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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임진왜란을 극복한 두 영웅, 이순신과 류성룡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규희, 토토북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73-74)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법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배가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얕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 든든한 장계를 쓴 주인공은 잘 알려진 것처럼, 성웅 이순신이다. 그는 존폐 위기에 선 조선의 수군과 마지막 남은 12척의 배로 조선 바다를 지켜냈다. 역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은 나를 알고, 적을 알고, 때를 알았던 이순신의 승부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공로의 이면에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의 빛나는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뜻밖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규희가 쓴 이 책,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는 무척 소중하다. 책의 부제인 ‘이순신과 류성룡의 임진왜란 이야기’가 보여주듯, 이 책은 이순신을 있게 한 ‘동네 형’ 류성룡의 역할도 비중 있게 다뤘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 남산 아래 건청동에서 함께 뛰어놀며 자란 사이였다. 건청동은 오늘날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를 써서 ‘충무로’라 불리는 지역이다.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동네 형이자 인생 지도자였다.

 

이순신은 나이는 류성룡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언제나 대장 역할을 할 만큼 기개와 지략이 뛰어났다. 게다가 문관 집안 출신으로 글공부를 많이 하여 서예나 문장에도 능통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대대로 문과에 급제했던 집안 내력과 달리 무관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있을 법한 이런 진로 고민에 류성룡은 슬기로운 답을 해주었다. 류성룡의 독려는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p.11)

“저희 집안은 오대조가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님은 병조참의를 지내셨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뒤 아버님께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가세가 기울었지요. 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저는 문관보다는 활 쏘고 말 타고 창칼을 쓰는 무관이 되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일하는 데에 문관, 무관이 어디 있느냐? 나도 비록 문관이 되고자 하지만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병법에 능해야 하기에 틈만 나면 병서들을 읽고 있다. 너처럼 기백이 뛰어나고 용맹스럽고 지략이 뛰어난 장수가 태어난다면 이 나라에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느냐. 부디 그 뜻을 굽히지 말았으면 한다.”

 

과연 이순신은 그 뒤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되었고, 류성룡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다. 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전했다. 돌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서로 누구보다 잘 알아주는 지기(知己)였다.

 

당시 조선의 국론은 분열되어 있었다. 곧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쪽과, 아닐 것이라는 쪽으로 나뉜 가운데 대세는 침입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류성룡의 생각은 달랐다. 머지않아 왜군이 침입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이순신을 떠올렸다. 그라면 조선 바다를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정읍 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내려보내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엄청난 특진을 건의한 것이다. 반발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 판단했다.

 

(p.12~13)

“전하, 이순신에게 전라도 쪽 바다를 맡기시옵소서! 그는 능히 그 일을 해내고도 남을 사람이옵니다. 또한 형조정랑인 권율을 의주 목사로 삼아 육지의 방비를 맡기시옵소서.”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전하, 이제 겨우 종육품 현감인 이순신에게 정삼품 수군절도사라는 벼락감투를 내리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전하,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사옵나이다. 부디 그에게 조선의 앞바다를 맡겨 주옵소서! 장차 이 나라의 운명이 달린 일이옵니다!”

 

 

이렇게 일개 현감이었던 이순신은 류성룡의 추천으로 ‘갑자기’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동네 형의 추천으로 그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 많았을 법도 했다. 그러나 류성룡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고, 류성룡의 간언을 받아들인 선조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나라를 구했다.

 

이윽고 전쟁이 일어났다. 1592년 4월 12일, 왜는 명나라를 치러 갈 터이니 길을 비켜달라는 명목으로 30만 대군을 9개 대대로 나누어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왜적을 처음 맞은 조선의 태세는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제일 먼저 나가서 싸워야 할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선 103척을 바다에 빠뜨린 뒤 도망갔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수군을 해산시킨 뒤에 배 50여 척과 무기를 바다에 몽땅 던지고 달아났다. 경상도 바닷길이 훤히 열리며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향했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이때부터 전라도 바다를 지키던 이순신과 재상 류성룡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순신은 연전연승,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전쟁의 신’으로 거듭났고, 류성룡은 아예 명나라로 달아나려는 선조를 제지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군을 청해오는 등 국난 극복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바다와 육지에서 고군분투하던 두 사람은 왜군과 싸우는 와중에서도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조정 신료들의 질시와 모략과도 싸워야 했다. 결국 적의 이간질에 걸려든 조정 대신들과 임금 선조는 ‘어명을 받았으나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라는 항명죄를 물어, 이순신을 모질게 고문하고 도원수 권율 휘하의 일개 군졸로 백의종군시켰다.

 

이때도 류성룡은 이순신을 구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위로하는 한편, 명나라 원군의 막대한 군량미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자신의 충정을 알아주는 류성룡은 이순신이 가장 믿고 따랐던 조정 대신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걸 훌훌 털고 술 한잔하자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무술년 11월 19일, 이순신은 그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고, 류성룡 또한 같은 날 조정 신료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류성룡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북인 세력이 류성룡이 ‘왜에게 한강 남쪽을 떼어주고 화친하려 했다’라는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둘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서로에 대한 믿음도 비슷했다. 그리고 후세를 위하여 전쟁을 기록한 것까지 비슷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류성룡은 《징비록》을 남겨 앞으로 또다시 조선에 전란이 찾아오지 않기를, 임진년의 참화를 기억하여 적을 잘 경계할 것을 바랐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산 것이 계기가 되어, 임진왜란이라는 큰 위기에서 한 명은 바다에서, 한 명은 육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과 류성룡. 오늘날 돌아봐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임은 분명하다.

 

이들의 아름다운 우정과 우국충정이 오늘날에도 빛나는 이유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였던 깊은 신뢰, 그리고 서로를 알아본 마음 덕분일 것이다. 때로는 사소한 인연이 역사를 바꾼다는 말처럼, 이 둘의 인연이야말로 조선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이 책은 두 사람, 특히 류성룡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