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곧바로 가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입니다. 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그 자손들이 본 영월군에 있기도 하고 괴산(槐山) 땅에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절의를 부추기어 장려하는 것으로 뽑아서 쓰는 은전이 있어야겠습니다." 이는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1699년) 1월 5일치 기사입니다. 여기서 노산군은 단종임금을 가리키며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를 하여서 거기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지요. 그때 목숨을 걸고 단종임금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엄흥도(嚴興道, 1404-1474)입니다. 그 뒤 엄흥도는 어명을 어기고 단종임금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러준 일로 평생을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종 때 그의 충절이 조정에서 논의되어 1698년에 공조좌랑, 1743년에 공조참의, 1833년에 공조참판, 마침내 1876년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게 됩니다. 엄흥도의 자손들 곧 영월엄씨 충의공계 광순문 종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는데, 1. 태극도(太極圖), 2. 서명도(西銘圖), 3. 소학도(小學圖), 4. 대학도(大學圖), 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7. 인설도(仁說圖), 8. 심학도(心學圖), 9. 경재잠도(敬齋箴圖), 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였다. 상은 그것이 학문하는 데 매우 매우 필요하고 절실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하여 이를 보면서 반성하였다. 그때 이황은 돌아갈 뜻을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이 도(圖)를 만들어 올리며 ‘제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이 도뿐입니다.’ 하였다.” 이는 선조실록 선조 1년(1568년) 음력 12월 1일(양력 12월 18일)에 퇴계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린 데 대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성학(聖學)이라는 말은 곧 유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하여 있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이황의 《성학십도》는 1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68살의 대학자가 바로 즉위 원년에 올렸던 것임을 생각할 때, 선조가 성왕(聖王)이 되게 하여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재)화랑문화재연구원은 지난 12월 3일 경산지식산업지구 진입도로구간의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5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사람얼굴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진주 중천리유적, 함평 금산리 방대형고분 같은 곳에서도 사람얼굴 모양이 장식된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삼면에 돌아가며 얼굴 모양이 표현된 사례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발견된 토기는 높이가 28㎝가량으로, 토기의 윗부분 가운데에는 원통형으로 낮게 튀어나온 구멍을 뚫었습니다. 토기 옆면에는 같은 간격으로 동그란 구멍을 뚫어 귀를 만들었고, 각 구멍 사이에 만들어진 세 개의 면에 무표정한 듯, 심각한 듯, 말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얼굴 무늬를 각각 새겼지요. 각 얼굴 무늬의 두 눈과 입은 기다란 타원형으로 밖에서 오려내었으며, 콧구멍에 해당하는 2개의 작은 구멍은 안에서 밖으로 찔러 만들었는데 콧등을 중심으로 양쪽을 살짝 눌러서 콧등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습니다. 또 이 사람얼굴 모양 토기와 함께 시루 모양의 토기도 출토되었습니다. 출토된 몸통 중간 지점에는 소뿔 모양 손잡이 2개가 붙어 있지요. 그런데 연구자들에 따르면 얼굴 모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終宵默坐算歸程(종소묵좌산귀정) 말없이 밤새 앉아 돌아갈 길 헤아리니 曉月窺人入戶明(효월규인입호명) 새벽달이 문에 들어와 밝으니 날 엿보는가 忽有孤鴻天外過(홀유고홍천외과) 문득 외기러기 하늘 너머로 날아가니 來時應自漢陽城(내시응자한양성) 아마도 저 기러기 한양성으로부터 출발했으리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재상으로 꼽히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한시(漢詩) ‘야좌(夜坐)’입니다. 북청 유배지에서 밤새 잠들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 돌아갈 수는 없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헤아려 보는데, 새벽달이 자신을 엿보는 듯 창문으로 들어와 방안을 훤히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그때 문득 하늘에 나타난 겨울 외기러기가 하늘 저 멀리 날아갑니다. 그런데 저 외기러기는 아마도 한양성 쪽에서 왔지 않을까요? 그저 고향이 간절히 그리워질 뿐입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해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 때문에 백사나 필운 같은 호 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많이 알려졌지요. 하지만 이항복은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11월 13일 뉴스에는 “너무 편하고 따뜻해, 군대도 이제 ‘패딩’ 시대”라는 기사가 떴습니다. 국방부가 경기ㆍ강원 등 전방지역 국군 병사 12만4천 명에게 '패딩형 동계점퍼'를 지난 10월부터 보급하고 있다고 밝힌 것입니다. 웬만한 겨울 추위도 이젠 끄떡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패딩 같은 옷이 없던 옛날 우리 겨레는 겨울을 나기 위해 누비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누비옷이란 옷감의 날실 한 가닥을 일정한 간격으로 당겨 누빌 선을 표시하고 그 선을 따라 홈질로 누벼 빚은 옷을 말하지요. 누비는 솜의 유무, 누벼진 형태, 누비 간격 등에 따라 그 종류를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솜의 유무에 따라 솜을 넣는 ‘솜누비’와 솜을 쓰지 않고 옷감 두 겹만을 누비는 ‘겹누비’가 있으며, 바느질 방법에 따라 ‘홈질누비’와 ‘박음질 누비’로 나눌 수 있지요. 또 누비 간격에 따른 것으로는 누비간격이 0.5㎝에서 1㎝까지의 ‘잔누비(세누비)’, 2.5㎝ 안팎의 중누비, 5㎝ 안팎의 드문누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색실로 곡선과 직선을 자유롭게 표현하여 장식성을 강조한 ‘색실누비’가 있으며, 손누비와 달리 20세기 초에 재봉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를 보면 떡 가운데 인절미를 가장 오래전부터 먹어왔다고 하며, ‘인절미는 찰지면서 쫀득하여 떡의 으뜸으로 여긴다.’라고 나옵니다. 인절미는 “인절병(引切餠)”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있는데 차진떡이라 '잡아당겨 끊는다'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하지요. 그 종류로는 대추인절미, 깨인절미, 쑥인절미, 차조인절미, 동부인절미, 감인절미, 석이인절미 따위가 있습니다. 인절미로 가장 유명한 지방을 꼽으라면 당연히 황해도 연백인데 계산할 때에 숫자가 맞으면 “연안백천인절미”라고 소리친다고 하지요. 인절미의 이름에 관한 속설을 보면 조선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공산성으로 피란 갔을 때 지었다고 합니다. 임씨라는 농부가 찰떡을 해 임금께 바쳤는데 그 떡 맛이 좋고 처음 먹어 보는 것이어서 임금이 신하들에게 “절미로구나, 이 떡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임 서방이 절미한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한 것이 “인절미”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인절미는 혼례 때 상에 올리거나 사돈댁에 이바지로 보내는 떡입니다. 찰기가 강한 찹쌀떡이기에 신랑신부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일 무역 분쟁으로 중국만 살판났다”, “MB정부 기간 동안 가계는 곪고 기업만 살판”, “불난 집에 도적이 살판난다.” 같은 기사 제목이 보입니다. 여기서 ‘살판’이란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살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재물이 많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거듭되어 살림이 좋아지는 판국” 또는 “기를 펴고 살아나갈 수 있는 판”이라고 풀이합니다. 다시 이 말의 유래를 백과사전에서 살펴보면 “광대가 몸을 날려 넘는 땅재주”를 말하고 ‘지예(地藝)’또는‘장기(場技)’라고도 하지요. 이것은 유랑 연예집단이던 남사당패와 솟대쟁이패들이 하던 놀이종목의 한 가지입니다. 남사당패 12가지의 땅재주 가운데 제일 마지막 재주로 땅재주의 기본을 이루지요. 이 놀이의 재주는 앞곤두ㆍ뒷곤두ㆍ번개곤두ㆍ외팔곤두ㆍ앉은뱅이팔걸음ㆍ앉은뱅이모말되기ㆍ숭어뜀ㆍ살판 따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놀이는 큰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이를 벌이는 연예인들이‘잘하면 살판이지만 못하면 죽을판’이라고 한 데서 따온 것으로 그들 스스로 한탄하며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살판은 서양의 “아크로바틱(acrobatic)” 또는 비보이들이 추는 브레이크댄스(Break dance, B-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답답한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다. 그건 출연자들이 “너무 예뻐요.”처럼 “너무”라는 말을 마구잡이로 쓰고 있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말글살이의 표본이 되어야 할 아나운서도 “너무 앙증맞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라는 말을 말광(사전)에서 찾아보면 “너무 : 【어찌씨(부사)】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고 되어 있지요. 예문으로는 “할 일이 너무 많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장소가 너무 멀다.”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예쁘다, 앙증맞다’ 따위 긍정적인 말 앞에 어찌씨 “너무”를 쓰면 그 말뜻은 예쁘고 앙증맞아서 좋지 않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너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예뻐졌다.”라고 하면 결국 “예뻐져서 안 좋다.”라는 뜻이 되어 비아냥거리는 말로 들릴 수 있지요. 물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학교에서 국어를 12년 이상 배운 사람들로서 “너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일은 아닙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 이경숙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말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어륀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08년 11월 한 60대 재미교포가 문화재청에 “내가 고종이 쓰던 국새를 소장하고 있다. 이를 구입하겠느냐?”라는 문의를 해왔습니다. 당시 정계옥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기존 문헌에 제작 기록이 없어 고종이 내밀하게 썼던 국새로 파악된다.”라며 사들였습니다. 이 국새는 고종황제가 친서에 썼던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 시대의 국새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에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분실된 바로 그 국새였다고 합니다. 황제어새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의 외교문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618-1호 황제어새는 1903년 이후 고종황제가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보낸 14통의 친서에 실제로 날인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1903년 11월 이탈리아 군주에게 전쟁이 일어날 때 대한제국은 중립을 지킬 것이며 이러한 입장을 지지해주도록 요청하는 친서와 1904~1905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4통의 친서 그리고 1909년 헐버트 박사에게 비밀 자금 인출을 명령하는 친서에도 ‘황제어새’를 찍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국새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보관과 관리하게 되는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 절기 “대설(大雪)” 입니다. 대설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절기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이때 눈이 그리 많이 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대설이 있는 이 무렵 음력 11월은 농부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하는 농한기(農閑期)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봄부터 겨울까지 비가 부족하였는데, 지금은 또 대설(大雪)이 이미 지났는데도 눈이 내리지 아니하여 샘의 물줄기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이 일찍이 농사꾼에게 듣건대 ‘눈이 오면 토질의 맥이 윤택하여지고, 또 눈이 보리를 덮은 뒤에라야 보리농사가 풍년들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옛적에는 눈이 오기를 빈 일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송(宋)나라 때에도 눈을 빌었고, 또한 ‘납향(臘享,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양날) 안에 세 번 눈이 와야 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지금 눈을 빌도록 함이 어떠하리까?” 위는 《중종실록》 7년(1512) 10월 30일 기록으로 봄부터 비가 부족하고 대설이 지났는데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며 눈이 내리기를 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