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내 판꽂이엔 아직도 겨울비 내리는 밤이었지 취객들의 잡담과 웃음소리에 스피커는 금새 병약해져 그녀가 들어올 즈음엔 아예 앓는 소리가 났지 가게가 터져나갈 만큼 취기가 부풀어 올랐을 때였지 저 많은 엘피와 주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음향이 왜 이 모양이냐고 따지는 그녀 앞에 연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 입안의 새 하얀 차돌만은 침침한 조명 아래서도 반짝이고 있었지 턴테이블이 돌고 술잔이 돌고 노래도 바뀌고 술병도 바뀌고 다음에 비오는 날 올 테니 들려 달라며 그녀는 노래 한 곡을 신청하고는 또 하얀 차돌을 내보이며 밤안개에 스미었지 베르테르 신드롬을 재현 했다는 노래 니힐리즘 최고의 걸작이라는 노래 비 내리는 날이면 그 노래를 들으며 몇 장의 달력이 찢길 때까지 그녀를 기다렸지 우리의 그리움이 임계치에 이른 여름 어느 날 비등점을 넘은 물처럼 그녀는 내게 달려왔지 그 때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물들어 음악으로 셀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지 낙엽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가수의 노래와 불어로 시를 쓴다는 미국의 음유시인과 스물넷에 요절했다는 기타리스트, 존 슈만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목로(木壚)*에서 블루스 선율이 적막보다 무겁게 내려앉는 목로에서 아내에게 들려줄 음반을 고른다 손가락 끝에서 기타는 울고 덱스터 고든이 따르는 싱글몰트 한잔을 색소폰 그 농염의 숨소리로 마신다 나 일찍이 음악을 구법(求法)으로 여겨 때론 도반들과 밤새워 술병을 비우며 탐닉도 하고 텅 빈 음악실에서 헤드폰을 덮어 쓰고 마지막 한 음 까지 찾아내기도 하였으나 노을 비낀 산 아래선 탁발승처럼 늘 허기에 시달렸지 반생을 땡볕 내리쬐는 자갈밭을 헤매다 기적처럼 나와 닮은 아내를 만나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음악을 받아들이며 법(法)이 거기에 있음을 새삼 알았으니 우주의 한 귀퉁이 이 푸른 별은 가을밤에 잠기고 턴테이블은 돌고 *1 목로 : 선술집의 좁고 기다란 탁자 *2 덱스터 고든 : 재즈의 진정한 구도자로 알려진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 *3 싱글몰트 : 스카치위스키의 일종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십이령 구빗길 기러기들 남녘으로 떠나던 동짓날 밤 행여 장닭이 깰까하여 숨 죽여 님 앞에 앉았습니다 님의 얼굴을 산호 빛으로 물들이던 이 화롯불이 사글면 이제 기약 없는 이별입니다 첫 닭이 울기도 전에 시어머니의 헛기침 소리 들려옵니다 차곡차곡 접어둔 얘기첩은 펴보지도 못 한 채 시어머니 죽으면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 잿 속에 묻고 서둘러 싸리문을 나섰습니다 강물에선 얼음 째는 소리가 새벽하늘을 가르고 새파란 바람이 젖무덤을 찌릅니다 보따리 하나 품에 안고 바람보다 앞서 달렸습니다 해가 중천에 오르고 헤진 버선에 배롱 꽃이 피고서야 한 도부쟁이* 무리 앞에 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언 밥 한 덩이 얻어먹은 연으로 맏 도부쟁이 아낙이 되어 그동안 시름 서른 단을 묶었습니다 어느 까치 떼가 유난히 시끄럽던 날 님을 닮은 청년 하나가 탕약을 달이는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청년과 도부쟁이가 감나무 잎이 수북하도록 얘기를 털어낸 이튼 날 아침 씨받이가 낳았다는 님의 아들을 따라 십이령 마루에 오르니 도부쟁이 영감 깊은 숨소리 예까지 들립니다 *보부상의 낮춤말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봄날 아침 어제 밤 봄비가 내리더니 아침 마당에 꽃잎이 어지럽네 꽃이 피기는 어려워도 지기는 쉽다더니 . . . 그래도 먼산에 님이 있어 자꾸만 눈이 동쪽으로 가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설화일일백 무심거사 태기산에 눈꽃이 피었소 겨울 하늘 파아란 캔버스에 순백의 눈가루를 뿌려 조화옹(造化翁)이 나무를 그렸소 혼자 보기 아까워 자네에게 전화 하오 내일 와서 같이 눈꽃을 봅시다 남부터미널에서 버스 타면 두 시간이면 도착하오 속인(俗人)과의 약속은 미루면 되오 모레가 되기 전에 눈꽃은 사라질 것이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설화일일백(雪花一日白) 2017.2.24. 태기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