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고무공장 어린 여공 보듬은 "강주룡" 숨 쉬기도 거북한 고무탄내 자욱한 공장 안에서 폐부에 달라붙어 켜켜이 쌓여가는 죽음의 그림자 뒤로하고 힘겨운 작업량 채우며 하루하루 버티던 어린 소녀들 밥이나 제대로 먹게 해주라고 울부짖던 그대는 여공들의 자애로운 어머니. “유치(留置) 중인 강주룡, 단식 74시간, 을밀대 위에 올라갔던 여직공, 감임취소(減賃取消)해야 취식(取食)한다.” 이는 1931년 6월 2일 동아일보 2면에 큼지막하게 나온 강주룡 (姜周龍, 1901~1932.6.13) 애국지사의 기사 제목이다. 단식 74시간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거기다가 노동쟁의를 위해 평양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갔다는 말도 예사롭지 않은 말이다. 서른 한 살의 강주룡 애국지사는 어째서 단식 74시간에 들어갔던 것일까? 74시간이라면 만 3일하고도 2시간이나 되는 시간 동안 곡기를 끊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강주룡 애국지사의 단식 사건은 1931년 6월 2일치 기사 말고도 각 신문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강주룡 애국지사는 1931년 5월 평원 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왜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에 올라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편강렬(片康烈, 1892.2.28~1929.1.16) 선생의 집안은 경북 김천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며 할아버지 대에 황해도 연백으로 이주했다. 선생은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片相薰)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토왜복수(討倭復讐)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선생은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 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대진소(13道 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였다. 이때 선생은 중군장 허위(許蔿)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선생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다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은밀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일제가 날조한 사내(寺內)총독 암살 모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하철 종로3가역 7번 출구로 나오면 직선거리로 100m쯤 떨어져 종묘 담장 쪽으로 대각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아마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아니? 종로에 조계사 말고 또 대각사라는 절이 있었나?”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각사? 샤머니즘과 결합된 그저 그렇고 그런 절이겠지” 하시던가요. 그러나 대각사는 3ㆍ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었던 용성스님이 1911년 창건한 의미 있는 절입니다. 얼마 전에 이윤옥 시인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에 갔다가 근처 대각사에도 가보았습니다. 용성스님(1864~1940)은 16살 때인 1879년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에서 출가하였는데,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우리 겨레를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 구제이고, 그를 위해 불교 대중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하여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1911년 대각사를 창건합니다. 대각(大覺)이니까 큰 깨달음이란 말씀이네요. 용성스님으로서는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크나큰 사고의 전환,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3ㆍ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찬 선생님, 저는 아들만 둘 뒀습니다. 저는 아들이 16살이 되면 같이 서점에 가서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선물했습니다.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김산)이 중국어 사전 하나 끼고 광활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그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리랑이라는 책은 저에게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아리랑을 왜 미국의 한 ‘아주머니’가 썼어야 했는가에 의문 아닌 분노를 가졌습니다. 제가 님 웨일즈를 ‘아주머니’라는 표현을 했다고 어떤 교수님이 화를 내시더군요. 실제 님 웨일즈는 아리랑 말고, 습작 수준의 소설 정도를 남긴 무명 작가였을 뿐입니다. 제가 분노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도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구보 염상섭을 비롯한 많은 소설가와 작가들이 있었지만(물론 심훈의 상록수도 있지만) 아리랑과 같이 감동적인 글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선배의 역정적 삶의 기록을 외국인의 손에 맡겨야 했느냐는 안타까움입니다. 제가 기회가 되면 외국인이 쓴 아리랑보다 감동적인 일대기를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11년 전 저에게 그 기회가 왔습니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님과 같이 중국을 갔을 때입니다. 저는 경향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나중소 선생은 경기도 고양군(현재 서울 정릉)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副尉)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참모부장에 임명되어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선생은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으며,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여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였다. 1,3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 청산리대첩 후 선생은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
[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 기자] 여기일까 아님 저기였을까 츠보우치 연극관으로 가는 좁은 길목 나무 의자에 앉아 교정을 거닐었을 선배들을 그려본다 나라 잃은 몸으로 적국인 이 땅에서 고이 품은 꿈을 펼치려했던 이들 더러는 거목으로 우뚝 섰지만 더러는 춘원처럼 이름을 욕되게 했던 곳 무더워 매미도 울지 않고 바람 한 점 없는 한여름 니시와세다 교정엔 적막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와세다 교정에서 ‘이한꽃’- 한여름 무더위 속, 여름방학이라서 그런지 와세다대학 교정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23일(수) 오전 9시, 캠퍼스를 일찍 찾은 탓도 있지만 평소 같으면 학생들로 북적 거릴 교정은 텅 빈 채 청소하는 아저씨들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의 사립대학 가운데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은 과거 한국에서 조도전(早稲田)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초창기 '조도전(早稲田)' 은 낱말 그대로 벼농사를 짓던 논이 즐비하던 땅이다. 때는 1882년 (명치 15년), 일본의 근대화가 한창이던 이 시기에 일본은 서구의 대학을 시찰하고 곧바로 미래의 일본을 책임질 젊은이들을 교육 시킬 책무를 느끼고 대학 설립의 길로 들어선다. 와세다도 그런 이념으로 설립된 대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없는 주검들이 서러워질 뿐, 여기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서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 장준하 선생 선생님께서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하시기 4년 전에 직접 쓰신 《돌베개》에 부친 글귀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보고 부끄러워졌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광복 조국의 하늘 밑은 적반하장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고 민족의 정기를 훼손한 친일파와 반민족행위자는 처벌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사회의 특권계층이 되어 지난 수세기 동안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조국을 위해 피를 뿜고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였습니다. 역사의 책임을 져야하는 세력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하는 세력이 역사를 책임지고 있는 굴곡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기에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마음이 너무나도 무겁기만 합니다. 선생님께서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신지 벌써 40년이 넘었지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전남 보성군이 지역역사문화자원 선양사업의 하나로 71주년 광복절을 맞아 지난 18일 저녁 7시 30분 서울 강남구민회관 무대에 올린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창작 공연이 대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보성군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서울시와 자치단체 간 문화교류 사업에 선정되어 강남구민회관에서 이루어졌으며 극단 창작집단 상상두목 최치언 대표가 제작 연출을 맡았다. 보성군이 그동안 가려져 있던 안규홍 의병장을 재조명하는 기획공연으로 지난 4월 광주에 이어 서울에서도 의병정신선양회, 향우회원을 비롯해 강남문화재단 회원, 보훈단체, 유림, 국악원, 문중 등 각계각층에서 뜨거운 관심을 보이면서 5백여 석의 공연장이 관람객으로 가득 차면서 그 의미를 더했다. 안규홍은 1879년 보성에서 태어나 머슴 출신으로 유생들과 함께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을 이끌었던 의병장으로 1910년 6월 22일 대구형무소에서 일본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져 한을 남기고 순국했다. 보성군은 안규홍 의병장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지역의 우수한 역사문화자원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단 창작집단 상상두목과 함께 창작극으로 되살려 전국 대도시 순회공연을 하고 있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이는 65살의 이에 폭탄 의거로 순국의 길을 걸은 강우규 의사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남긴 말이다. 나라를 빼앗은 흉악한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것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것이지만 강우규 지사는 겸손하게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청년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그러한 강우규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실천 행동 뒤에는 탁명숙이라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런가하면 핏덩이 갓난아기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박치은 애국지사도 있다. 박치은 애국지사는 남편 곽치문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감옥에 들어갔는데 핏덩이 갓난아기를 둔 몸이었다. 철창 밖에서 젖이 먹고 싶어 우는 아기를 일제는 끝내 면회시켜주지 않아 눈앞에서 아기가 숨지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다. 2년의 형기를 마치고 남편보다 먼저 출소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12일(금) 오전 10시, 고양시 신원도서관(관장 장은옥)에서는 “온몸으로 나라를 구한 여성독립운동가”시화전 개막식이 있었다. 개막식이라고는 하지만 동네방네 떠나갈 듯한 개막식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모인 아주 조촐한 개막식이었다. 그러나 뜻 깊었던 자리였다. 이날 조촐한 개막식에는 신원도서관이 지난 7월 22일부터 8월12일까지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제침략시기 국난 극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 교육인 “아주 특별한 나라사랑 프로젝트”에 참여한 청소년들과 학부모가 주로 참석하였으며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장은옥 관장은 “고양시에서 처음으로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열게 되었다. 고양시에도 오정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지만 이 시화를 통해 처음 그 분을 알게 되어 부끄러운 마음이다. 이제 조촐하게나마 열린 이번 시화전이 고양시민 모두가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이어서 이번 시화전을 주관한 한국문화사랑협회(서울시 비영리단체 제1259호) 김영조 회장의 인사가 있었다. 그는 “그간 서울과 도쿄, 호주 등지에서 10여 차례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열었지만 고양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