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건강의 적신호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백영춘 명인 하늘이 눈은 가져가도 소리는 못 가져 가 서울의 옛 재담소리, 장대장타령은 그 줄거리가 부모의 재산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가모신사유래기》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 아오이마츠리, 7월17일 기온마츠리, 10월 22일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초록이 눈부신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葵祭)는 고대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하타씨 일족과 관계가 깊은 가모씨(賀茂氏)와 조정(朝廷)의 행사로 당시 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주류는 귀족들이라 귀족 마츠리라고도 불렸으며 한편으로는 가모신사의 마츠리라해서 가모마츠리(賀茂祭)로도 불렀다. 《가모신사유래기》에 기록된 아오이마츠리 유래를 보면 6세기 무렵 긴메이왕 시절에 일본 전역에 풍수해가 심각하여 점쟁이에게 점을 쳐보니 가모대신(賀茂大神)이 노한 것으로 나왔다. 점괘가 나오면 해결 방법도 나오는 법으로 점쟁이인 우라베(卜部伊吉若日子)의 해결 방법은 튼실한 말을 골라 방울을 잔뜩 달고 기수는 얼굴에 동물 가면을 쓰고 가모신사 주변을 돌면서 성대한 제사(마츠리)의식을 행하면 풍수해를 잠재울 수 있다고 해서 시작되었다. ▲ 교토 아오이마츠리의 이모저모 일본의 마츠리는 대부분이 고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풍수재해 예방, 전염병 확산 금지, 국태민안, 풍년 등의 기원을 담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정득만으로부터 백영춘이 재담소리와 인연을 맺게 되는 이야기를 하였다. 정득만은 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창배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여 50년대에는 청구고전성악학원의 소리선생으로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80년대 초반 벽파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경서도 소리의 중흥을 위해 함께 애쓴 명창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숨이 길고 청이 높아 사설지름시조, 긴잡가를 잘 불렀는데, 특히 조르는 목이 일품이었다는 점을 얘기했다. 그런 그에겐 또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었는데, 바로 1920년대 재담으로 유명했던 박춘재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익혀두었던 장대장타령과 같은 재담소리도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 그래서 백영춘에게 재담소리를 권했고 백영춘은 이를 받아드렸는데, 집중적으로 배웠다고 하는 부분은 앞부분인 만포첨사 대목과 이를테야 대목이었다는 점을 말했다. 또 재담소리의 음조직이나 표현법은 서울 경기지방의 토리(음조)로 불러왔다는 점, 맥이 끊긴 소리를 다시 재현하기 위해 재담과 관련된 옛 기록이나 고음반, 재담에 관한 증언, 원로 소리꾼들의 녹음작업 등을 통해 복원을 시도했고, 이를 1999년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공개적으로 올렸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