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함양군은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 선생의 문학과 사상을 기리는 '제22회 함양연암문화제'를 오는 9월 13일부터 14일까지 이틀 동안 안의면 일원에서 연다고 밝혔다. 올해로 22회를 맞는 함양연암문화제는 연암 박지원 선생이 1791년부터 1795년까지 안의현감으로 재임하며 백성을 위한 실용적 학문을 행정에 실천한 '이용후생'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마련됐다. 물레방아 실용화 등 연암의 실학사상이 실제로 구현됐던 안의면에서 해마다 문화제를 열어 그의 사상적 유산을 군민과 함께 되새기고 인문학적 값어치를 나누는 마당으로 발전시켜 오고 있다. 올해 문화제는 '연암의 자취, 물레방아의 고장 안의'를 주제로, 연암의 실학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인문학적 통찰을 나눌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연암 학술대회, 연암 부임 행차, 현민 안녕기원제, 개막식, 축하공연, 연암 노래자랑, 미술 실기 공모전, 역사 퀴즈대회, 동아리 공연 등 다양한 참여형 프로그램이 군민과 방문객을 맞이한다. 첫째 날인 13일에는 낮 2시 봄날센터에서 연암 학술대회가 열려 연암의 철학과 사상을 학문적으로 조명한다. 이어 저녁 6시부터 안의면사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 열하일기를 따라서, 답사 7일 차 일자 : 2025년 4월 25일(금요일), 이동 거리 199km 호텔 : 고북구고원금색주점(古北口古源金色酒店 010-6903-2388) 북경의 거리는 깨끗하고 빌딩 숲으로 세계 일류도시로 변모하였나, 도로에는 구걸하는 사람이 목에 건 정보무늬(QR코드) 인식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거지도 최첨단 슬기말틀(스마트폰)로 결재를 받는 모습을 보며, 중국 사회의 변화에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연암은 1780년 8월 1일부터 5일까지 자금성 남서쪽에 있는 조선 사신이 묵는 조선관에서 머물며 여러 기록을 남겼습니다. 필자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지만, 그 규모와 화려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살아있는 박물관 자금성 천안문 자금성(故宫博物院 紫禁城)을 보려고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7시에 출발했습니다. 8시 40분경 천안문이 보이지도 않는 ‘전문대가’에서부터, 줄 서서 지하차도 두 개를 지나고, 소지품과 가방을 철저하게 뒤지고 검색대를 통과했습니다. 안면 인식과 입장권을 확인하고서야 오전 10시 20분경 천안문 광장에 진입하여 자금성에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사에서 입장권을 살 때 여권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제52차 고(옛)조선유적답사회 답사기 열하일기를 따라서 배우는 길위의 인문학 역사답사 글, 사진 안동립(고조선유적답사회 회장, 동아지도 대표) 날자 : 2025년 4월 19일(토) ~ 4월 28일(월), 9박 10일 단원 : 24명, 대장 안동립, 단원 강경숙, 강계두, 강명자, 궁인창, 김완숙, 김제일, 김희곤, 문부산, 박석룡, 안옥선, 엄수정, 윤광일, 이래현, 이미선, 이우언, 이윤선, 이효웅, 정운채, 조성호, 조평규, 최성미, 하영택, 홍승원 안내 : 황일만, 손광휘, 운전기사 : 장개(张凯) ※ 연암 박지원의 일정에 사용된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양력으로 보면 한 달 정도 늦은 일정으로 보면 된다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크게 한번 울어 볼 만한 장소로구나!”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신단 40명과 하인 장복, 창대 등 모두 285명에 달하는 대규모 일행이 나팔을 불면서 창덕궁 앞 돈화문을 출발하였다.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떠나 6월 6일 평양 대동문을 거쳤고, 6월 24일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에서 한둔하였다. 이후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심양(성경)에 머물렀고, 7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10. 23.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고맙게도 KBS 강석훈 기자가 문상을 와주었습니다. 강기자는 자기가 쓴 책이 곧 나온다더니, 10. 31. 초판이 나오자마자 나에게도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바로 《조선의 大기자 연암》이란 책입니다. 대(大)기자라니? 연암을 좋아하고 열하일기를 애독한 나로서는 순가 ‘대기자’에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강 기자가 연암을 ‘대기자’라고 부르는 것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머리말에서 강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하일기는 대기자의 면모와 식견, 실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장정의 르포르타주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특정 주제나 지역 사회를 심층 취재한 기자가 취재 내용과 식견을 바탕으로 뉴스와 여러 에피소드, 논평 등을 종합적으로 완성한 기사이다.” ‘그래! 기자의 관점에서는 《열하일기》에서 연암의 대기자의 면목을 읽어낼 수 있겠구나!’ 그런데 강 기자는 연암이 능숙한 대기자의 필치로 《열하일기》를 썼을 뿐 아니라, 연암 스스로 《열하일기》에서 자신을 ‘기자’라고 했답니다. ‘으잉? 이건 무슨 말이야? 당시에는 ‘기자’라는 개념도 없을 때 아닌가?’ 1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