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2017년 7월 27일 뉴스에는 '이중섭ㆍ박수근 위작사건' 작품들에 대법원 "가짜 맞다"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위작 논란이 송사에 휘말려 대법원까지 가서 위작이란 결론이 났다는 얘기인데 그만큼 우리나라의 현대회화에서 이중섭ㆍ박수근 작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18년 3월 7일 뉴스에는 “이중섭 '소' 47억 원 낙찰…8년 만에 작가 최고가 경신”이란 뉴스도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으뜸 작가로 꼽히는 이중섭은 1916년 오늘(4월 10일) 태어났습니다. 미술관이라고는 가본 적이 없는 사람도 유명화가 이중섭과 그의 대표작 ‘흰 소’에 대해 들어봤을 정도입니다. 그가 주로 그렸던 작품의 소재는 소ㆍ닭ㆍ어린이[童子]ㆍ가족 등이지요. 그의 그림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면서 동화적이고 또한 자전적(自傳的)인 요소가 많다는 평입니다. 이중섭은 평탄치 않았던 삶을 살았기에 ‘비운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탓인지 그는 격렬한 터치로 소를 그렸고,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았기에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한 듯 환상적인 이상세계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서귀포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27년 전 오늘(4월 13일)은 사상의학을 완성한 조선 후기의 한의학자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1837~1900)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저술을 끝마친 날입니다. 《동의수세보원》은 이제마가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주창한 책입니다. 책 이름에서 ‘동의(東醫)’는 중국의 의가(醫家)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며, ‘수세(壽世)’는 온 세상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킴을 뜻하는 것이지요. 사상의학은 저자 자신이 오랫동안 임상 치료한 경험과 체질에 관한 문헌적 연구에 바탕하여 주창한 학설로서 사람들의 체격, 얼굴 생김새, 성격, 약물에 대한 반응성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서 비장이 크고 신장이 작은 소양인(少陽人), 간이 크고 폐가 작은 태음인(太陰人), 신장이 크고 비장이 작은 소음인(少陰人), 폐가 크고 간이 작은 태양인(太陽人) 등 4가지 형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사상인(四象人)에 따라 병이 생기는 원인이 다를 뿐 아니라 병증에서도 각각의 특성이 있고, 약물의 반응도 다르므로 그것에 맞게 치료를 해야 병이 낫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마는 20세기로 접어들던 무렵 ‘사상의학’을 창시해 한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의 학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의 사상계(界)는 3·1운동을 기회 삼아 일대(一大) 전환을 하였다.(가운데 줄임) 당국이 매양 숫자를 거(擧)하여 조선의 발전을 과장하나, 그것이 전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상의 발전이요 이익이다. 조선사람의 생계는 반비례로 궁경(窮境)으로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숫자의 보고는 대부분이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적 발전을 지칭함이요, 조선인의 생산범위는 도리어 점차 수축됨을 따라서 생활정도가 극도로 저락(低落)하여 전(全) 조선은 정(正)히 아귀굴(餓鬼窟)로 화하였다.” 이는 1924년 펴낸 《개벽(開闢)》 3월호의 이민(李民)이 쓴 “사상(思想)의 추세(趨勢)와 운동(運動)의 방향(方向)”이란 논문 일부입니다. 논문은 조선 사상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당시의 심각한 경제사정과 일제의 식민정책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자(7월호)로 창간된,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종합잡지였지요. 이 논문에서 보다시피 《개벽》은 우리 겨레의 뜻을 가장 충실히 대변했고, 언제나 일제와 맞서 겨레의 자존심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따라서 《개벽》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상하 신하와 백성의 집에 정한 제도가 없어, 서민 집이 분수에 넘치게 관료 집을 따라가고 관료 저택은 감히 궁궐과도 비슷하다. 사치와 아름다움을 다투어 숭상하여 상하에 순서가 없게 되었으니, 실로 옳지 않은 일이다. 이제부터 친아들, 친형제와 공주는 50칸으로 하고, 대군은 여기에 10칸을 더하고,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으로 하며, 백성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하라. 주춧돌 외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말고, 화공(花拱, 기둥머리의 꽃모양 장식)과 진한 채색과 단청을 쓰지 말고 검약에 힘을 쏟도록 하라.” 이는 《세종실록》 13년(1431) 1월 12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얼마나 집을 호화스럽게 지었는지 세종은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한다는 명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종실록》을 보면 “무령군 유자광의 집에 분수에 넘치게 연석(鍊石)을 사용했으니 대신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청컨대 유자광을 죄주고 연석을 철거하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나와 성종 때에 와서도 여전히 사치스러운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새 고을의 관청은 틀이 잡혔으나 민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시 남산에는 높이 약 9m, 둘레 약 26m의 큰 바위 4면에 수십 구의 불보살상과 기타 조각이 새겨져 있는 보물 제201호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습니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으로 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불상과 독립된 보살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불상ㆍ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각 다릅니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2그루와 여래상이 있습니다. 이 불상들은 돌기둥 4면에 새겨져 있어 사방사불(四方四佛, 모든 곳에 부처가 있다는 뜻으로 사면에 새긴 불상)의 하나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에 의하여 이곳에는 신인사(神印寺)라는 절이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이 마애불상군은 신라 때부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란은 꽃 가운데 임금, 곧 화왕(花王)이라고도 불리는,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입니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모란꽃을 그린 여덟 폭의 병풍이 있습니다. 모란은 괴석 위에 곧게 그려졌는데 괴석은 오랫동안 변치 않는 돌을 상징하는 것으로 장수(長壽)를 뜻합니다. 이 모란을 그린 병풍은 궁중에서 장식하기 위하여 쓰였고, 또한 중요한 행사 곧 생일, 혼인, 책봉, 어진 제작 등을 기념한 여러 잔치 때 빠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기쁜 날뿐만이 아니라 장례식에도 쓰였다고 하지요. 특히 모란꽃은 장수뿐만이 아니라 부귀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때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쓴 ‘애련설(愛蓮說)’에서 거론된 덕이라고 합니다. 이 모란도는 몇 개의 가지가 괴석 위로 곧게 솟아 올라있고, 가지에는 흰색,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등 다양한 빛깔의 봉오리들이 빼곡하게 피어있습니다. 또 꽃들은 앞면, 옆면은 물론 다양한 꽃봉오리부터 활짝 피었을 때까지의 여러 모습을 표현하였지요. 그런데 이 모란꽃은 사실적인 것을 무시한 평면적인 그림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잔치 때 종이꽃 곧 지화(紙花)를 만들어 꾸몄는데, 이 지화가 단순히 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국문가사예찬론’에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한문을 ‘타국지언(他國之言, 다른 나라의 말에 불과함)’으로 보았으며,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의 서사시 <이소(離騷)>에 견주었지요. 더구나 김만중은 <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소설을 상당수 창작했기에 정철, 허균(許筠)과 함께 우리말 문학가로서 분명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습니다. 김만중은 그를 소설문학의 선구자로 올려놓은 《구운몽(九雲夢)》을 비롯하여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을 썼지요. 이 가운데 《구운몽》은 이규경(李圭景)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서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 씨 부인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 오라고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아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3월 24일 서울옥션에서는 제155회 미술품 경매가 열렸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정약용이 쓴 《행초 다산사경첩(行草 茶山四景帖)》이었습니다. 이는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유배 시절부터 적어온 시와 글들의 모음입니다. 전남 강진에 머물던 1809년에 쓴 〈다산사경(茶山四景)〉과 1818년에 쓴 〈순암호설(淳菴號說)〉, 유배가 끝난 후인 1823년에 쓴 〈여다산제생문답(與茶山諸生問答)〉, 그리고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으나 유배 초로 추정되는 오언시 등을 담고 있습니다. 행서가 주를 이루며, 일부 다산의 초서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지요. 작품은 보물 제1683-1호로 지정되어, 정약용의 가족사랑을 노을빛 치마에 새긴 보물번호 1683-2호 《하피첩(霞帔帖)》과 함께 다산의 유배시절을 대표하는 서첩으로 손꼽힙니다. 유배의 설움을 딛고 주변의 일상과 자연풍경에 주목하며, 그 세심한 관찰력을 발휘한 작품이지요. 많은 이들에겐 자칫 악몽과도 같을 유배지의 생활이 다산에게는 또 다른 무언가를 연구할 기회였으며, 유배가 풀린 뒤에도 초당 주변의 풍경을 그리워하고 미물에 대한 관심과 물음을 아끼지 않은 다산의 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방가사(內房歌辭)> 곧 <규방가사(閨房歌辭)>는 조선 중기 이후 주로 영남지방의 양반집 여성들에 의해 창작되고 향유된,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여성들의 집단문학입니다. 초기에는 여성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다양한 소재와 정제된 운율을 갖춘 형식으로 발전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민족적 가치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과 같은 내용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특히 내방가사는 유교문화가 가장 잘 발달된 강력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에 의해 우리 겨레의 언어인 ‘한글’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삶과 애환을 드러낸 독특한 문학형식을 만들어 냈지요. 대구가톨릭대학교 권영철 명예교수는 무려 6천여 편의 내방가사를 수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동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내방가사가 가진 값어치를 여성의 주체적 자기 고백의 역사에서 찾으면서도 이것이 특히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또 그는 “여성들의 억압받는 삶은 전 세계적인 역사였지만, 그것을 문학의 형태로 발전시킨 것은 세계적으로도 내방가사만이 보여주는 독특한 특징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근 뉴스에서는 “구글이 매년 4월 1일 만우절이면 해왔던 '만우절 장난'(April Fools)을 올해는 건너뛰기로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심각한 위협에 대응하는 게 우선이란 판단에서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만우절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음 얘기가 그럴듯합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새해를 3월 25일에 시작했는데 해마다 3월 25일이 되면 축제를 열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1564년 샤를 9세가 새해를 4월 1일로 바꿔 버렸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래전부터 해 오던 대로 3월 25일에 설을 쇠고, 대신 4월 1일에는 설을 쇠는 흉내를 냈다. 장난스럽게 새해 잔치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발전되어 4월 1일에 만우절 풍습이 생긴 것이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일 기사에는 “만우절에 일어난 넌센스 한 토막. 만우절인 1일 아침 7시 45분 대구방송국에서는 ‘희망의 속삭임’ 시간을 통하여 앞으로 3일간에 걸쳐 선착순으로 ‘트란지스타라디오’ 한 대씩 시민에게 선사한다고 거짓말 방송을 했는데 이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동 방송이 끝난 3분 후부터 경북고교생을 비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