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26) 나는 몇 달을 더 못 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조국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히지 않을 뿐이다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백정기 열사의 무덤 비문에 적힌 이 시는,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옛 무덤’이라고 하면 흔히 망자가 묻혀 있는 정적인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무덤 하나하나마다 이처럼 심금을 울리는 사연이 배어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고 했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청동말굽이 쓴 책, 《옛 무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국사》는 그런 의미에서 더욱 특별하다. 책에 소개된 옛 무덤들은 그 자체로 죽은 이를 대변한다. 몇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책은 크게 ‘나라를 세운 왕들의 무덤’, ‘위기 앞에서 용기를 보여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안재성 작가가 쓴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왜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일까요? 박열은 동경 유학 중 기존의 독립운동에서 더 나아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서 일왕 체제를 부정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1923년 9월 5일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0월까지 22년 동안 긴긴 옥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왕을 암살하려고 폭탄을 구입하려는 등 일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온한 투사였기에 작가는 박열에게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알고 봤더니 박열 혁명가는 제 고등학교 대선배님이시네요. 고교 시절 박열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일본 군대를 환송하는 정류장에서 ‘일본 만세(萬歲)!’라고 외쳐야 할 것을, ‘일본 망세(亡歲)’라고 외치며 스스로 위로했다고 하네요. 1919년 10월 무렵 동경으로 유학을 온 박열은 흑도회를 창립합니다.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정색을 넣어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하네요. 흑도회의 강령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정된 주의가 없다. 인간은 일정한 틀에 박혀버리면 타락하고 멸망하기 마련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무엇이라 하던 크로포트킨이 무엇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10) 먼 길을 걷고 돌아와 천천히 매일 서귀포를 걷는다. 길을 내고 걷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길 위의 모래 한 알, 길섶에 사는 풀잎처럼, 풀꽃처럼 소소한 그 길이 소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제주 ‘올레길’. 전국에 올레 열풍을 불러온 ‘제주올레’의 창시자 서명숙이 지은 이 책, 《서귀포를 아시나요》는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그녀의 추억을 가득 담고 있다. ‘올레’는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좁은 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그녀가 구석구석 길을 닦고 빛을 내기 시작하며 전 세계에 알려졌다. 늘 거기에 있었던 ‘올레’,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것은 그녀만의 독특한 감성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 무심히 보던 현무암조차 수십 년이 흐르고 보니 너무나 멋진 ‘신의 붓질’로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현무암의 빛깔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이러한 경탄에 깊이 공감했다. (p.37) 제주에 살면 살수록 제주의 풍경을 완성하는 마지막 신의 붓질을 현무암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검은 현무암은 제주에 피고 지는 그 모든 꽃과 나무와 덩굴 식물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73-74)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법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배가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얕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 든든한 장계를 쓴 주인공은 잘 알려진 것처럼, 성웅 이순신이다. 그는 존폐 위기에 선 조선의 수군과 마지막 남은 12척의 배로 조선 바다를 지켜냈다. 역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은 나를 알고, 적을 알고, 때를 알았던 이순신의 승부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공로의 이면에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의 빛나는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뜻밖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규희가 쓴 이 책,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는 무척 소중하다. 책의 부제인 ‘이순신과 류성룡의 임진왜란 이야기’가 보여주듯, 이 책은 이순신을 있게 한 ‘동네 형’ 류성룡의 역할도 비중 있게 다뤘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 남산 아래 건청동에서 함께 뛰어놀며 자란 사이였다. 건청동은 오늘날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를 써서 ‘충무로’라 불리는 지역이다.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동네 형이자 인생 지도자였다. 이순신은 나이는 류성룡보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가을은 궁궐의 계절이다. 성큼 찾아온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궁을 걷다 보면, 문득 이 나무, 저 돌이 궁금해진다. 궁궐 안에 있는 기물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궁궐 덕후’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김서울이 쓴 책,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의 지은이는 ‘궁궐 덕후’다. 궁궐에 있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까지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아로새긴다. 스스로 ‘박물관을 좋아하는 유물 애호가’라 소개하는 만큼, ‘우리나라 대표 유물’이라 할 만한 궁궐 사랑도 만만치 않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지극히 주관적인 궁궐 취향 안내서’는 ‘궁에 스며드는’ 궁궐의 매력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제2장 ‘궁궐의 돌’ 편에서는 궁궐의 돌짐승과 월대, 돌다리 등을 다룬다. 제3장 ‘궁궐의 나무’에서는 궁궐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나무들과 꽃을 담았다. 가끔 궁궐에 가면 산림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창덕궁 같은 곳은 숲이 우거져 도시 속 녹취를 느끼고 싶을 때 딱 좋은 곳이다. 제4장 ‘궁궐의 물건’ 편은 왕실 사람들이 궁궐에서 썼던 다양한 물건을 다룬다. ‘왕실 실내장식’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열정과 집념의 여인, 이윤옥 교수님이 《동고동락 부부독립운동가 104쌍 이야기》를 펴냈습니다. 제가 열정과 집념의 여인이라고 하니까, 아부성 발언을 한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벌써 십수 년 동안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낸 것이 《서간도에 들꽃 피다》입니다. 그리고 꾸준히 작업을 계속하여 <서간도에 들꽃 피다>는 10권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서》, 《경기의 얼, 여성독립운동가 40인의 삶》, 《여성독립운동가 100분을 위한 헌시》를 냈고, 시화집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다》도 냈습니다. 이 정도면 제가 ‘열정과 집념의 여인’이라고 하여도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사실 전에는 ‘독립운동’하면 남성들을 먼저 떠올렸고, 실제 독립운동사도 남성들 위주도 되어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요. 이교수는 이에 여성독립운동가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역사학자도 아니면서 이 일에 뛰어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시대 공무원?! 지금보다 사회가 다원화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하지만 ‘나랏일’은 지금보다 더 거대하고 엄중한 일이었다. ‘관청’과 ‘관리’의 위상이 아주 높았고 나라의 많은 부분을 관청에서 관장했다. 그러면 조선시대 관청의 직제와 구성은 어떠했을까? 박영규가 쓴 책, 《조선시대에는 어떤 관청이 있었을까?》는 이런 궁금증을 한껏 풀어주는 책이다. 사극을 봐도 이런저런 관청과 벼슬의 이름이 나오지만, 따로 책을 읽지 않으면 이 부분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조선시대 관청의 세계’를 자유롭게 노닐며 익히게 해 주는 유익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1장, ‘조선의 중앙 관청’과 2장, ‘조선의 지방 관청’으로 나뉜다. 중앙관청 편에서는 의정부와 6조, 언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를 비롯해 세자궁의 관청, 조선의 학문 기관, 그 밖의 주요 관청, 소규모 중앙 관청 등을 소개한다. 2장에서는 도, 부, 목, 도호부, 군, 현 등 각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과 이방, 호방, 형방, 예방, 병방, 공방 등 지방 관아에서 일하던 아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국방을 관장하던 병조의 지방 관직인 병마절도사, 병마절제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위기에 강한 지도자. 흔히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떠올릴 때 위기에 책임 있게 대응하며, 강력한 문제해결력으로 난국을 타개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위기가 닥쳤을 때 지도자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엇갈리고 국민의 미래가 결정된다. 박은정이 쓴 책, 《병자호란, 위기에서 빛난 조선의 리더들》은 ‘병자호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온 1636년 조선, 조정에 있던 신하들 – 최명길,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이경석, 김상헌이 어떻게 국난에 대응했는지 살펴본다. 이들의 선택은 제각각이었다. 최명길은 화친 국서를 썼고, 김상헌은 이를 찢어버렸고, 홍익한과 윤집, 오달제는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다가 청나라 선양으로 압송당해 죽음을 맞았다. 이경석은 굴욕과 치욕을 삼키며 1,009자의 삼전도비문을 지었다. 이들의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착잡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신세를 진 명나라의 위세가 어마하던 시기, ‘오랑캐’라 여기던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청 황제를 찬양해야 하는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위정자의 일원으로 책임지고 수습해야 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도망간 사람도 많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낯선 공간이 내게 말을 거는 느낌. 공간은 낯설지만, 그 느낌은 퍽 익숙하다. 오영욱ㆍ하성란 등이 쓴 책, 《어떤 외출》은 작가, 건축가, 소설가, 정원 전문가 등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18인의 지은이가 마치 공간과 대화를 나누듯,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 좋아하는 공간을 소개하는 책이다. ‘하동 평사리 악양 들판’, ‘통도사 가는 길’, ‘잠실야구장’, ‘서귀포 대평박수 큰 홈통’, ‘양구 방산자기 박물관’ 등 한 번쯤 들어봤지만 잘 알지는 못했던, 한국의 매력적인 장소들이 서정적으로 펼쳐진다. 그 가운데 특히 마음을 끄는 장소는 ‘상실과 절망을 딛고 선 땅’이라는 부제가 붙은 강진 다산초당이다. 1801년 유배형에 처한 정약용은 강진 땅에서 18년간 머물렀다. 유배되었던 동안 숱한 저술을 남겼고 그 덕분에 우리는 주옥같은 지식을 만났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다산에게 고통을 잊는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p.162-163) ‘원지(遠地)’에 부처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형을 받을 때 들었던 한마디 말이다. 유배형을 받은 정약용 선생이 강진 땅을 밟은 해는 1801년이고 거기서 다산 선생은 18년간 머물렀다. …(줄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하늘 맑은 궁, 건청궁(乾淸宮)! 건청궁이 특별 개방됐다. 경복궁 깊숙한 안쪽, 고종과 명성황후가 생활하던 곳이자 우리나라에서 전기가 처음 설치된 건청궁이 다음 달 18일까지 특별히 공개된다.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이후 방치됐다. 그러다 1909년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리고 1939년 조선총독부미술관이 되었다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복원됐다. 박영규가 쓴 책, 《건청궁일기》는 1908년 12월 26일 낮 2시, 건청궁 해체 공사를 하던 중 건청궁 곤녕합에서 신무문 밖으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를 발견한 것으로 시작된다. 지하 통로에서 나온 유골 두 구는 신원을 알 수 없었지만, 두 구 가운데 한 구는 책을 품고 있었다. 조선 통감부 관원 이치로가 ‘날렵한 필치의 조선어를 더듬거리며’ 읽어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명성황후 일인칭 시점의 자전적 이야기가 펼쳐진다. 망국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민비’로 낮춰 불리기도 하지만, 지은이는 따뜻한 시각으로 명성황후를 새롭게 조명한다.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대를 이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왕비로 간택된 이야기,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권력 투쟁을 벌이며 ‘폭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