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리박 시조시인] 겨울비 가을은 언제 왔고 겨울은 언제 가나 빗발 털고 오는 결비 하늘은 멀기만 코 네 철은 빛깔 입히어 바꿔가는 앞뒬까 * 결비 : 겨울에 오는 비 * 멀기만 코 : 멀기만 하고 ▲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 김리박 : 대한민국 한글학회 일본 간사이지회 회장 재일본한국문인협회 회장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선정 한국어어문 지킴이 (황금상) 2006년 일본 히라가타시 교육위원회 조선어강좌 특별강사 일본용곡대학(龍谷大學) 한국어강좌 강사 일본관서대학(關西大學)비교지역문화강좌 강사 누리편지 ribak@hera.eonet.ne.jp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일본인은 인물은 부드러우나 능히 굳건하고, 굳건하지만 또한 오래 가지 않는다. 약하지만 능히 인내하며 인내 하지만 또한 떨치고 일어나지는 못한다. 총명하지만 지식이 편벽되고 민첩하고 예리하지만 기상이 국한되어 있다. 능히 겸손하지만 양보하지는 않으며 능히 베풀지만 사물을 포용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가까운 것을 기뻐하고 먼 것은 소홀하다. 고요한 곳을 즐기고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것을 싫어한다. 본업을 편안히 여기며 분수를 기쁘게 지킨다. 일정한 규율을 지키며 감히 한 치도 나아가거나 물러나지 않는다. 이는 조선후기 시인이자 저술가였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가 제11차 조선통신사(1763)로 참가했다가 지은 화국지(和國志) 인물 편에 나오는 글이다. 화국지는 18세기 조선 선비의 눈으로 일본의 지리와 역사, 학문과 생활문화, 제도와 한일관계 등을 저술한 백과사전이다. 당시 조선통신사로 함께 일본에 갔던 조엄(1719-1777)이 일본의 문화와 학술에 대하여 일본의 학술은 암흑이라 해도 좋으며, 일본의 문장은 소경이라 할 수 있다.고 평한데 견주면 원중거의 시각은 좀 더 세밀하고 폭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젊은 소리꾼 조정란이 평택에서 국악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몇몇 동인들과 함께 선대 음악인들이 이어준 전통음악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여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려는 의식 있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경하, 이현숙, 박미예, 정덕근 등과 함께움Art 의 창단공연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소규모 활동은 지방을 근거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 창단공연에는 소리꾼 오정혜의 사회로 길굿과 비나리, 승무와 단가, 신영희 명창의 판소리, 대금연주와 장고춤, 단막창극 등이 소개되었다는 이야기,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지역민들을 화합의 장으로 안내하게 되고, 애향심을 키우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는 이야기,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하여 마을축제로 발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격려의 뜻을 소개하였다. 이번 주에는 오는 11월 22일 경기도 국악당에서 12좌창 전곡을 발표하는 최근순 명창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최근순 명창은 10여 년 전, 서울의 국립극장에서 12좌창의 완창무대를 가진바 있다. 그런데 그 때보다는 성숙되고, 원숙해진 소리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까지 경기소리의 전설, 묵계월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잡가란 잡스런 노래가 아니라 한권 책속에 여러 종류의 노래들이 잡거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부터 묵계월의 최초 스승 주수봉이 묵계월의 소질을 보고 더 큰 선생인 최정식에게 보냈다는 이야기, 연습이 생활이고 생활이 곧 연습일 정도로 하루종일 소리만 하면서 지냈다는 이야기, 이문원에게 배운 송서를 유창, 박윤정 등 후진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어서 많은 공연과 전수교육으로 인해 경기민요의 활성화에 이바지했다는 이야기, 경기민요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되면서 안비취, 이은주와 함께 예능보유자에 올랐다는 이야기, 나이가 들어 스스로 명예보유자로 물러 앉았다는 이야기, 제자들에게 외양을 화려하게 가꾸기 보다는 발성이나 자세, 등 기본기에 충실하도록 가르쳤고, 특히 말을 하기 전에 항상 바를 正을 그린다음, 입을 열라는 충고를 했다는 이야기, UCLA 한국음악과가 폐과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0만원을 선뜻 쾌척했다는 미담 등을 소개하였다. 그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90평생 소릿길을 살아오면서 배고픈 설움과 소릿 광대의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천신만고에 아동들은 시험에 합격은 되었으나 오늘의 경제생활에서 이 거대한 돈이 어디에서 나와 안심하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것이냐? 첫 고개의 시험걱정은 넘어섰으나 둘째 고개의 크나큰 이 걱정이야말로 참으로 그들 빈한한 부형들의 가슴을 암담케 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서 학교 입학비 내용을 살펴보면 입학금, 수업료, 교복, 교과서, 학용품, 운동화, 란도셀, 기타 위는 한성일보 1950년 5월 19일자 기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 집 자식은 시험에 합격해도 곧바로 입학금 등 학비 마련이라는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어 부모들의 애를 태우게 했다. 여기서 재미난 품목은 란도셀이다. 란도셀(가방)은 당시 입학금에 속해 있던 품목이다. 그 만큼 귀했던 물건이기도 하다. 그런 란도셀이 지금 전 세계에서 인기라고 한다. 특히 유럽에서는 어른들이 란도셀을 패션으로 들고 메고 다닌다니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다. 일본의 시사통신이 11월 1일자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초등학생이 등장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해외에 보급됨에 따라 어린이용 란도셀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이야기다. 중국에서는 튼튼하고 단순한 디자인이 인기라고 한다.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이야기는 묵계월 명창이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자리를 스스로 명퇴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는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10여 년 전, 어느 날 필자에게 밤새 써 온 글을 열어 보이면서 교정을 부탁하였다는 이야기, 구구절절이 경기민요를 생각하는 내용, 앞으로의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기에 예능보유자 자리를 물러나겠다는 명퇴 청원서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방일영 국악상을 수상한 직후, 미국의 UCLA 민족음악대학 한국음악과가 폐과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의 나라에서 우리 한국의 음악을 심는 일에 동참 해야겠다는 생각에 2,000만원을 선뜻 한국음악과에 쾌척하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고마운 일이다. 남을 돕는다는 일이 내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다행한 것은 LA 현지의 교민들이 중심이 되어 모금운동을 펼치었고, 이에 따라 독지가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국내에서도 한국음악과에 대한 관심이나 후원이 이루어져 일단 급한 불은 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도저히 그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흑룡강성 평방 지역의 731부대는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전율이 느껴진다. 일본이 패전 뒤에 이 부대를 폭파하고 떠나기 전에는 교도소를 능가하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이곳의 모든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이곳은 철저히 외부 세계와 차단된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었다. 731부대에 들어선 139개의 건물에는 각종 세균실험을 할 수 있는 시설물들과 함께 이곳에 근무하는 일본군의관의 숙소와 군인가족 사택, 학교, 세탁소, 예배당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부대 안에 비행장까지 갖추고 중국내 세균전을 위한 생체실험이 이뤄진 곳이다. 현재 중국정부는 731부대를 복원하여 이곳에서 자행한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든 실험대상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으로 팔에 세균을 주입하는 밀랍인형을 비롯하여 잡아온 여성의 배를 가르는 모습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천인공로할 일이 벌어졌음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 중국 하얼빈 731부대유적지 전시관의 이시이시로 모형(왼쪽), 악명높은 생체실험의 대부 이시이시로의 731부대 시절 모습 그 가운데서 눈에 띄는 곳은 731부대에서 빼놓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 묵계월은 왜소(矮小)한 용모에 외양을 가꾸지 않아 목소리로만 만나던 사람들은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TV가 없던 시절 방송국 직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 난감해 하였다는 이야기, 민요를 부르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보낸 지난 날들의 보상으로 세종상을 비롯하여 국내의 큰 상을 받았고, 1974년에는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의 소리에는 강약과 명암의 대비가 분명하고, 힘을 바탕으로 하는 역동미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 다양한 창법이나 시김새를 동반하는 선율선에서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의 흐름이 남다르다는 점, 외양(外樣)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즉흥적인 표현을 강조하기보다는 사설의 정확한 발음이나 발성 등의 기본기를 강조하였다는 점, 이러한 음악적 태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리고 오뉴월 모닥불도 쬐다 물러서면 섭섭한 법인데, 평생 지켜갈 수 있는 예능보유자의 명예를 스스로 내려놓은 아름다운 선례를 남긴 이야기 등도 하였다. 그렇다. 90이 넘고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워도 가족을 비롯한 주위사람들의 만류로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때는 서기 758년, 일본 조정의 관리 오노노타모리(小野田守)는 발해대사로 임명되어 발해땅을 밟는다. 사신의 임무를 다 마친 뒤에는 발해사신 양승경(揚承慶)과 함께 귀국하는데 이 이야기는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보자(天平寶字) 2년 9월 18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758년이면 일본은 나라시대(奈良時代)의 중반기이며, 발해(渤海)는 698년에 건국하여 60년이 지날 무렵이다. 일본과 발해사신의 왕래는 발해가 일본을 34차례 방문하였고, 일본 역시 발해를 13차례 방문 할 만큼 교류가 컸다. 비행기로 다니는 지금도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 동경성을 가려면 쉽지 않은 데 당시 해상으로 왕래를 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매우 밀접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중국 흑룡강성 발해 유적지 예전에《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일본과 발해의 교류 이야기를 읽으면서 1천여 년 전의 역사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는데 지난 9월 말 흑룡강성에 있는 발해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나는 또 다시 발해의 건재를 실감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금들판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발해 동경성터는 그 넓이가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묵계월 선생이 대명창이면서도 항상 연습시간을 충실히 지켰고,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 목을 풀고 있어서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 자기의 주장이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넓은 마음씨나 그 겸손한 태도가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그는 1965년도부터 각종 기획 공연들을 통해 경서도 소리의 높은 예술성을 발휘해 왔으며 이러한 활동들이 쌓이고 쌓여 경서도 소리의 저변을 확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민요 전공자들이 생겨나면서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대도시의 문화원, 또는 사회단체, 초등학교를 비롯한 중, 고등학교에 국악강사가 파견되어 일선학교에서의 국악교육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묵계월의 제자들 가운데 임정란, 최근순, 유창 등은 경서도 소리극(京西道唱劇)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여 문화계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묵계월이 남기고 간 업적은 소리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공연, 소리극, 교육, 학문 등 각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자리를 잡게 되어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이요 문화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