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이 《그곳, 寺》라는 책을 냈습니다. 정 원장은 서울대 법대 헌법학 교수를 하다가 박근혜 정부 때 행정자치부 장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0대 국회의원을 하였으며, 이후 2021년부터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을 하고 있습니다. 정 원장은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헌법학을 현실 정치에도 구현하고 싶어 국회의원도 하였지만, 현실의 진흙탕 같은 정치 세계는 선비가 놀 수 있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20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는 진흙탕 물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온 것이지요. 제가 정 원장을 선비라고 하였지요? 단순히 대학교수를 하였다고 하여 옛날 선비에 빗대어 말한 것은 아닙니다. 정 원장은 정말 선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옛날 선비들은 시ㆍ서ㆍ화(詩ㆍ書ㆍ畵)에 능하지 않았습니까? 정 원장도 헌법학자이니 여러 권의 저서를 냈고,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동양화도 그립니다. 책에는 정원장의 서예 작품과 그림 몇 점도 들어가 있습니다. 정 원장은 몇 년 전에 봉은사에 백곡 처능대사의 비가 세워질 때도 비의 글씨를 썼지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정 원장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생각이 나는군요.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은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외세의 침략이 전혀 없었던 나라도 세월의 힘을 견디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갖은 침입에 식민지 시절까지 겪었던 경우라면 옛 유산을 잘 보전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실제로 많은 유산이 무관심 속에 잃어버리고, 도둑맞고, 팔려나갔다. 이렇게 우리가 잃어버린 유산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물론 문화유산의 나라 밖 반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법한 경로로 판매된 것이라면 엄연한 소유권 이전으로 그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 값어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이 너무나 많은 유산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때로는 난폭한 방식으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안민영이 쓴 이 책,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가 잃은 문화유산을 되찾아 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그리고 멋진 용기를 발휘해 돌려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빼앗긴 입장에서야 당연히 돌려주는 게 맞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반출 경로가 어찌 되었든 돌려주기로 하는 것은 큰 용기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에서는 한번 잃어버린 문화유산은 좀처럼 되찾기 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황희, 장영실, 김종서, 성삼문 … 세종시대에는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정말 인재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큼 인재도 많았고 업적도 많았다. 이는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잠재력이 충분한 인재들이 세종이라는 뛰어난 주군을 만나 이뤄낸 성과였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인재 가운데서도, 이예의 이름은 퍽 낯설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도 들어본 적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예는 왜구가 잡아간 조선인 포로를 찾아오고, 43년 동안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사절단인 통신사로 파견되어 양국의 평화로운 관계유지를 위해 활약한 외교관이었다. 이런 이예의 활약을 담은 최정희의 책, 《나는 조선의 외교관이다》는 세종시대 외교를 이끌었던 그의 집념과 노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세종은 언제나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예를 각별히 아끼고 신임했고, 한평생 외교에 헌신한 공로로 원래 작은 고을의 아전이었던 그는 종2품의 높은 벼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는 중인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던 시절, 그의 능력과 인품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보여준다. 한 해가 멀다 하고 험한 뱃길을 뚫고 일본을 드나들며 대일외교에 모든 걸
[우리문화신문=얼이동식 인문탐험가] 얼마 전 존경하던 스님 한 분을 여의었다. 이 세상에 없으니 여의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그 스님은, 많은 스님이 그렇듯이, 소탈하고 명랑하고 맑으시며, 해학도 있어 만나면 즐겁고 기쁘고 깨우침이 있었다. 고승이라고 무게 잡으시는 일도 없고 방장이 되신 다음엔 선방에는 큰 거울을 걸어놓아 스님들이 스스로 들여다보라고 했고, 젊은 스님들이랑 밭에서 울력하면서 농작물을 거두어 세상에 신세를 안 지고 사는 삶을 이끄는 모범도 보이셨다. 스님으로 사신 지가 꼭 50년이란다. 이런 분이 있기에 우리 절은 많은 분에게 안식과 평온. 삶의 고통에서의 해방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꼭 부처님이 계셔서만이 아니라 이런 분들의 삶을 통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길을 현실에서 배우는 것이리라. 영결식 뒤 다비장으로 가면서 영정 뒤를 따르는 수많은 만장은 그런 신도들의 존경심과, 이제 가까이서 더 만나지 못한다는 아쉬움 또는 슬픔을 표현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일정 기간 살다가 무(無)로 돌아간다.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동안 모두가 잘 먹고 잘 사고 싶어 한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넘어 사후에도 마음이 편안하기를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개운하다’. 흔히 ‘개운하다’라고 표현할 때 ‘운이 열린다’는 느낌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개운’은 ‘운명을 열다’라는 뜻이 담긴, 희망적인 표현이다. 개운한 느낌이 드는 행동을 했을 때 운명이 조금이지만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늘산’이라는 필명을 가진 지은이가 쓴 이 책, 《운명을 열다》는 운을 끌어올리는 개운법을 좋은 습관, 태도, 마음가짐 등 다양한 면에서 일러준다. 저자는 78퍼센트의 사람은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지만, 22퍼센트의 사람은 난관을 극복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다고 본다. (p.55) 개운(開運)은 역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평소 우리는 어떠한 일이 꽉 막혀 있다가 해결되었을 때, 목욕을 하고 나서 몸이 아주 상쾌한 상태가 되었을 때 개운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어질러진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거나 묵혀두었던 과제를 마무리했을 때도 개운하다고 합니다. 지은이는 동양에서 개운법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으로 크게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귀인을 찾는 것이다. 절대자인 조물주는 우리들의 영혼 깊숙이 진실한 인연을 찾는 힘을 심어주셨으며, 이 방법이 개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57) “네가 들려준 소리들이 우리글을 만드는 데 크게 쓰였다. 아비의 마음 같아서는 온 백성들이 나의 딸이 함께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정의는 또 얼마나 기뻤을까 생각했단다.” “아바마마….” “세상에 너의 공을 알리지 못함이 속상하지는 않더냐?” “그렇지 않사옵니다. 조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아바마마께서 직접 만드시고 이룩해내신 크나큰 업적이옵니다. 저는 다만 미력한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한글은 참 쉽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혀 금방 ‘까막눈’을 면할 수 있다. 글자를 모르고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한 임금, 세종은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집현전 학사나 신하들의 도움 없이 해낼 수 있었을까?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비밀 프로젝트였다. 나빠진 건강을 이유로 세자였던 문종에게 정무를 맡기고, 본인은 본격적으로 문자 연구에 매달렸다. 이때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큰 도움을 준 이가 바로 딸 정의공주였다. 박연아가 쓴 이 책, 《정의공주》는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공신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정의공주의 일생을 다룬다. 정의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창의성에 대해서는 많은 정의가 있지만, 대체로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이리저리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기존에 있던 요소를 절묘하게 섞어 만드는 ‘융복합’이 창의성이라는 거다. 그렇게 보면 조선에서 창의성으로 으뜸가는 인재가 있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학자이자 정치가이고, 작가이자 교육자이고, 의사이자 건축 기술자였다. 요즘 말로 하면 문과, 이과가 다 되는 천재였던 것이다. 단지 문학, 사학, 철학만 잘한 것이 아니라 산술, 의학 등에도 능해 진정한 ‘융복합 인재’라 불릴 만했다. 고정욱이 쓴 책, 《다산, 조선을 바꾸다》는 ‘정약용에게 배우는 융합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정약용의 이런 다재다능한 면모를 조명한 책이다. 정약용은 ‘실학’의 선구자인 만큼 세상과 학문의 접목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고, 늘 배우며 협력하고, 정보를 모으며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삶의 태도가 ‘유배형’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시련을 만났을 때 오히려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유배지에서 시간이 많았다지만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귀신들린 책!’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귀신’은 우리가 무서워하면서도 궁금해하는, 두렵지만 알고 싶은 그 무엇이다. 인간의 본능에는 신비로운 현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엄격히 기록으로 남겨진 ‘정사(正史)’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야사(野史)’가 더 흥미롭기도 하다. 소설가 이병주는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출판기획자 겸 여행작가인 지은이 유동후가 쓴 《귀신들린 책》은 달빛에 물든 설화다. 민담과 야사에서 선뜻 믿을 수 없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려 뽑아 우리 전통문화의 깊은 뿌리를 보여준다. 제1장에서는 아랑 전설, 죽어서 뱀이 된 비구니 등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2장에서는 황소로 둔갑한 도승과 오백나한, 화랑으로 현신한 미륵불, 무심천에 나타난 일곱 부처님 등 절의 연기설화를 담았다. 제3장에서는 무학대사와 간월도 설화, 백제왕과 천안 위례산 건설 등 온 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명 관련 설화를 보여준다. 제4장에서는 야광주에 얽힌 사내 이야기, 연개소문전, 전우치전 등 서사성이 뛰어난 이야기를 수록했다. 그 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3) 아름답고 똑똑하고 용감한 그 여인한테 공민왕은 첫눈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원나라의 보탑실리 공주. 안타깝게도 공민왕은 고려를 침략한 철천지원수, 원나라의 공주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공민왕과 노국공주. 이들은 부부였다. 그것도 금슬이 아주 좋은 부부. 둘의 사랑은 무척 강력해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둘의 사랑이 없었다면 고려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공민왕이 오랫동안 선정을 베풀고 조선의 탄생은 영영 없었을 수도 있다. 이 책, 권기경ㆍ고정순의 《칠백 년을 함께한 사랑 –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우리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인 두 사람의 사랑을 다정한 문체로 들려준다. ‘역사스페셜 작가들이 쓴 이야기 한국사’답게 정보와 재미를 둘 다 잡은 책이다. 둘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때에 혼인했다. 충숙왕의 둘째 왕자, 공민왕은 십 년이 넘게 연경에 볼모로 잡혀 있던 차에 원수의 나라인 몽골 공주와 혼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원 황실의 부마가 되면 고려의 왕이 될 수 있었기에 혼인 제안을 받아들였다. 언제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잠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동생이 출국하면서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며 나에게 영문소설을 하나 주고 갔다. 리사 시(Lisa See)라는 미국 여류작가가 올 3월에 펴낸 《The Island of Sea Women》라는 소설이다. 동생 덕분에 정말 오래간만에 영어 원어로 된 소설을 읽어본다. 처음에는 의무감에 읽기 시작하였으나, 곧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소설은 영숙과 그녀의 친자매 같았던 친구 미자라는 해녀를 중심으로 1938년부터 2008년까지 제주 구좌읍 하도리 해녀들의 삶을 그린 것인데, 소설을 통하여 제주 해녀들의 삶과 애환, 슬픔 등이 피부에 와 닿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제주의 풍토, 민속 신앙, 역사 등 제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여 나는 작가가 당연히 한국계 미국인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게 뭐야? 백인 여자다! 비록 증조부의 중국인 피가 조금 섞여 있긴 하지만, 외모는 완전 백인 여자다. 어떻게 백인 여자가 제주를 우리보다 더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리사는 어느 잡지에 실린 제주 해녀의 사진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언젠가 제주 해녀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