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당시, 우리 백성들 가운데는 왜군의 포로가 되어 왜군에게 협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담화문을 내렸다.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너희에게 특별히 죄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왜적을 잡아 나오거나 왜적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포로가 된 사람을 많이 데리고 나오거나 해서 어떠하든 공이 있으면 양민과 천민을 막론하고 벼슬도 시킬 것이니 너희는 생심이나 전에 먹고 있던 마음을 먹지 말고 빨리 나와라.” 이처럼 선조는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나라 문서에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왜군이 알 수 없는 한글을 썼다. 이 담화문 덕분에 김해수성장 권탁은 왜군 수십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백여 명을 구하는 공을 세웠다. The Power of Hangeul in the Imjin War Moreover, if you capture Japanese soldiers or gather information on their actions, or bring back many of the capture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장용준)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 쪽이 남긴 종군 기록을 우리말로 풀이하고 주석을 단 국역서 《일본의 임진ㆍ정유전쟁》을 펴냈다. 이 책에는 《조선진기(朝鮮陣記)》, 《고려일기(高麗日記)》, 《서정일기(西征日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4종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과 명나라의 시각에서 본 번역서 펴냄에 이어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국역서를 발간함으로써, 동아시아 3국의 입장이 반영된 임진왜란ㆍ정유재란 역사자료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조선진기》는 쓰시마번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 과정을 기록한 편찬물(1592∼1598년 기록)이다. 《고려일기》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부대에 소속되어 참전한 다지리 아키타네(田尻鑑種)의 일기(1592∼1593년 기록)다. 이 두 자료는 실제 전투를 수행한 현장 지휘관의 생각이 반영된 기록으로, 실제 전투의 내용과 그 과정에서 보인 일본군의 생각과 행동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서정일기》는 임진왜란 초기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지휘하는 부대를 따라온 승려 덴케이(天荊)의 일기(1592년 기록)이다. 《조선일일기》는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감찰관 오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번에도 서애학회 자문위원인 고교동기 류벽하가 《서애연구》 12권을 보내주었습니다. 《서애연구》가 발간되면 창간호부터 12권까지 꾸준히 보내주는 벽하 덕분에 저도 서애 선생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고, 나아가 서애 선생의 진정한 나라 사랑, 백성 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존경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12권에는 권두 논문으로 최종호 교수의 <이순신의 류성룡 존모(尊慕)와 류성룡의 이순신 탁용(擢用)>이 실렸고, 일반논문으로 최진덕 교수의 <서애 류성룡의 통곡과 서애학의 본질> 등 5편의 논문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중국 하준(何俊) 교수의 <류성룡과 중조(中朝)유학>이라는 논문이 실렸네요. 중국어로 쓰인 논문이라 저는 읽을 수가 없었는데, 마지막에 영문초록을 실어 그나마 대충 논문 요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12권에서 특히 제 눈에 띄는 것은 백권호 서애학회장과 류을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같이 쓴 글 <임란 종전 직후 전전(戰前) 체제로의 복귀와 그 결과>입니다. 서애는 1598년 주화오국(主和誤國), 곧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누명을 쓰고 영의정에서 쫓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 칠백의총관리소(소장 권점수)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6월 21일 낮 1시 칠백의총(충남 금산군)에서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칠백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제25회 칠백의사 추모 예능대회」를 연다. * 칠백의총: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과 승장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의병과 의승이 금산 연곤평(延昆坪)에서 1만 5천여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자 그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신 국가 사적지 금산청년회의소(회장 허진영)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25회 칠백의사 추모 예능대회」는 충청남도와 대전광역시의 초등·중학생을 대상으로, 칠백의사 추모를 주제로 한 그리기 대회로 진행된다. 참가를 희망하는 학생은 필기구ㆍ물감ㆍ물통ㆍ붓ㆍ받침대 등 필요한 도구를 지참하면 되며, 도화지는 행사 당일 현장에서 제공한다. 참가 신청은 칠백의총 누리집(http://700.khs.go.kr)을 통한 온라인 또는 우편(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 전자우편(clfqor700@korea.kr)으로 가능하며, 당일 현장 참여도 할 수 있다. 또한, 부대 행사로 금산군청과 금산청년회의소에서 준비한 ‘기념품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장용준, 이하 박물관)이 관람객 1,200만 명을 돌파했다. 박물관은 1984년 11월 2일 개관하여 지난 2014년에 관람객 900만 명을 돌파했고, 개관 이후 40년 만인 2024년 말에 전체 관람객 1,200만 명을 넘어섰다. 진주성 안에 있어 유료입장(진주성 입장료 성인 2,000원, 2025년 기준)인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뜻깊은 수치다. 더불어 3D입체영상관의 관람객도 2월 현재 109만 명을 넘어섰으며, 연평균 5만여 명이 관람한 인기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3D입체영상관은 국내 유일의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으로 전쟁의 역사와 의의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 2003년부터 운영한 공간이다. 현재 <진주대첩>과 <의열의 상징, 제2차 진주성 전투> 두 편을 번갈아서 상영 중이다. 입체영화 <진주대첩>은 진주대첩 승전 431돌을 맞아 2023년부터 공개해 왔다. 2003년작 <진주대첩>을 새롭게 제작한 것으로 발전된 그래픽 기술과 새로운 해석, 시나리오로 전투의 박진감과 사실성, 비장미를 높였다. 2011년부터 2021년에는 <명량대첩>을 상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경북 문경에 있는 ‘문경옛길박물관’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문경 최진일가묘 출토복식>이 있습니다. 이 유물은 지난 2006년 경북 문경시 영순면에 있는 전주최씨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최진(崔縝)과 그 부인, 그리고 후손으로 추정되는 3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은 중치막, 액주름(겨드랑이 아래 주름이 잡혀 있는 곧은 깃의 옷), 족두리형 여모, 저고리, 바지 등 모두 65점이지요. 특히 ‘중치막(中致莫)’과 ‘족두리형 여모(女帽)’는 지금까지 발굴된 출토복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치막은 사대부가 사람들이 나들이할 때 입던 옆트임이 있는 곧은 깃의 도포(袍)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었으나 이 중치막은 임진왜란 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문경 최진 일가묘 출토복식’은 16세기 중후반기 남녀복식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이미 지정된 국가민속문화재 '문경 평산 신씨묘 출토복식'과 함께 당시 지역의 사회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문경옛길박물관”은 과거길로 유명한 문경새재를 조망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출구전략. 어떤 상황에서 빠져나갈 때 쓰는 전략이다. 전진보다 후퇴가 더 어려울 때가 있듯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무사히 탈출하기는 무척 어렵다. 특히 양자관계가 아니라 셋 이상이 얽힌 다자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조선, 명, 일본이 전쟁을 벌인 임진왜란이 그런 상황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며 어차피 확실한 승부를 내기는 어려워졌다. 남은 것은 서로 적당히 체면을 지키며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이었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전쟁보다 어려운 것이 강화 협상이었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연구교수인 김경태가 쓴 이 책, 《허세와 타협: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은 이런 딜레마에 처했던 세 나라의 상황을 자세히 보여준다. 협상에서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허세다. 가진 것이 없어도 있는 척해야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허세만 부릴 수는 없다. 결국 타협을 해야 한다.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건너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래는 조선에 직접 건너와 일본군을 지휘할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끝내 조선으로 넘어오지 않았고, 현장에 있는 장수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73-74)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법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배가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얕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 든든한 장계를 쓴 주인공은 잘 알려진 것처럼, 성웅 이순신이다. 그는 존폐 위기에 선 조선의 수군과 마지막 남은 12척의 배로 조선 바다를 지켜냈다. 역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은 나를 알고, 적을 알고, 때를 알았던 이순신의 승부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공로의 이면에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의 빛나는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뜻밖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규희가 쓴 이 책,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는 무척 소중하다. 책의 부제인 ‘이순신과 류성룡의 임진왜란 이야기’가 보여주듯, 이 책은 이순신을 있게 한 ‘동네 형’ 류성룡의 역할도 비중 있게 다뤘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 남산 아래 건청동에서 함께 뛰어놀며 자란 사이였다. 건청동은 오늘날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를 써서 ‘충무로’라 불리는 지역이다.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동네 형이자 인생 지도자였다. 이순신은 나이는 류성룡보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번에 제가 몸담은 호산나 찬양대에서 행주산성에 다녀왔습니다. 해마다 한 번은 야외나들이를 하였는데, 그동안 코로나로 멈췄다가 이번 오래간만에 행주산성으로 야외나들이를 한 것이지요. ‘행주산성’ 하면 행주치마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왜적과 치열하게 싸우다 무기가 다 떨어져 가자, 여자들이 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지요? 그래서 이후 ‘행주치마’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말입니다. 사실 행주대첩 이전에도 ‘행주치마’라는 용어는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행주대첩의 승리에 취해 이를 떠벌리다가, 행주산성의 ‘행주’와 행주치마의 ‘행주’가 같으니까, 행주치마도 여기서 유래된 것 아니냐는 지레짐작으로 유래가 와전된 것입니다. 그럼 ‘행주치마’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요?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행자승이 절에서 일을 할 때 두른 치마를 ‘행자치마’라고 하다가 ‘행주치마’가 되었다는 것을 유력하게 봅니다. 그리고 행주대첩을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아울러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한다는 것도 잘 아시지요? 그런데 ‘대첩’이라면 적을 크게 이긴 승리를 말하는 것인데, 사실 행주대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