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언제부터 걸려 있었나 잿간 흙벽에 외로이 매달린 작은 꼴망태기 하나 / 그 옛날 낫질 솜씨 뽐내셨을 할아버지의 거친 숨결이 아버지의 굵은 땀방울이 / 찐득찐득 배어들어 누렇게누렇게 삭아버린 꼴망태기 하나 /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나무 지겟짐 세워 놓고 떡갈잎 물주걱 만들어 / 시원하게 목축이다 흘리신 바윗골 약수랑 싱그러운 들꽃 향기랑 / 소릇이 배어들어 바작바작 삭어버린 꼴망태기 하나” 위 노래는 최병엽 작사, 한동찬 작곡의 동요 <꼴망태기>의 일부입니다. “망태기”는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써왔던 것으로 새끼 등으로 꼬아 만든 주머니인데 물건을 담아서 다닐 때 쓰는 기구입니다. 망탁ㆍ망태라고도 하고, 지역에 따라 구럭ㆍ깔망태ㆍ망탱이라고도 하지요. 무게는 800g 안팎이며, 어깨에 멜 수 있도록 양끝에 길게 고리를 달아 썼습니다. 망태기는 꼴 곧 말과 소에 먹이는 풀을 담는 꼴망태가 있고, 장기짝을 넣어 두는 조그마한 장기망태기, 송이버섯을 담는 송이망태기, 개똥망태기도 있습니다. 망태기와는 모양이나 쓰임새가 다른 “삼태기”도 있는데 쓰레기ㆍ거름ㆍ흙ㆍ곡식 등을 담아 나르는 그릇이지요. 그 밖에 망태기와 관련된 낱말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지저고리와 치마, 배자와 두루마기 같은 한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무얼 신었을까요? 물론 백성이야 짚신과 마로 삼은 미투리(麻鞋)를 신었지만, 양반들이 신는 신으로는 목이 긴 ‘화(靴)’와 목이 짧은 ‘이(履)’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보다 더 많이 신었던 ‘이(履)’에는 태사혜, 당혜, 운혜, 흑피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먼저 태사혜(太史鞋)는 코와 뒤에 태사라 하는 흰 줄무늬를 새긴 남자용 신입니다. 흔히 사대부나 양반계급의 나이 많은 사람이 평상시에 신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종이 신었다는 태사혜 한 켤레가 있지요. 조선 말기에 와서는 임금도 웅피혜(熊皮鞋, 곰가죽 신)나 녹피혜(鹿皮鞋, 사슴가죽 신) 아닌 태사혜를 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무백관들이 조정에 나갈 때는 검정 가죽으로 지은 흑피혜(黑皮鞋)를 신었지요. 또 당혜(唐鞋)는 조선시대 부녀자가 신던 갖신을 이릅니다. 코와 뒤꿈치에 당초(唐草) 무니를 놓아 만든 마른 신으로, 안은 융 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지요. 이 밖에 부녀자들은 구름무늬가 수놓아진 운혜(雲醯)도 신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연기념물 제216호 “사향노루”를 아십니까? 사향노루는 겉모습은 고라니와 비슷하지만, 고라니보다 작고, 네 다리와 발굽도 작습니다. 꼬리는 겉으로 보이지 않으며, 뿔이 없는데 몸통길이는 65∼87㎝, 꼬리길이는 3∼4㎝, 귀길이는 7.5∼10.5㎝입니다. 그런데 사향노루 가운데 수컷에는 특이하게 배꼽과 생식기 사이에 사향샘이 있는 사향주머니(사향낭)가 있습니다. 사향노루는 발정기가 되면 이 수컷의 사향샘이 매우 발달하면서 사향을 풍겨 암컷을 유인합니다. 문제는 이 사향노루의 수컷이 품어내는 사향이 결국 제 목숨을 잃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부터 궁중의 왕족들이 성생활에 쓰려고 찾는 향은 고양이 암컷 음문에서 채취한 영묘향(靈猫香), 큰머리고래에서 채취한 용연향(龍涎香)과 함께 이 사향노루 사향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양이 많은 용연향과 약효가 떨어지는 영묘향에 견주어 사향을 최고의 향으로 쳤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사향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쳤고 그 때문에 사향노루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하지요. 더더구나 사람이 사향노루를 잡으려 할 때는 향낭 때문에 잡힌다는 걸 알고, 향낭을 저주하며, 수없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집터 울밑 돌아가며 잡풀을 없게 하소 날 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 새 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막혀 기진할 듯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앉을 자리 정한 뒤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단술(보리식혜) 먼저 먹세” 이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6월령 일부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한째 “소서(小暑)”지요. 이 무렵은 본격적으로 더위가 몰려오는데 이때는 장마철이라 습도가 높아지고, 비가 많이 옵니다. 하지 무렵에 모내기를 끝내고 모낸 20일 정도 지난 소서 무렵은 논매기, 피사리를 해주며, 논둑과 밭두렁의 풀을 베어 퇴비를 장만해야 하는 일로 바쁠 때입니다. 조선시대 문신 신흠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만든 책인 《상촌집(象村集)》에 보면 소서 때 15일을 3후(三侯)로 나누어서, 초후에는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중후에는 귀뚜라미가 벽에서 울며, 말후에는 매가 먹이 잡는 연습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채소나 과일들이 풍성해지고, 보리와 밀도 먹게 됩니다. 특히 이때의 시절음식은 밀가루 음식인데 밀이 제맛이 나는 때라 국수나 수제비를 즐겨 해 먹었지요. 채소류로는 호박, 생선류로는 민어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의 전통 농기구 가운데는 곡식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 때나 물에 불린 곡식을 갈 때 사용하는 기구 맷돌이 있습니다. 맷돌은 흔히 한 사람이 손잡이를 돌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가리(구멍)에 곡식을 넣습니다. 그러나 맷돌이 크고 갈아야 할 곡물이 많을 때는 맷손잡이에 가위다리 모양으로 벌어진 맷손을 걸고 2~3사람이 노를 젓듯이 앞뒤로 밀어가며 갈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맷돌은 중부와 남부 두 지방의 것이 다릅니다. 중부지방의 것은 위쪽 곧 암맷돌과 아래쪽 숫맷돌이 같고, 둥글넓적하여 맷돌을 앉히기가 좋은 매함지나 멍석을 깔고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부의 것은 숫맷돌이 암맷돌보다 넓고 크며 한쪽에 주둥이까지 길게 달려서 매함지나 매판을 쓰지 않지요. 맷돌의 크기는 매우 다양하여 작은 것은 지름 20㎝에서 큰 것은 1m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일반 맷돌보다 곱게 갈 수 있는 맷돌은 풀매라고 부릅니다. 맷돌에도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이 있습니다. 아래 숫맷돌은 고정하고 위의 암맷돌을 돌리는데 이때 원심력이 생기며, 이 원심력과 함께 달팽이 모양의 홈이 파인 암맷돌 밑 부분을 통해서 곡물이 바깥으로 쉽게 밀려나가게 했지요. 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겸재 그림은 말년에 더욱 능란해지고 신기해져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며, 세상에서는 겸현(謙玄)이라고 일컬지만, 그 아담한 정취는 현재에 미치지 못한다고도 한다.” 이 말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조순이 겸재 그림을 평한 <제겸재화첨>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김조순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겸재 정선이 현재 심사정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군요. 요즘 사람들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웬만하면 알지만 현재(玄齋) 심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이 일컫는 3원3재(三園三齋,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뛰어난 화가입니다. 현재는 중국 남종문인화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한 화가로 관념적 화풍으로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이 세계로 나가게 했다고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심사정은 할아버지 심익창이 영조 임금을 살해하려 한 무리의 배후라는 죄로 극형을 당한 뒤 몰락한 집안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도 그림에 시 한 수 붙여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 너는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느냐만 / 한밤중 서로 생각에 불이 나게 되면 / 무더운 여름 6월(음력)의 염천보다 더 뜨거우리라.” 위는 조선 중기 문인 임제(林悌)의 시입니다. 지금이야 선풍기나 에어컨으로 여름을 나지만 옛사람들은 부채가 여름을 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 부채는 모양 따라 방구부채(둥근부채)와 접부채로 나뉩니다. 먼저 방구부채는 부채살에 비단이나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모양의 부채로 단선 또는 원선이라고도 합니다. 방구부채에는 태극 무늬가 그려진 태극선, 오동잎처럼 생긴 오엽선, 왕의 행차에 쓰이던 파초선, 부채의 모양이 연잎과 같은 연엽선, 부채 바닥을 ‘X’ 모양으로 나누어 위와 아래는 붉은색, 왼쪽은 노란색, 오른쪽은 파란색을 칠하고 가운데는 태극무늬를 넣는 까치선, 공작선 등이 유명하지요. 또 접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데, 접어서 쥐고 다니기 간편한 부채라는 뜻의 쥘부채, 거듭 접는다는 의미의 접첩선 또는 합죽선 등으로 불립니다. 접부채의 종류에는 꼭지를 스님의 머리처럼 동그랗게 만든 부채인 승두선(僧頭扇), 바깥쪽에 마디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在郊那似在家肥(재교나사재가비) 교외에 있는 것이 어찌 집에서 살찌는 것만 하겠냐고 人笑冥鴻作計非(인소명홍작계비) 사람들이 기러기 세운 계획 잘못됐다 비웃지만 莫把去留論得失(막파거류론득실) 가고 머무름으로 얻고 잃음을 말하지 말라 江南水闊網羅稀(강남수활망라희) 강남에는 물이 넓고 그물도 드물다네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영정안(詠庭雁)’ 곧 “뜰의 기러기를 노래함”이라는 한사로, 벼슬에서 물러나 숨어 사는 것이 더 슬기롭다는 것을 기러기에 비유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백사는 말합니다. 들판에 있는 것이 어찌 집에서 뒹굴뒹굴 살찌는 것만 하겠냐고 또 사람들이 기러기 세운 계획이 잘못됐다고 비웃지만, 나오고 물러감만을 가지고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지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강남에는 물이 넓어서 기러기가 살기 편하고 기러기를 잡는 그물도 많지 않다고 노래하지요. 여기서 그물은 벼슬길에 생기는 위험을 비유한 것입니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ㆍ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뒤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저녁을 먹고 나서는 뜰이나 마루에 보리집자리나 멍석가튼 것을 펴고 왼가족이 다 나와 안습니다. 그리고 솔깡이나 겨릅가튼 것으로 우둥불을 놋습니다. 그리고는 내일은 무엇을 하느니 아무 논벼는 몃섬이 나느니 팟종자를 개량한다느니 목화바테 무명이 만히 피엇다느니 하야 한참동안 구수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는 부인네들은 혹 바느칠도하고 혹 삼도 삼고 혹 이야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잡지 《개벽 제4호》 1920년 9월 25일 자의 ‘농촌의 밤’이 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정겨운 시골 저녁 마당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지금은 전통한식점, 전통찻집 등에서 멋으로 둘둘 말아 한쪽 벽을 꾸미는 쓰임으로 전락했지만, 멍석은 예전 우리 겨레에게 친근한 삶의 도구였습니다. 멍석은 주로 짚으로 만들었으며 보통 3m × 1.8m 정도의 직사각형이지만 둥근 모양도 더러 있었고, 특히 맷돌질할 때 바닥에 깔아 쓰는 맷방석이라는 둥글고 작은 것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 김형수가 쓴 《월여농가(月餘農歌)》에는 ‘관도점’이라고 했으며 덕석, 덕서기, 턱성, 터서기 등으로 불렀습니다. 멍석은 고추, 깨, 콩, 벼 등 곡식을 널 때도 쓰고 잔치 때나 상을 당했을 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라면서 평생을 호적 없이 지냈으며 "일본놈의 백성이 되기는 죽어도 싫다.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라면서 집에서 손수 어린 딸을 공부시켰으며 총독부 청사를 마주 보기 싫어 북향집인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살았던 만해 한용운 선생. 광복되기 한해 전 오늘(6월 29일)은 선생이 그토록 원하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 날입니다. 선생은 3ㆍ1만세운동 선언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변절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분 가운데 하나지요. 만해에 관한 일화는 참으로 많은데 그를 회유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 평의 나라 숲을 넘겨주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으며,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이 나중에 변절하자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