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나중소 선생은 경기도 고양군(현재 서울 정릉)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副尉)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참모부장에 임명되어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선생은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으며,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여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였다. 1,3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 청산리대첩 후 선생은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
[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 기자] 여기일까 아님 저기였을까 츠보우치 연극관으로 가는 좁은 길목 나무 의자에 앉아 교정을 거닐었을 선배들을 그려본다 나라 잃은 몸으로 적국인 이 땅에서 고이 품은 꿈을 펼치려했던 이들 더러는 거목으로 우뚝 섰지만 더러는 춘원처럼 이름을 욕되게 했던 곳 무더워 매미도 울지 않고 바람 한 점 없는 한여름 니시와세다 교정엔 적막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와세다 교정에서 ‘이한꽃’- 한여름 무더위 속, 여름방학이라서 그런지 와세다대학 교정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23일(수) 오전 9시, 캠퍼스를 일찍 찾은 탓도 있지만 평소 같으면 학생들로 북적 거릴 교정은 텅 빈 채 청소하는 아저씨들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의 사립대학 가운데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은 과거 한국에서 조도전(早稲田)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초창기 '조도전(早稲田)' 은 낱말 그대로 벼농사를 짓던 논이 즐비하던 땅이다. 때는 1882년 (명치 15년), 일본의 근대화가 한창이던 이 시기에 일본은 서구의 대학을 시찰하고 곧바로 미래의 일본을 책임질 젊은이들을 교육 시킬 책무를 느끼고 대학 설립의 길로 들어선다. 와세다도 그런 이념으로 설립된 대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없는 주검들이 서러워질 뿐, 여기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서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 장준하 선생 선생님께서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하시기 4년 전에 직접 쓰신 《돌베개》에 부친 글귀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보고 부끄러워졌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광복 조국의 하늘 밑은 적반하장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고 민족의 정기를 훼손한 친일파와 반민족행위자는 처벌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사회의 특권계층이 되어 지난 수세기 동안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조국을 위해 피를 뿜고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였습니다. 역사의 책임을 져야하는 세력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하는 세력이 역사를 책임지고 있는 굴곡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기에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마음이 너무나도 무겁기만 합니다. 선생님께서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신지 벌써 40년이 넘었지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전남 보성군이 지역역사문화자원 선양사업의 하나로 71주년 광복절을 맞아 지난 18일 저녁 7시 30분 서울 강남구민회관 무대에 올린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창작 공연이 대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보성군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서울시와 자치단체 간 문화교류 사업에 선정되어 강남구민회관에서 이루어졌으며 극단 창작집단 상상두목 최치언 대표가 제작 연출을 맡았다. 보성군이 그동안 가려져 있던 안규홍 의병장을 재조명하는 기획공연으로 지난 4월 광주에 이어 서울에서도 의병정신선양회, 향우회원을 비롯해 강남문화재단 회원, 보훈단체, 유림, 국악원, 문중 등 각계각층에서 뜨거운 관심을 보이면서 5백여 석의 공연장이 관람객으로 가득 차면서 그 의미를 더했다. 안규홍은 1879년 보성에서 태어나 머슴 출신으로 유생들과 함께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을 이끌었던 의병장으로 1910년 6월 22일 대구형무소에서 일본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져 한을 남기고 순국했다. 보성군은 안규홍 의병장의 위대한 뜻을 기리고, 지역의 우수한 역사문화자원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단 창작집단 상상두목과 함께 창작극으로 되살려 전국 대도시 순회공연을 하고 있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이는 65살의 이에 폭탄 의거로 순국의 길을 걸은 강우규 의사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남긴 말이다. 나라를 빼앗은 흉악한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것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것이지만 강우규 지사는 겸손하게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청년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그러한 강우규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실천 행동 뒤에는 탁명숙이라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런가하면 핏덩이 갓난아기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박치은 애국지사도 있다. 박치은 애국지사는 남편 곽치문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감옥에 들어갔는데 핏덩이 갓난아기를 둔 몸이었다. 철창 밖에서 젖이 먹고 싶어 우는 아기를 일제는 끝내 면회시켜주지 않아 눈앞에서 아기가 숨지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다. 2년의 형기를 마치고 남편보다 먼저 출소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12일(금) 오전 10시, 고양시 신원도서관(관장 장은옥)에서는 “온몸으로 나라를 구한 여성독립운동가”시화전 개막식이 있었다. 개막식이라고는 하지만 동네방네 떠나갈 듯한 개막식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모인 아주 조촐한 개막식이었다. 그러나 뜻 깊었던 자리였다. 이날 조촐한 개막식에는 신원도서관이 지난 7월 22일부터 8월12일까지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제침략시기 국난 극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 교육인 “아주 특별한 나라사랑 프로젝트”에 참여한 청소년들과 학부모가 주로 참석하였으며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장은옥 관장은 “고양시에서 처음으로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열게 되었다. 고양시에도 오정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지만 이 시화를 통해 처음 그 분을 알게 되어 부끄러운 마음이다. 이제 조촐하게나마 열린 이번 시화전이 고양시민 모두가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이어서 이번 시화전을 주관한 한국문화사랑협회(서울시 비영리단체 제1259호) 김영조 회장의 인사가 있었다. 그는 “그간 서울과 도쿄, 호주 등지에서 10여 차례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열었지만 고양시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살아계셔서 편히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이 편지를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는 말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백범일지(白凡逸志)》 원문을 보니 한자를 읽을 수 있는데도 도무지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100년도 안 된 시간에 우리말 법이 이렇게 달라져 있는 것은 그만큼 소용돌이치는 역사 시기를 지나왔다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 이렇게 선생님을 부르는 자체도 송구스럽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대한민국의 최고의 어르신이요 제일의 독립지사를 소시민에 불과한 제가 감히 이렇게 부르는 것이 무례한 짓 같아서요. 지금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가장 존경하는 애국지사로 선생님을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생각하면 먼저 가슴이 아려오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에는 ‘만일’을 대입해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너무도 아쉬움이 크고 한탄스러워서요. 만일 선생님의 주장대로 당시 해방 공간에서 남북 지도자들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한 발씩 양보하고 조금만 더 깊이 숙고하고 의견을 모아 남북으로 하나의 정부를 만들어 내었더라면, 그 후 오늘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시냇물이 모여 큰 강물을 이루고, 티끌 모아 태산도 이룩한다하거든, 우리 민족이 저마다 죽기 한(恨)하고 마음에 소원하는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우리 조선은 세계 강대국들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문제가 해결되고 말 것이다” 이는 1919년 4월 5일 해주 만세 운동 때 쓰기위해 옥운경을 비롯한 해주 기생들이 직접 한글로 쓴 독립선언서 내용이다. "오늘 해주 기생(海州 妓生) 일동이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해중월, 벽도, 월희, 향희, 월선, 화용, 금희, 채주 등이 다른 남자들과 함께 체포되다." 이는 매일신보,每日申報 1919년 4월 5일치 기록이다. 이에 앞서 1919년 2월 말, 문응순(예명 月仙), 김성일(예명 月姬)은 고종의 인산(因山, 태상황, 황제, 황태자, 황태손과 그 비 들의 장례)을 보기 위해 상경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고종의 인산을 보고 해주로 돌아왔다. 해주의 만세운동은 3월 1일과 3월 9일에 이어 4월 5일에 크게 일어났는데 이날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기생들은 옥운경, 김해중월, 이벽
[우리문화신문=전수희기자] 노란봉 정기 받고 자란 몸/경성에 올라와 /푸른 꿈 펴렸더니 가지에 푸른 순 돋기도 전 /밑동 잘렸네 방직공장 다니면서/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부른/ 뜨거운 독립의 노래 일제에 잡혀 /모진 고문당하지 않았다면 /스물 둘 꽃다운 나이 접고 눈 감지 않았을 것을... 이는 이윤옥 시인의 노동자 권리 속에 숨겨 부른 독립의 노래 ‘고수복’ 시 가운데 일부이다. 그렇다. 나라를 잃고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선조들의 삶은 비린내 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신념하나로 청춘을 불사른 이들이 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그런 분들이다. 유달산 묏마루에 태극기 높이 꽂은 “김귀남”, 훈춘에 곱게 핀 무궁화꽃 ‘김숙경’, 혁명의 강물에 뛰어든 조선인 “김알렉산드라” 등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그대는 들어나 보았는가! 곧 다가올 광복 71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일호에서는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한 여성독립운동가 30인 시화전을 8월 10일부터 16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쫓아 시를 쓰고 있는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4, 5권에 나오는 30분의 시에 이무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홍주성 전투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전사한 채광묵 채규대 부자(父子) 의병을 2016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채광묵은 충남 홍주 매평리(현 충남 청양)에서 당시 문장가로 활약하던 채동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말 일제 하 홍주지역은 항일 민족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1896년 홍주의병은 김복한을 총수로 반개화, 반침략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홍주지역 유생들이 일으킨 반일투쟁이었다. 그러나 관찰사의 배반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채광묵은 상경하여 송수만 등과 도약소를 차리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을 복수할 것을 청하고 외부대신 이완용 등의 탄핵을 상소하였다. 1901년 8월에는 조정에서 내린 내부주사 직을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며 강하게 거절하였다. 1904년 일본인 나가모리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김기우 등과 함께 반대 통문을 작성하고 일본 공사를 만나 이를 질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채광묵은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전 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 경찰대를 물리쳤다. 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