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어둠을 불평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 -펄 벅(Pearl S. Buck, 1892∼ 1973)- 지금은 자신의 조국이 사라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지만, 언젠가 민족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비록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될 한국인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PASSING OF KOREA(대한제국멸망사)》- 포식자의 느닷없는 기습공격을 찌르레기떼가 현란하고 아름다운 군무(群舞)로 물리치는 모습은 경이롭다. 우리는 그 숨 막히는 광경을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대한민국의 거리와 광장에서 펼쳐지는 빛의 무혈 혁명이다. 73살을 넘긴 나도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광장에 나가곤 한다. 이 순간도 포식자들은 발톱을 숨긴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조류학자들은 찌르레기떼가 포식자의 공격을 받으면 절묘한 공중 곡예(aerial acrobatics)를 연출함으로써 적을 혼란에 빠뜨려 안전을 도모한다고 한다. 흉맹한 포식자가 쪼그마한 찌르레기를 표적 삼아 거듭 기습공격을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찌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 말 근대의 여명기에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여러 가지 이바지를 하고 자기를 희생한 외국인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인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였다. 그의 주선으로 1886년 조선에 온 헐버트만큼 그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헐버트의 말을 들어보자. “조선의 개방과 관련된 문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인이 된 조지 포크의 조선살이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856년 펜실바니아에서 태어난 포크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나폴리스의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너무 혈기방장하여 사관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4년 뒤 그는 선두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모든 분야를 기민하게 통달했으며 나이를 앞지르는 조숙성을 보였다. 그는 졸업한 뒤 곧 극동지역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명민함은 전문적인 학식과 기술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곧 상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제독의 눈에 들어 부관이 되었다. 일상적인 근무와 별도로 그는 놀라운 속도로 일본어를 습득했다. 그는 타고난 언어학자였다.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아가씨를 사귀게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 번에 이야기했듯이 미 해군 소위 조지 포크가 1883년 12월, 3명의 조선인과 함께 북대서양의 아조레스(Azores) 섬을 방문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인들는 이 희귀한 여행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특명전권 대신 민영익(보빙사 대표)은 처음으로 서양 여행을 하면서도 유교 서적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조지 포크는 탄식을 삼켰다. 반면에 서광범과 변수는 열정적으로 서양에 대한 지식.정보를 수집하고 메모하였다고 조지 포크는 전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전해오지 않는다. 서광범과 변수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으로 몰리면서 자료가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조선인들의 첫 서양 방문에 대해 오직 조지 포크를 통해서 그 조각이나마 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조지 포크의 부모님 전 상서에서 아조레스 방문에 대한 첫 부분을 지난 번에 실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여기 잇는다. “(부모님께) 저야말로 좌중의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노부인들이 꼬치꼬치 캐물어 시베리아 탐험이며 일본 여행이며 중국 사원 탐방이며 등등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또 조선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제가 독차지하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2025년 4월 1일 저녁 인사동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온다. 인사동 들머리에 성난 군중의 고함소리가 진동한다. 다가가 본다. 여느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험악하다. 촛불시위대와 태극기부대가 대치하고 있지 않는가? 아마 초조해진 태극기 부대가 상대편을 도발한 것 같다. 금세라도 충돌이 일어날 것만 같다. 요망스러운 일이지만 태극기 부대는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들고 있다. 이들 넋이 나가고 얼빠진, 광기의 수구세력이 겨레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나라를 망쳐먹은 역사는 길고도 질기다. 그들은 왜구와 한패거나 제주도에서 수만 명을 학살한 서북청년단과 정신적 동성동본일 것이다. 이들의 본색을 우리는 127년 전 1898년 서울 거리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1898년 겨울 썩어빠진 정부 관리들, 몰아치는 외세의 위협 앞에서 풍전등화 신세가 된 나라를 구하고자 만민이 연일 거리 시위를 하고 있다. 장작불을 지피며 풍찬노숙을 한다. 시위의 열기가 타올라 마침내 세상이 바뀔 조짐이 보인다. 그러자 오늘날의 태극기 부대 같은 것이 검은 구름처럼 몰려든다. 정부의 사주와 자금을 받은 전국의 보부상 수천 명이 서울로 집결한 것이다. 불길한 기운이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아마 오늘도 대한민국의 거리는 함성으로 뒤덮일 것 같다. 이는 1898년 3월께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해 3월 10일 서울 종로에는 약 1만 명의 남녀노소들이 모였다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그 당시 1만 명은 오늘날의 몇 명에 해당할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인파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외침의 뜻이 같다는 점이다.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다.” 그 함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직 주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누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판사ㆍ검사라는 이름의 법비(法匪)들인 것 같다. 그들은 죄 없는 생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기도 하고 내란 수괴를 탈옥시키기도 하고 수염에 난 불을 끄듯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깔아뭉개기도 한다. 이 자들의 폐악이 극에 달해도 그들을 징치할 방도가 없으니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국민이 주인일 뻔한 일들이 일어나긴 한다. 그 원초적 체험을 우리는 언제 했을까? 1896년 2월 11일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였다. 아관파천이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50여 년 전의 책이 지금까지 집에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평생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이사 다닐 때마다 책이 무더기로 버려진다. 반백 년이 지난 책으로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기껏 두엇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지영의《동학사》. 1973년 출판본이 주인을 몇 번 바꾸어 내게 온 것은 그 이듬해 봄이었다. 이 책은 원래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왜(倭)’를 일부러 ‘복(伏)’이라 적고 있는데 일제의 검열을 의식한 것이라고 했다.(이 책의 411쪽) 이 책을 대학 2학년 어느 봄날 읽다가 좀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애써 비유를 해 본다면, 나를 칭칭 얽매고 있던 촘촘한 올가미가 한순간 썩은 동아줄처럼 허물어 내리고 정신과 몸이 공중 부양하는 듯하였다. 오랫동안 유폐되었던 깜깜한 동굴에서 뛰쳐나온 듯도 하였다. 와룡생의 무협지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던가?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을지. 무협지는 버렸지만 《동학사》는 아직 못 버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이 책을 들춰보는데 첫눈을 맞추었던 스물두 살 때의 감동이 전혀 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5년 꽃들이 만발한 4월 3일, 한양의 사대문과 종각(보신각)에 이런 취지의 공고문이 붙어 있다. 정부에서 병원 하나를 설립했는데 북부 재동 외아문(외교부) 북쪽으로 두 번째 집이다. 미국 의사 알렌을 초빙하였고 아울러 의학도와 의약 및 여러 도구를 갖추고 있다. 오늘부터 매일 미시(오후 1-3시)에서 신시(오후 3-5시)까지 병원 문을 열어 약을 줄 것이다. 알렌의 의술은 정교하고 양호한데 특히 외과에 뛰어나서 한 번 진료를 받으면 신통한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본 병원에는 남녀가 머물 병실이 있으니 무릇 질병에 걸린 자는 병원에 와서 치료받을 것이며 약값은 나라에서 대줄 것이다. 이를 숙지하여 하등 의심을 품지 말고 치료를 받으러 올지어다. 한편, 당국은 한성부에 지시해 모든 계(契, 동의 상위 조직인 계는 당시 한성에 300여 개가 있었다.)에 공고문을 게시토록 했으며, 지방에도 읍마다 공고하게 했다.(황상익, 《근대의료의 풍경》)이 첫 서양식 병원은 처음엔 광혜원으로 불리다가 곧 제중원으로 개명되었다. 오늘날의 헌법재판소 경내에 있었다고 한다. 의사 알렌의 일기(1885년 4월 10일 자)다. 병원은 어제 개원했는데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과거는 살아 있는 현재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 12월에 일어났다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그러한지 시공여행을 떠나보자. 먼저 전인권 등 공저, 《1898, 문명의 전환》 218쪽에는 1898년에 한양의 거리를 달군 만민공동회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만민공동회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하나의 ‘국민’임을 경험한 축제의 현장이었다. 장작불을 피워놓고, 장국밥을 먹으며, 기생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생각을 쏟아놓았고 직접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물품과 돈을 제공함으로써 시위대에 동조를 표했다. 수많은 말이 넘쳐나는 현장을 각 신문들은 다투어 ‘중계’했고, 신문에 실린 뉴스는 때로는 소문으로 그리고 때로는 풍문으로 대한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다음은 1898년 11월 26일 자 <독립신문>이다. 수하동 소학교 학도 태억석, 장용남 두 아이는 나이가 십이삼인데 만민공동회에 다니면서 충애 의리로 연설하였는 고로, 옳은 목적 가진 이들은 그 두 아이를 칭찬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는지라. 지금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오늘날의 인간 군상을 1898년 12월 24일 <제국신문>에 열거된 족속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정말 그러한지, 126년 전 “한탄스러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음미해 보자. “일전에 친구끼리 서로 수작하는 말씀을 들은즉 몹시 이상하기로 여기 옮기노라. 한 사람이 가로되, 우리나라 사람은 평생에 견문이 고루하여 새로운 일을 아무것도 못 하나니, 옛글에 이른바 우물 밑에 개구리라. 항상 말하기를, 하늘이 적다면서 제 본 것만 올타하더라. 다른 한 사람이 가로되, 우리나라 사람은 새와 같아 눈은 반들반들하고 말은 재작재작 지꺼리기는 잘도 하고 떼를 지어서 모이기도 잘 하나 실상은 꾀도 없고 겁도 많아 아무 일도 못하나니, 옛글에 일렀으되, 연작(燕雀:제비와 참새)이 처마에서 구구구구 서로 즐겨할 새 부엌 고래에서 불꽃이 올라 집이 장차 탈건마는 연작은 화가 몸에 미칠 줄 모르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한다 하더라. …누구는 꼭 여우 같아. 옛말에 이르기를, 여우가 범을 보고 죽을까 무서워하여 간사한 말로 범을 속이되 나는 짐승 중에 왕이라 일백 짐승이 나를 보면 두려워 피하나니 그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번 우리는 1898년 어느날 백정 박성춘(1862-?)이 종로에서 열린 대규모 민중 대회에서 개막연설을 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박성춘은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요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선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는 박성춘 말고도 상인 등의 하층계급이 요인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백정 출신(해방된 백정)으로서는 박성춘이 거의 유일한 요인이었던 것 같다. 당시 활동을 주도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서재필ㆍ윤치호ㆍ이상재ㆍ지석영ㆍ주시경ㆍ오세창ㆍ이승만ㆍ안창호ㆍ이승훈ㆍ남궁억ㆍ정교ㆍ이준ㆍ장지연ㆍ박은식ㆍ이동녕ㆍ신채호ㆍ한규설ㆍ이동휘 등이다. 당시 제도적으로는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지만, 실제에 있어선 백정이 교육받거나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박성춘은 어떻게 쟁쟁한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아들 박서양의 효성이 촉매가 되었다. 교육을 받지 못한 박성춘은 아들에게만큼은 저주스러운 운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천지 어떤 학교가 백정의 자식을 받아 줄 것인가?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다. 정규 학교는 보낼 수 없으므로 당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