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 왕조는 개국 484년 만인 1876년 나라의 빗장을 열었다. 그 뒤 1880년대에 들어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다. 격랑의 시대에 집권 보수 사대파는 뭐든지 청나라의 그늘 속에 안주하려 하였다. 집권층은 큰 나라로부터 자주독립하려는 생각 자체를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적대시했다. 그들의 적이 바로 개화파였다. 개화파는 일본을 모델로 하는 개혁을 서둘렀다. 낡은 봉건왕조를 뜯어고쳐 재단장하려는 그들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훗날 일제에 강점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친일논쟁을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보수 사대파의 철옹성 같은 장벽과 야수와 같은 외세의 도전 속에 놓인 조선이 벼랑 끝에 서 있음을 절감한 사람들이 바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혁명가들이었다. 민중을 계몽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개혁을 통하여 조선을 구하려 했다. 그들은 소수였고 권력도 없었다. 그들을 적대시하는 보수 사대파는 청나라를 뒷배로 삼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개화파 혁명가들이 품었던 갈망은 조선의 자주독립, 그것이었다. 서재필의 말이다. “그때 김옥균의 생각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몇 년 동안 연재한 적이 있다. 올해 책으로 펴내기 위하여 관련 자료를 재검토하는 중이다. 자료가 뜻밖에 많다. 첫째는 그가 고국의 가족에게 보낸 서신이다. 1884년 5월부터 1887년 7월까지 그는 우편선이 있을 때마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부모님 전 상서를 썼다. 이 기간은 그가 조선살이를 한 기간이다. 그러니까 그는 개항초기 3년 동안의 조선 견문록을 사신으로 남긴 것이다. 둘째는 조선 여행기다. 1882년 6월 조선 땅(부산)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관찰과 소감, 그리고 1884년 가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행한 내륙 여행에 대한 세밀한 여행록이다.셋째는 외교관으로 3년 동안 조선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외교부서와 주고받은 공문이다.넷째는 서울 근무하면서 본국 정부와 주고받은 공문서다.다섯째는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록이다. 이상의 기록물은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전해 온다. 단지 서로 다른 나라의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내용이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소중하고 값진 자료와 정보가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 조지 포크에 대해서 뿐 아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패션큰사전에 보면 ‘마괘(馬褂)’가 표제어로 올라와 있습니다. 이 사전에서 ‘마괘’란 “중국 청나라 때 복식으로 길이가 허리보다 짧은 웃옷으로 소매는 팔꿈치 정도 길이로 행괘(行褂)라고도 하며, 여밈은 주로 끈을 사용하였다. 예복용으로는 심홍(深紅, 짙은 다홍빛), 장자(醬紫, 짙은 자줏빛), 심람(深藍, 짙은 남빛), 녹(綠), 회(灰) 등의 색을 사용하였고, 황색은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것 이외에는 착용할 수가 없었다.”라고 풀이합니다. 이 ‘마괘’는 1885년 8월 27일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서 풀려나면서 가지고 온 것인데 ‘마고자’로 변형되었다고 하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마고자로 추위를 견뎠으며 입기가 쉬워 백성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하지요. 마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변형된 부부은 가슴에 섶을 붙였고, 저고리보다는 길이가 조금 더 긴데 목 부분은 많이 파여있어 깃과 동정을 따로 붙이지 않았습니다. 원래 남자만 입던 옷이었지만, 뒤에 남녀노소 상관없이 입었다고 합니다. 저고리 위에 입는 덧옷의 하나인데 또 다른 것으로는 배자와 조끼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끼는 1900년 전후 서양옷의 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